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있다 (1)
덜컥.
고천수는 바로 보급함을 내려서 열었다.
“이건……?”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은,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낙하산?
-아닌데.
-아, 이거. ㅋㅋㅋㅋㅋ
일단 낙하산은 아니었다.
비슷하기는 했다.
“아, 망할.”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윙슈트.
날다람쥐처럼 활강하게 해 주는 강하복이었다.
“농담?”
윙슈트에도 낙하산이 붙어 있기 마련이지만, 이건 진짜 강하복뿐인 듯했다.
-ㅋㅋㅋㅋㅋ 이야, 천수 재밌게 내려가겠네.
-이거 입으면 어떻게 멈춤?
-박살나면 됨.
“10젠이나 썼다고요.”
고천수는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이거 그냥 윙슈트는 아니죠? 무슨 기능 있는 거죠?”
-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앜ㅋㅋㅋㅋ
“웃지 말고요.”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낙하산이 없는 윙슈트를 입고 떨어지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냥 떨어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안전한 착지를 위해서는 다른 게 더 필요했다.
‘도끼도 숨겨진 기능이 있었으니까.’
보급함에서 나오는 아이템들은 상점에서 사는 것만큼 충분한 설명은 없었지만, 하나하나의 기능은 매우 뛰어났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손전등도 그랬다. 한 장소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나타나는 그놈에게 대항할 때도 필요한데, 여기까지 오면서 별일을 다 겪으면서 소실됐으니 나중에 또 필요하긴 했다.
“형님들, 혹시 보급함에서 같은 물건이 나오기도 합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니 시청자들이 지체없이 답해 주었다.
-잘 안 나옴.
-중복 아이템이면 중복이라고 뜨긴 해.
-상위 호환이나 하위 호환은 비교적 잘 나옴.
사실상 중복이나 다름없는데 낚일 수도 있다는 마지막 내용이 좀 걸렸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했다.
중요한 건 이 윙슈트를 어찌 하나 하는 것이었다.
“후…….”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물론 답은 하나였다.
-ㅋㅋㅋㅋ 결국 입네.
-그럴 줄 알았지.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단은 입고 나서 상황을 살피는 방법밖에 없었다.
“……뭐 해요?”
“으악!”
갑자기 들린 소리에 고천수가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넘어졌다.
“괘, 괜찮아요?”
“아, 씁…….”
윙슈트를 반쯤 입다가 걸려서 넘어진 탓에 너무 세게 몸을 박았다. 고천수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바닥에서 신음하다가 살짝 눈을 뜨고 앞을 쳐다보았다.
‘꼬마……?’
웬 어린 남자애 하나가 서 있었다.
“노, 놀라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기껏해야 10대 정도.
꼬마는 고천수를 일으켜주기 위해 옆으로 다가왔다.
“일으켜 드릴게요.”
“괜찮아.”
고천수는 손길을 거부하고 몸을 튕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와.”
애벌레가 몸을 일으키듯 유연하게 일어난 고천수를 보며 꼬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해요!”
“대단하긴.”
-좋아하네.
-얼굴에 홍조 뭐임.
“아, 형님들 진짜.”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며 꼬마에게 말했다.
“난 그냥 내 할 일하고 있던 것뿐이니까 네 자리로 돌아가.”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꼬마를 상대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거 타고 내려가려는 거예요?”
꼬마는 고천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고천수는 그런 꼬마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왜.”
“아, 음. 저도 같이 내려갈 수 있나 해서요.”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이 윙슈트는 1인용이었다.
“낙하산이면 모르겠는데, 이건 널 데리고 갈 수 있는 건 아니야.”
“아…….”
“그냥 네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어.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일부러 쌀쌀맞게 얘기했지만 꼬마는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윙슈트를 다 입고 잠시 고민하던 고천수는, 근처의 중앙 쪽 자리에 앉아 옆을 가리켰다.
“심심하면 옆에 앉든가.”
어차피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고천수에게도 시간이 있었다.
“심심한 건 아닌데요.”
그러면서도 꼬마는 고천수가 가리킨 자리로 와 풀썩 앉았다.
“누구랑 탔냐. 가족이랑?”
그렇게 묻는 고천수를 보며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밖에 없어요.”
“음.”
“두 분 다 괴물한테 잡혀 갔어요.”
-사과하셈.
-하, 으띃게 어린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죠?
고천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그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여기에 타게 된 거야? 운 좋게 군인들하고 만난 거냐?”
“네. 공군 아저씨들이 구해 줬어요.”
“그러냐.”
급하게 비행기에 올랐던 고천수는 군인들에 대한 정보가 적었다. 그렇다고 직접 물어보자니 괜히 갇혀 있는 공간에서 군인들에게 코가 꿰일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네가 보기에 좋은 사람들인 것 같긴 했냐?”
별 의미 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참고는 할 수 있었다.
꼬마는 고천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 구하느라고 괴물들한테 대신 많이 잡히기도 했거든요.”
“뭐, 괜찮은 사람들인 것 같긴 하네.”
적어도 7.5사단이 버스를 버리면서까지 공항으로 온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또 뭐 들은 건 없어?”
“또요?”
“공군이 다른 군인들하고 연락하거나 그런 거.”
정상적인 군대도 남아 있는지 알아 둘 필요는 있었다.
공군이 7.5사단 외에 다른 군인들과 연락했다면 충분히 참고할 만했다. 7.5사단과 대항할 만한 세력은 있는 게 좋으니까.
“음…… 잘은 모르겠는데요. 높은 아저씨가 군단장님이라고 부르면서 누구랑 연락하는 건 봤어요.”
“군단장님?”
군단이면 사단 이상인 전술 단위 부대였다.
‘그렇다면…….’
병력이 온전히 남아 있을 리는 없지만, 군 체계가 다 무너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앞서 진 소령의 태도를 봤을 때 7.5사단과의 만남은 분명 계획됐던 것은 아니었다.
진 소령이든 누구든 공군 지휘관이 연락한 대상은, 군단장이라는 호칭까지 봤을 때 정황상 7.5사단의 최고 지휘관이 아닌 다른 인물일 터였다.
“고맙다.”
고천수는 꼬마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덕분에 그래도 필요한 정보는 얻었네.”
“앗.”
꼬마는 몸을 흠칫하며 고천수의 손길을 피했다.
“저 애 아니에요.”
“뭔 소리냐 그건.”
고천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애 맞잖아.”
“저 머리도 모양 낸 거예요. 왁스로.”
그러고 보니 머리가 나름 모양새가 있기는 했다.
-천수 얼굴 봐. ㅋㅋㅋㅋ
-뭐라고 하기도 애매……. ㅋㅋㅋㅋㅋㅋ
-잘못하면 부모 잃은 애 상처 줄 듯.
이런 와중에 머리를 손질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됐지만 애니까 그러려니 했다.
어쩌면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더욱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뭐, 그래. 안 건들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꼬마와 더 얘기를 나눌 내용은 없었다.
대화를 너무 많이 나눠서 정드는 건 피해야 했다.
‘얼마 안 남았어.’
김포 공항에서 제주 공항으로 비행기를 타도 이동에 약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청주 공항에서 포항 공항이면 얼마나 금방 도착할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곧 터진다.’
뭔 일이든 일어나게 돼 있었다.
고천수는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형, 잘 건가요?”
갑자기 고천수가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자 꼬마가 의아한 듯 물었다. 고천수는 눈을 감은 채로 답했다.
“너도 누워. 자는 게 나을 테니까.”
마지막 배려였다.
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흑구까지 보며 고천수가 얼굴을 굳혔다.
“흑구야, 여기 의자 밑에 들어가 있어.”
고천수는 흑구가 의자와 의자 사이에 엎드릴 수 있도록 했다.
-뭐야, 흑구 안 데려가게?
-같이 가야제.
고천수도 마른 침을 삼켰다.
할 수만 있다면 그래야겠지만 윙슈트는 1인용이었다. 개를 안은 상태로 제대로 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 안 되면 두고 가야죠. 흑구한테도 그게 나을 겁니다.”
제대로 비행만 할 수 있으면 이런 고민은 안 했을 텐데, 흑구한테 상당히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데려가지 못하는 이상, 꼬마와 함께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ㅋㅋㅋㅋㅋ 지가 태워놓고.
-흑구. ㅜㅜㅜㅠ
-근데 이건 뭐라 못한다. 천수도 어쩔 수 없으니까.
쾅!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사건이 일어났다.
쿵!
비행기가 다시 미친 듯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형!”
그 외침에 고천수는 순간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깜짝이야. 민철이가 부른 줄 알았잖아.”
“민철이가 누구예요?”
“그런 사람이 있어.”
고천수는 상황을 살폈다.
쿵!
무언가 부딪히는 거였다. 비행기가 바람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안전벨트 매. 더 흔들릴 테니까.”
고천수의 말에 꼬마가 자신의 몸에 안전벨트를 채우며 말했다.
“형은요?”
“난…….”
언제 내려야할지 모르니 안 찬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난 안전벨트가 잘 안 맞아.”
“네?”
“그냥 그런 줄 알아.”
비행기가 추락하면 앉아서 안전 자세를 취하는 게 더 생존 확률이 높았다. 고천수는 꼬마의 몸을 눌러 숙이게 하고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지금인가……?’
비행 시간이 어느 정도 되기는 했다. 포항 공항에까지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상 그 근처일 가능성이 높았다.
쾅!
“형……!”
꼬마가 불안한 듯 외쳤다.
앞쪽 칸에서도 사람들이 크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콰직!
불길한 소리가 났다.
고천수가 그 소리에 놀라며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콰악!
고천수 근처의 벽이 반쯤 허물어졌다.
“설마……!”
콰아앙!
곧장이었다.
약해져 있던 쪽에 또다시 충격이 가해지면서 사람 둘 셋은 그냥 통과할 법한 구멍이 벽에 뚫려버렸다.
휘이이이잉!
“아, 샹!”
바로 고천수의 몸이 빨려 나갈 듯이 떠올랐다. 고천수는 의자를 붙잡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어……?”
예상보다 강한 풍압에 고천수가 화들짝 놀랄 때였다.
왈……!
익숙한 소리와 함께 뭔가가 구멍 밖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뭐…….”
고천수는 순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의자와 의자 사이에 있던 검은색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
-뭐냐?
-야! 아니, 흑구갘ㅋㅋㅋㅋㅋ
흑구가 없었다.
고천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들, 흑구 어디 갔어요?”
-ㅋㅋㅋㅋㅋ
-이거 실화임?
“흑구 어디 갔냐고요!”
너무 쉽게 빨려 나갔다. 고천수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나간 거야?’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개라고 해도 그런 미친 짓을 할 리는 없었다.
‘뭐야, 대체!’
그래도 너무 쉽게 빨려 나갔다.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야, 고천수!
-뭐해!
시청자들의 외침에 고천수는 떠듬거리다가 겨우 숨을 다시 골랐다.
그래봤자 개였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지금은 자신부터 챙겨야 했다.
다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런 고공에서 낙하해 본 적은 없던 것이다.
“형!”
어느새 내려온 산소마스크를 낀 꼬마가 고천수를 보며 안전벨트를 매 주려고 했다.
“형, 껴요!”
하지만 고천수는 이미 몸이 앉아 있던 곳을 이탈해 있는 상태였다.
그는 몸이 더욱 떠올라 있었다.
그 상태로 산소마스크만 붙잡아 끼고 있던 그는, 의자를 붙잡고 있는 손만 놓으면 그대로 빨려나갈 수 있었다.
“형, 빨리요!”
쾅! 콰앙!
비행기를 들이받는 뭔가의 수가 많아졌다.
사실 뭔가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구멍 뚫린 벽 사이로 수 마리의 메이플라이가 보였던 것이다.
-야, 뱅기 추락할 거라니까!
-버티고 있어 봤자 다른 데도 뚫려!
-근데 뭐, 추락한다고 죽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
엔진을 잃었는지 비행기의 고도가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었다.
『여러분 다들 비행기 추락을 대비해주십시오! 착륙할 곳이 없어 저수지에 불시착 시도를…….』
뒤늦게야 경고가 있었다.
내려야 했다.
고천수는 주변을 살폈다.
이쪽은 꼬리 칸이었다.
몸을 날린다고 해도 동체와 부딪힐 확률은 적었다.
“야! 잘 들어!”
고천수는 꼬마를 향해 소리쳤다.
“비행기 떨어진 뒤에 살아도 잘못하면 질식해서 죽어!”
추락 이후에는 화재 연기에 질식되어서 죽는 게 대부분이었다.
“물 없으면 침이라도 소매에 묻혀서 몸 낮게 하고 움직여! 알았지?”
그것도 살아남아야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나마 꼬마가 비상구 근처에 있어서 생존 확률이 약간이라도 더 높다는 게 다행이었다.
“꼭 기억해 둬!”
고천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꼬마의 생존을 희망해 주는 일뿐이었다.
덜컹.
비행기가 더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고천수는 잠시 동향을 살폈다.
급격한 고도 저하에 기압차로 인해 지금 산소마스크를 빼면 기절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비행기 시스템으로 기압차가 완화되고 저공 비행 안정화라도 되어야…….
위이잉.
비행기가 떨어지는 속도가 완만해졌다. 기장이 어떻게든 비행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풍압이 다소 약해진 것을 느낀 고천수는 이제 바닥에 내려서서 좌석을 붙잡고 이동을 시작했다. 바로 밖으로 뛰어내려도 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확실하게 살려면…….’
확실하게 살 수 있는 확률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이것도 100%는 아니지만, 추락이 정해진 비행기에 탄 이상 뭐든 할 수밖에 없었다.
휘이이이잉!
구멍이 뚫린 벽으로 다가가자 위협적인 바람 소리가 귀에 쑤셔 박혔다.
“큭……!”
고천수는 구멍 밖 너머를 바라봤다.
많은 수의 메이플라이들이 보였다. 그 중 몇은 이미 비행기에 몸을 박고 떨어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고천수는 뱅글뱅글 돌면서 떨어지고 있는 메이플라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팽이처럼 돌고 있는 메이플라이들은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지!’
게임은 플레이어 위주로 설계되었기 마련이었다. 어느 시점,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돌파구는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후.”
고천수는 밖으로 몸을 날리기 전, 잠시 멈칫했다.
“…….”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역시 무리할 수는 없었다. 잘못하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었다.
“야! 꼭 살아남아라!”
고천수는 결국 꼬마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밖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