088. 포항공항 (3)
-개망했다, 이거……!
-키 못 꺼내오는 거임?
-꼬마가 뒈지는데 그게 문제? ㅋㅋ
“박준!”
고천수는 다시 틈새를 보며 소리쳤다.
“일단 나와!”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쿠당! 쿠당탕탕!
소란스러운 소리만 계속 울려퍼졌다.
‘이런, 망할……!’
안에 뭔가 있을 것을 대비하고 들여보냈어야 했다. 박준은 지금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쿠당탕!
-도대체 뭔 일이 일어나는 것?
-술래잡기 하나.
-오히려 꽤 버티는 거 아님?
박준이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는 꽤 길었다. 다만 소리의 원근감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걸로 봐서는 아직 잡혀서 몸을 뜯기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크아아아아!
틈새로 좀비가 흑구에게 바짓가랑이를 붙들린 모습이 보였다. 좀비는 몸을 돌려 아래로 손을 뻗었고, 흑구는 그걸 피해 또 틈새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났다.
‘설마…….’
왈왈!
흑구가 짖는 소리도 여러 번 들렸다. 그렇게 발 구름 소리가 여러 번 들린 끝에 틈새에서 다시 반가운 얼굴이 불쑥 하고 나타났다.
“형!”
박준이었다.
“얼른! 얼른 나와!”
고천수는 박준에게 손을 뻗었다.
박준은 키가 여러 개 꽂혀 있는 꾸러미부터 고천수에게 내던졌다.
“형! 그걸로…….”
박준은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쑥 끌려갔다.
“준아!”
좀비에게 발을 붙잡힌 듯했다. 그대로는 좀비에게 물려 버릴 터.
으르르르르!
순간 끼어드는 소리가 있었다.
-또 흑구임?
-용명함 실화냐;;
흑구가 도와준 덕인지 박준은 다시 틈새 사이로 진입해 빠르게 기어오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고천수의 손짓을 따라 열심히 포복 전진을 한 박준은 결국 틈새 밖으로 빠져나왔다.
“헉, 허억.”
숨을 고르며 바닥을 뒹구는 박준을 보며 고천수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괜찮냐?”
말로만 물을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박준이 실제로 상처 입었는지를 살폈다.
-물렸으면 손절할라고. ㅋㅋㅋ
-아따, 꼼꼼히도 살펴보는구만.
-ㅋㅋㅋㅋㅋㅋ
다행히 물린 흔적은 없었다. 고천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다가 틈새를 다시 쳐다보았다.
“잠깐, 흑구는……!”
그때였다.
흑구가 자신을 불렀냐는 듯 이쪽으로 자신감 있게 걸어 나왔다.
“흑구!”
고천수는 달려가 흑구를 붙잡았다.
“너 이 자식!”
-흑구도 물렸는지 확인ㅋㅋㅋㅋ
-겁나 감동적으로 안아주는 줄.
흑구의 상태를 확인한 고천수가 입에 미소를 걸었다.
“잘했어, 인마……!”
이제 키를 가지고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다행이야.”
옆에서 진 소령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박준에게 말했다.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엄청 용감하구나, 너.”
“아니에요.”
박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묻은 몸을 털었다.
“뭐라도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이 시대의 참 일꾼.
-이 시대의 ‘희망’ 정도가 낫지 않을까?
-쓸 만한 꼬마임.
채팅을 훑어보며 고천수가 키 꾸러미를 든 채 진 소령에게 말했다.
“소령님, 이제 여기서 나가서 이동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더 시간을 끌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러죠.”
진 소령은 옆에 있던 작은 키 군인에게 손짓했다.
“자, 얼른 나가자고.”
“우리도 가자.”
고천수는 박준과 흑구를 챙겼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잔해에 막힌 좀비의 울음소리만 옅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
“빠르게 준비해라!”
키는 근처 주차장에 있던 차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는 거다!”
진 소령은 군인들을 신속히 진두지휘했다. 평소 훈련이 잘되어 있는 것인지 군인들은 빠르게 차를 가지고 정렬했다.
“타시죠.”
진 소령은 고천수에게 자신이 탑승하는 SUV 차량에 함께 탈 것을 권했다.
“개도 타도 됩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진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얼른 타시죠.”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린 고천수의 눈에, 저 멀리서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박준이 보였다.
“준아!”
부르자 박준이 화들짝 놀라며 고천수에게 달려왔다.
“네, 형!”
“거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아.”
살짝 탄식한 박준이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랑 같이 지냈던 분들이 있어서요. 그래서 대화 좀 나눴어요.”
“아, 그래?”
잠시 고민하던 고천수는 박준의 등을 떠밀었다.
“그럼 넌 가서 다른 차 타.”
“네?”
“친한 사람들 많다며. 그쪽에 골라 타.”
-준이 당황하는 표정 봐. ㅋㅋ
-천수, 삐진 거임?
-뭐얔ㅋㅋㅋㅋ
“오해하지 마십쇼, 형님들.”
그런 게 아니었다.
‘준이는 원래 그룹이 있던 거니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박준은 고천수보다 군인들과 먼저 함께 지냈다.
솔직히 누구를 챙겨 줄 입장이 아닌 고천수로서는, 박준을 그들과 어울리게 하는 게 더 나았다.
“정말 가요?”
그렇게 묻는 박준을 보며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서 타. 어차피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뭘.”
재회한 김에 인사 좀 더 나누라는 의미도 있었다.
고천수가 손짓하자 박준은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는 군인들에게 뛰어갔다.
-버렸네.
-눈물.
“자, 저희도 가죠.”
고천수는 먼저 흑구와 함께 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이윽고 다른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탑승을 유도한 진 소령이, 조수석 문을 열고 뒤따라 차에 오를 때였다.
쿵.
갑자기 땅에서 울림이 있었다.
“뭐지?”
고천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땅에서 큰 울림이 몇 번 더 일어났다.
쿠아아아아앙!
공항 쪽이었다.
고천수가 고개를 돌리자 공항에 금이 가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소령님!”
“저도 봤습니다!”
진 소령은 운전병에게 얼른 지시했다.
“출발해! 어서!”
부우우웅!
차가 출발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건물이 쪼개져 무너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
고천수는 무너지는 건물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죽을 뻔했잖아!’
에스컬레이터가 무너졌을 때부터 건물이든 뭐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 전부 다 붕괴될 줄은 몰랐던 터다.
쿠우우웅!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건물이 무너진 건 사실 다른 데에 있다는 듯, 땅이 심하게 떨리고 있던 것이다.
“지진인가……?”
고천수는 창문 밖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땅이 거미줄이 친 것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지진……?’
진 소령의 의견에 동감할 만큼 땅이 흔들리기는 했으나, 고천수는 뭔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냐, 이건!’
콰아아아앙!
지면에서 뭔가 불쑥 올라왔다.
“뭐야!”
진 소령의 외침이 고천수의 심정과 같았다.
땅을 부수고 올라온 건, 사람의 민머리 두상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다만 크기가 어마어마했을 뿐.
-빅 바디!
-헐. 슈밤.
-올라온다!
쿠구구궁.
머리를 드러낸 빅 바디가 조금씩 땅을 부수고 올라왔다.
차들은 갈라지는 땅을 피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아니, 망할!”
고천수는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왜 여기에도 처박혀 있는 거야!”
무슨 땅 속에 박혀 있던 우주 전쟁 병기도 아니고, 등장하는 방식이 너무 아스트랄했다.
“다들 빠르게 따라붙어! 항구까지 한 번에 간다!”
진 소령은 무전기로 뒤이어 따라오는 군인들에게 명령을 전파했다.
“소령님, 저희 혹시 지금 가는 곳이 어떻게 됩니까?”
급박한 상황이긴 해도 고천수는 미리 행선지를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가는 곳 말입니까? 인곡항입니다만…….”
인곡항이라면 근처에 있는 비행기에서 확인한 지역 지도에서는, 그다지 큰 항구로 보이지 않던 곳이었다.
“거기서 저희 인원이 다 탈 배가 있는 겁니까?”
노파심에 묻자 진 소령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마도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이쪽에 먼저 있다가 떠난 군인들이 다 준비해 뒀다고 했습니다. 차도 약속대로 남겨 뒀으니까 배도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고천수는 다른 항구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포항 신항도 있던데, 거기는 고려 사항이 아닙니까?”
“그쪽은 철강 제품을 나르는 커다란 배가 다니는 곳입니다. 배가 있다고 해도 바로 오르기 힘듭니다. 제 지인이 거기에서 일하는데, 그 덕분에 몇 번 들러 봤기에 압니다.”
그렇다면 진 소령이 아는 곳은 오히려 포항 신항이라는 얘기가 됐다.
‘괜찮나?’
인곡항은 진 소령도 처음 가 보는 곳일 터. 웬만하면 아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지만, 배를 거기에 마련해 뒀다면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쿵! 콰앙!
도대체 몇 마리나 숨어 있던 것인지 지면의 울림이 끊이질 않았다.
“형님들, 저놈들 상대할 방법은 없습니까?”
빅 헤드도 까다로운 판에 성체인 빅 바디라니 진짜 두통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체는 수명이 짧을걸?
-몇 시간 못 갈 거임.
-대적하지 말고 피하는 게 상책.
피하라니, 그건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었다.
‘수명이 짧다니 그나마 다행이다만…….’
그것도 빅 바디에게 붙잡히지 않을 때나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쪽으로!”
진 소령이 운전병에게 외쳤다.
몇 번 와 봤다고 하더니 길을 좀 알고 있는 듯했다.
덜컹!
차 밑이 뭔가에 부딪혔다.
끼익! 끼이익!
휘청이는 차의 운전대를 붙잡고 운전병이 “으아아아아!”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꽉 잡아!”
진 소령이 심하게 꺾일 뻔한 운전대를 보조해서 잡아 주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야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차가 휘청거리면서 속도가 줄어 버렸다. 그사이 다른 차들이 먼저 치고 앞으로 나갔다.
-뭐임, 저거.
-소령 놔두고 가는 건가?
-이렇게, 버려진다고?
고천수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다른 차들이 앞서 나간 건 상관없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먼저 가라고 진 소령이 말해 두었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고천수의 생존이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고천수가 외치자 운전병이 자세를 고치며 다시 차를 빠르게 운전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차들보다는 뒤처진 상태였다.
“아, 개…….”
-천수야, 그 욕만은!
-흑구는 귀 닫아라.
-ㅋㅋㅋㅋㅋ 미친.
고천수가 애써 욕을 집어삼킬 때였다.
쿠우웅!
앞서가던 다른 차량 행렬과의 사이로 땅이 갈라지더니 빅 바디의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으아아아!”
운전병이 당황하며 운전대를 꺾었다.
“크윽……!”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차 안에서 구르며 고천수는 흑구를 붙잡고 탄식했다.
“똑바로 운전 좀!”
하지만 차가 안정화되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리저리 몸을 처박던 고천수가 창밖을 내다봤을 때는, 그가 탄 차가 다른 행렬과 떨어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고천수가 외치자 운전병이 당황해서 답했다.
“괴물이 나타나서 길이 끊겼습니다! 차선을 선택해서 가는 중입니다!”
“차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고천수를 보며 진 소령이 입을 열었다.
“포항 신항입니다. 그쪽으로 가는 겁니다.”
“포항 신항…….”
역시 사람 입 밖으로 나온 건 그냥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까 전에 포항 신항을 언급했더니, 진짜 기구하게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곡항으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셋만 떨어져 다른 그곳에 가게 되어 버렸다.
“소령님, 거기에 대해 잘 아신다고 하셨죠?”
그나마 다행인 건 진 소령이 그 장소에 들른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알기는 아는데…….”
진 소령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잘 안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기억해내야 합니다.”
고천수는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저희는 거기서 배를 타야 돼요.”
싫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됐다. 빅 바디가 쫓아오든 아니면 거기에 다른 몬스터가 있든 간에, 빠르게 이곳을 뜨지 않으면 위험했으니까.
덜커덩.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운전병은 진 소령과 고천수에게 말했다.
“차에 손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오래 갈 수가…….”
어차피 차로 갈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다.
진 소령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고천수와 눈을 맞췄다.
이제 선택해야 할 운명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