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86화 (86/224)

086. 포항공항 (1)

고천수와 꼬마가 타고 있던 메이플라이는 곧 지면에 가깝게 내려왔다.

“뛸 수 있지?”

메이플라이의 속도가 느려서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우윽, 토할 것 같아요.”

다만 뱅글뱅글 돌면서 내려왔기에 탑승자에게 현기증을 일으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뛸게요.”

그래도 한 사람 몫은 하라는 말의 영향을 받은 듯, 꼬마는 곧 아래로 뛰어내렸다.

풀썩.

아래는 풀이 수북이 나 있는 곳이었다. 안전하게 떨어진 꼬마가 허우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썩!

더 큰 소리를 내며 꼬마 바로 옆에 떨어진 고천수는 곧장 풀숲을 빠져나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역시 땅이 최고야.”

땅 위에 서려니 안도감이 몰려왔다. 고천수는 타고 왔던 메이플라이의 사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며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철퍽, 철퍽!

많은 수의 메이플라이가 연달아 추락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진짜 많네.

-비행기 다 박살 났겠는데.

-사랑비가 내려와~!

고천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보기 좋지는 않네.”

쿠우웅!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비행기에서 엄청난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행기에 타 있었어도 살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꼬마가 다가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고천수는 그런 꼬마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반문했다.

“너는 괜찮냐?”

“네, 전 괜찮아요.”

“그거면 된 거야.”

이런 세계에서 남이 괜찮은지를 따지는 건 사치였다.

일단 자신이 살아남으면 본전이었다.

“후.”

그렇다고는 해도 고천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흑구 이 새끼는 왜 떨어져서.”

비행기가 저대로 가면 그대로 탑승하고 있었어도 생존 확률이 적은 건 맞았다.

하지만 날개도 없는 놈이 그냥 뛰어내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ㅋㅋㅋㅋㅋ 진짜 걱정하는 거?

-그래봤자 개라고 생각하고 두고 내리려고 했잖아.

-뒤늦게 인성 챙겨도……!

그냥 개라고 하기에는 헤어짐에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녀석이었다.

-주위 둘러봐.

-그래, 사체라도 있으면 묻어 줘야지.

이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지면 살아남았을 확률이 거의 없었다.

혹시 말랑한 곳에 떨어져 생명을 건졌어도 어디 한 군데는 절단 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찾으면 좀 끔찍할 것 같은데요, 형님들.”

고천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위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흑구의 사체를 찾을 수는 없었다.

“……어?”

흑구가 여기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천수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색 형체의 개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흑구?”

왈!

확실했다.

흑구가 고천수를 보며 신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절뚝이면서 달려와도 모자랄 판에 신나게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라니, 고천수는 어이가 없어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왈왈!

코앞까지 다가온 흑구는 다시 봐서 반갑다는 듯이 고천수의 주위를 맴돌며 짖어댔다.

-뭐냐, 이거.

-얘 어떻게 산 거.

-나무에라도 걸렸나?

“개!”

꼬마가 다가와 소리쳤다.

“개 살았어요!”

“그래, 그렇네.”

고천수는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흑구에게 시선을 향했다.

할짝.

몸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쭈그려 앉은 고천수에게 흑구가 혓바닥을 갖다 댔다.

“아.”

할짝.

“하지 마.”

[띠링! 니목에혓바닥 님이 1젠 후원! - 낼름]

“…….”

고천수는 굳은 표정으로 흑구의 몸을 딱 잡아 밀어냈다.

하지만 화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천수는 이제야 의혹이 풀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너…….”

흑구의 입 주변에 메이플라이의 피부로 보이는 것이 끼어 있었다.

“메이플라이 하나 붙잡고 늘어졌던 거냐?”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정황상 메이플라이를 잡고 살아남은 듯했다.

“진짜 개쩌네, 너.”

알고 떨어진 건 아닐 테지만, 똑같이 메이플라이를 잡고 살아남았다니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내가 고른 개다워.”

-ㅋㅋㅋㅋㅋ 버리려고 했었잖아.

-스읍. 이건 좀…….

“형님들, 그렇게 자꾸 오해하실 겁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알아서 이렇게 살아서 왔으니 지금은 기분 좋게 생각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콰앙!

멀리서 난 폭음에 고천수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비행기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소리가 들린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꼬마야.”

고천수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네?”

“이름이 뭐냐고. 이름도 모르고 같이 갈 수는 없잖아.”

비행기가 어떻게 됐든지 간에 얼른 움직이기는 해야 했다. 청주 공항에서 비행기가 한 대만 떴을 리는 없었다.

뒤이어 다른 비행기가 무사히 포항 공항으로 온다면 7.5사단의 병사들도 오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 미끼로 놔둔 건 아닐지 모르겠네.’

다른 비행기들이 아직 이곳에 보이지도 않는 게 7.5사단의 술수라면 매우 간악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 앞서 나간 비행기를 미끼로 삼은 셈이지 않은가.

“저, 이름은 박준이에요.”

“준이.”

고천수는 꼬마, 박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천수야. 짧은 동행이겠지만 잘 지내 보자.”

“네!”

박준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천수는 일어서며 몸에 묻은 풀을 털어냈다.

“지금부터 빠르게 이동할 거야. 느리면 두고 갈 테니까 알아서 잘하고.”

“앗, 네……!”

왈!

흑구도 한 마디 거들었다. 고천수는 그런 흑구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분명 보통 녀석은 아니야.’

운이 좋아서 살아남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이런 세계에서는 운도 실력이었다. 고천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물론 가장 운이 좋아야 할 건 나지만.’

부웅! 부우웅!

하늘 위로 아직도 메이플라이들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우리는 신경 안 쓰나 봐요.”

박준이 그럼 메이플라이들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나마 다행이지.”

메이플라이들이 지상까지 노렸으면 지금쯤 풀숲에서 포복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어야 할 수도 있었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면서, 어느새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윙슈트를 뒤늦게 벗어던졌다.

바아아아아앙!

그때였다.

상공에 엄청난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 비행기가 목격됐다.

“저건…….”

색깔이 민항기는 아니었다.

국방색으로 칠해진 비행기였다.

-오우, 군용 다목적 수송기네.

-그런 건 어케 아는 거냐.

-군용인 건 나도 알 듯.

고천수는 수송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푸슛! 푸슛!

수송기는 조명탄을 흩뿌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메이플라이들은 수송기를 노리지 않고 그 조명탄 쪽으로 날아갔다.

“아.”

메이플라이가 발광체에 반응하는 듯했다. 고천수는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 망할. 내가 저기 탔어야 했는데.”

괜히 급하게 탔다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저 수송기에 탄 게 누구든지 간에 고천수보다는 안전하게 포항 공항에 도착할 것이었다.

-ㅋㅋㅋㅋ 천수는 굴러야 제 맛이제.

-저기 7.5사단 타 있지는 않겠지?

-전투기는 남아있는 게 없나.

고천수도 궁금해서 하늘을 계속 둘러봤지만 다른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갔거나 아예 출발을 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준아, 얼른 가자.”

고천수는 이제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했다.

***

이동했지만 주변에는 별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마을인가……?”

근처에 집들이 좀 보이기는 했지만 도심지와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시골 같은 분위기였다.

‘일단 공항 근처인 것 같기는 한데.’

비행기에서 지도를 살펴봤을 때 공항 근처에는 특별히 뭐가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는 현재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고천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하천이나 큰 도로도 없고.’

바로 옆에 어떤 지표가 될 만한 큰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비행기가 오던 경로로 따져 보건대 추측할 수 있는 장소는 한 군데뿐이었다.

‘포항 공항 남서쪽에 있는 마을.’

남서쪽이라고는 해도 남쪽으로는 아주 조금 떨어졌을 뿐이었다.

비행기가 메이플라이 때문에 항로를 이탈했던 점, 그리고 거기서 다이빙을 하는 바람에 위치가 또 바뀐 점을 고려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 멀지는 않을 거야. 얼른 가자.”

왈!

고천수의 말에 응답하듯 흑구가 먼저 뛰쳐나갔다.

-쟤는 힘도 좋네.

-문 상태로 떨어지느라 힘 다 썼을 텐데.

-나도 키우고 싶네.

동감이었다.

고천수는 앞서나가는 흑구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앞에 뭐 있나 먼저 봐주러 나간 건가?’

이 정도면 지능이 보더콜리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태 한 행동들을 보면 그 이상.

‘역시 난놈 하나 건졌네.’

고천수는 흑구를 뒤를 따라가며 계속해서 주변을 경계했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역시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형.”

박준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미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고천수도 탄식하며 말했다.

“저쪽이 공항인가.”

표지판이 보였다.

고천수는 일행과 함께 계속 걸어가 근처의 언덕 위에 올라섰다.

“있다.”

너머에 공항이 있었다.

“있어요?”

아래에서 박준이 고천수에게 물었다. 고천수는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럼 빨리 가요!”

“아니, 기다려.”

공항으로 갈지 안 갈지 고민을 좀 해야 했다.

‘그냥 바다 쪽으로 갈까?’

굳이 공항에 들어갔다가 7.5사단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했다.

지금쯤이면 적어도 그 공군 수송기 정도는 공항에 도착했을 게 확실했다.

‘걸어가면 1시간 좀 덜 걸리는 정도려나.’

지도로 확인했던 거리는 대략 그 수준이었다.

다만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청주 공항으로 갈 때도 몇 구간이 안전하지 못해 우회하느라 시간이 더 걸린 면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었다.

‘역시 이대로 가기에는…….’

여기서 항구까지 또 어떤 위험이 있는지 모르는 만큼, 별다른 계획 없이 이곳을 떠나기는 어려웠다.

“준아.”

“네! 형!”

“그래, 공항에 가자.”

일단 확인을 해 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터였다. 올라오라고 손짓하자 박준과 흑구가 위로 올라왔다.

그렇게 일행은 공항이 있는 반대편의 언덕으로 넘어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형, 높아요.”

이쪽은 언덕이 중간에 끊겨 있었다.

고천수는 말없이 박준과 흑구를 끌어안고 바로 앞에 보이는 도로를 향해 점프했다.

타악!

낮지는 않은 높이였지만 고천수는 둘을 데리고 안전하게 착지했다.

“와!”

박준이 바닥에 내려서며 감탄을 토해냈다.

“형, 대단해요!”

왈!

일행의 격찬에 고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고맙다.”

-애가 칭찬하니까 반응도 부드럽게 하네. ㅋㅋㅋ

-조심해, 언제 또 본성을 드러낼지 모른다고!

-[한도초과] : 천수는 착해. :)

고천수는 채팅창을 보며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눈빛을 바꿔 일행을 쳐다보았다.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포항 공항에 오긴 했지만 포항 공항이 목적지인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는지, 그것만 확인할 셈이었다.

“내가 조용히 들어가서 잠시 살펴보고만 올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잠입이 필요했다.

“너는 여기서 흑구를 데리고 있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형만요?”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의 도움이 아주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너는 여기서 망을 봐 줘. 나중에 뭐가 또 올지 모르니까.”

“네, 형.”

박준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혹시 필요하면 불러 주시고요.”

“든든하네.”

고천수는 박준의 어깨를 한 번 짚어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간다.”

흑구가 그런 그를 따라오려고 했지만 박준이 목덜미를 쥐며 말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흑구는 그대로 멈춰 섰다.

‘좋아.’

고천수는 홀로 포항 공항의 출입구로 향하며 어깨를 풀었다.

‘뭐라도 있는지 한번 살펴볼…….’

쾅! 콰과과광!

그때, 건물 안쪽에서 큰 소리가 쏘아져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