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갈림길 (3)
“사람……!”
반가울 법도 했지만 양민철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뒤로 물러났다.
슥.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양민철과 눈을 맞췄다.
양민철을 발견했으니 잠시라도 망설일 법하건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바로 옆으로 빠져 버렸다.
“대체…….”
양민철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장서연과 김하령이 다가왔다.
“야, 뭐 해.”
“시체놀이?”
“아, 저기…….”
양민철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향하며 장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가 왜?”
“조금 전에 사람이 있었어요.”
“사람?”
장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군인이야?”
“아니에요. 군인은 아니었어요. 그냥 일반인 같았는데…….”
“흠.”
장서연은 잠깐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냥 뭐라도 주우러 온 사람인가 보지. 총 든 군인만 아니면 내가 제압할 수 있기도 하고.”
“든든하네요, 누나.”
양민철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 알았어.”
그때였다.
시야 밖으로 사라졌던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저기!”
양민철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뻗자 멀리서 남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남자는 손에 든 책 한 권을 고쳐 잡으며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이야?”
장서연의 물음에 양민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사람이에요.”
“네 말대로 일반인인 것 같기는 하네.”
“근데 책은 원래 가지고 있던 게 아닌데 말이죠.”
남자가 나타났을 땐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양민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고작 책 한 권 가지러 온 건가?’
그 정도로 느긋한 행동을 보일 수 있다면, 원래부터 여기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양민철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따라가야 돼요!”
“뭐? 야!”
장서연이 놀라는 소리를 뒤로 하고 양민철은 아예 뛰기 시작했다.
‘형을 봤을지도 몰라!’
남자가 들어갔다 나왔을 대형 서점의 입구를 지나쳐, 양민철은 멈춰 서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갔다.
***
‘여기도 터미널 건물인 건가?’
양민철이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니 작은 대합실이 있었다.
‘이건…….’
양민철은 바닥에 찍혀 있는 바퀴자국을 확인했다.
왜 이곳에 바퀴자국이 있는 건지 의문을 가지며 시선을 옮기자니, 문 없이 뚫려 있는 통로 너머로 차량들 수십 대가 여기저기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승강장?”
양민철은 그곳으로 가보았다. 정말 터미널의 건물이 맞는지 버스들도 잔뜩 보였다.
“……뭐지?”
순간 들리는 목소리에 양민철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무슨 괴물 보듯이 놀라는군.”
아까 전의 그 남자였다.
살짝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손에 든 책을 탁 하고 덮으며 양민철에게 다가왔다.
“뭐라도 찾고 있는 건가? 덕분에 이제 시작한 독서가 흥이 깨져 버렸어.”
“저, 직원이십니까?”
“뭐?”
남자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헛웃음을 뱉었다.
“이런 상황에 직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뭐, 그랬다고는 해 두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양민철은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혹시 고천수라는 사람을 보신 적 있습니까?”
“응?”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천수?”
“예, 저보다 몇 살 정도 많은 형인데 혹시 여기에…….”
“왔었지.”
순간 양민철이 몸을 흠칫했다. 그사이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얘기를 전해 달라고 했었어.”
“형이 여기에…….”
“그래. 설마 진짜로 찾는 사람이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응? 뭐, 뭐야.”
남자는 양민철에게 몸을 붙잡혔다.
양민철은 남자를 흔들면서 말했다.
“형, 어디로 갔나요! 어디로 간다고 했어요!”
“자, 잠깐, 일단 진정하고…….”
그때였다.
“야!”
뒤이어 나타난 장서연이 바로 뛰어와 남자의 뒷목을 붙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컥!”
“너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남자의 목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며 머리채를 휘어잡은 장서연이 양민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양민철!”
“네, 네?”
“괜찮아?”
무섭게 일그러진 장서연의 얼굴을 보며 양민철이 주춤하는 순간, 김하령까지 다가와 작은 과도를 남자에게 향했다.
“폭력적인 환자는 치료 대신 벌이겠죠? 이건 어쩔 수 없겠어요.”
“아니, 잠깐! 잠깐만요!”
살벌하게 구는 일행을 향해 양민철이 급하게 소리쳤다.
“오해예요! 이 분은 저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뭐? 하지만 이 남자가 너를……!”
“아니에요! 제가 붙잡은 거예요!”
장서연은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진짜야?”
“누나! 무릎부터 치워줘야죠!”
양민철의 외침에 장서연이 무릎을 치우자 남자가 콜록거리며 옆으로 몸을 뒤집었다.
“켁! 쿨럭! 이게 무슨…… 콜록!”
“괜찮으세요?”
“쿨럭! 아, 아직.”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양민철이 장서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누나, 큰일 날 뻔했잖아요!”
“아니, 뭐. 뒤에서 보기에는 네가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장서연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양민철은 한 마디 더 하려고 하다가 숨을 삼켰다.
장서연이 일행을 걱정해서 달려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아저씨?”
일단 계속 기침을 해대는 남자를 부르자니, 곧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괜찮, 괜찮아.”
남자는 목 언저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피가 몰려 붉어진 얼굴로 장서연을 쳐다보았다.
“숨 막혀서 그냥 죽는 줄 알았네. 콜록!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제 동료예요. 갑자기 이런 일 겪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 아니야.”
기침이 잦아든 남자가 상체를 일으키며 손을 내저었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하지. 세상이 워낙 험하니까…….”
숨을 고르는 남자를 잠시 지켜보던 양민철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급할 수도 있긴 한데, 그 고천수라는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갔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천수 님?”
김하령이 반색하며 말했다.
“천수 님이 여기에 지나가셨대?”
“네, 이분하고 만났었나 봐요.”
김하령에게 대꾸한 양민철은 다시 남자에게 물었다.
“형은 어디로 갔나요? 아저씨한테 무슨 말을 남긴 거죠?”
“별건 없었어.”
남자가 한숨을 내쉬듯 입을 열었다.
“먼저 제주도로 간다고 했지.”
그러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걸로 끝. 다른 말은 더 없었어.”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양민철은 남자가 한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제주도. 제주도로…….”
여태 고천수는 본인 스스로 계획을 수립하고 일행들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였다.
설명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목적지도 마찬가지였다.
‘제주도로 간다고 확실히 말한 적이 있던가?’
되짚어 봤지만 그랬던 적은 없는 듯했다.
“고천수가 먼저 제주도로 떴다고?”
장서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과 대조적으로, 김하령은 밝은 얼굴이 되었다.
“천수 님이 거기서 기다린다고요?”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김하령은 폴짝 뛰어보였다.
“얼른 가요! 천수 님이 기다리고 계신다잖아요!”
“잠깐만.”
장서연은 손을 내저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그러면서 장서연은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 그게 끝이에요? 어떻게 거기로 가겠다는 말은 안 남겼나요?”
“어떻게?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아.”
장서연은 탄식을 뱉었다.
“그냥 제주도라고 하면 어떻게 하라고! 본인이 간 길도 알려 줘야지!”
“아, 누나!”
양민철이 반색하며 외쳤다.
“그거라면 알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양민철은 남자에게 다시 질문했다.
“형이 여기 왔다가 간 건 확실하죠?”
“응? 그렇지. 확실히 왔다갔어. 너희가 얘기하는 고천수가 맞다면.”
“그럼 형은 군인들을 따라갔나요?”
이곳에 군인들이 있던 건 확실했다.
그 군인들이 지금 사라지고 없다면, 고천수도 그들이 떠날 때 동시에 이곳에서 나갔을 확률이 컸다.
“뭐…… 그랬을 거야. 군인들이 나갈 때 차를 몰고 갔으니까.”
“그렇군요. 그럼 군인들이 간 곳은 혹시 어딘지 아시나요?”
“청주 공항.”
남자는 간단히 답하며 턱을 쓸어내렸다.
“내가 주워듣기로는 분명히 거기였어. 청주 국제공항.”
“공항……!”
양민철이 눈썹을 치켜떴다.
“거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 여기서 차로 1시간 내외일 텐데, 곳곳에 괴물들도 많고 잔해들도 많아서 확실하진 않네. 거기다가…….”
남자는 주위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타고 갈 차도 없으니까 더 그렇겠지.”
“아…….”
탄식하는 양민철을 보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뭐, 어차피 거기로 가기는 늦었을 거야.”
“네? 그게 무슨…….”
“군인들 엄청 급하게 떠났거든.”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대충 보니까 빨리 비행기에 타야 하는 것 같았어. 준비가 끝나자마자 간 걸 보면, 벌써 비행기 타고 날랐을걸?”
“그, 그럼.”
“살고 싶으면 다른 데로 가야지.”
그 말에 양민철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데…….’
고개를 돌리자 장서연과 김하령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일이 쉽게 안 풀릴 줄은 알았지.”
“빨리 그쪽으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생각해야 돼요.”
곧이어 나온 둘의 반응을 보며 양민철은 시름에 잠겼다.
‘다른 길. 다른 길이 있나?’
생각하던 와중에 양민철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아직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
턱!
어깨를 붙잡자 남자가 놀란 눈으로 양민철을 바라보았다.
양민철은 그를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대전역은요?”
***
“김천……. 그 다음은 영천.”
포항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고천수는 한 군인에게서 얻은 지도를 펼쳐보고 있었다.
‘불시착하게 된다면 좀 애매하겠네.’
포항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도시들, 거기에서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는 장소들 중에 떨어진다면 조금 암담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더라도 딱히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빠져나가는 것부터 걱정해야 될 테니까.
“후우.”
자연스레 한숨이 튀어나왔다.
-한숨 쉬지 마셈.
-맞아. 괜히 들어오던 복도 나가버린다구.
-천수는 웃는 모습이 젤 귀엽.
“아, 형님들.”
고천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놀리실 겁니까.”
-ㅋㅋㅋㅋ 역시 이 표정.
-짜릿해.
[띠링! 경멸의맛 님이 1젠을 후원하셨습니다. - 처음 후원해봄.]
“좀 활약할 때에도 후원을 해 주세요.”
이로써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은 43젠.
고천수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짐칸들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기, 짐칸을 그렇게 다 여시면…….”
“찾는 게 있어서요. 그것만 찾고 끝낼게요.”
승무원이 다가와 하는 말에 고천수는 딱딱한 말투로 답했다.
마른침을 삼키는 승무원을 보며 고천수는 첨언했다.
“하나 열고 하나 닫는 식으로 할게요. 오케이?”
“아…… 음. 네.”
승무원은 더 이상 고천수에게 따지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군인들도 헛웃음만 흘릴 뿐 딱히 고천수를 말리지는 않았다.
이상한 놈이 더 이상한 짓만 하지 않으면 그냥 놔두겠다는 것으로 보였다.
-뭐 하는 거야?
-넣어놨던 짐 있음?
-뭐 하나 훔쳐서 뛰어내리려나 봐.
웃기지만 비슷했다.
고천수는 승객들이 거의 없는 뒤편까지 가서야 필요한 것을 찾아냈다.
“있다……!”
정확히는 필요한 것이 있는 장소를 안내해 주는 존재를.
-어?
-ㅋㅋㅋ 하긴 젠도 있는데 안 나올 리가 없지.
-엄청 뒤에 처박혀 있었네.
온리베어였다.
혹시 짐칸에 보급함과 같이 쑤셔 박혀 있나 했던 곰 인형이 바로 뒤쪽 객실 커튼 뒤에 서 있던 것이다.
“어디야! 가자!”
고천수를 본 온리베어는 뒤뚱거리며 뒤쪽으로 좀 더 이동했다.
그리고 의자를 기어올라 짐칸 하나를 터치하고는 바닥에 풀썩 떨어졌다.
“이왕이면 도움이 좀 될 만한 걸로…….”
애초에 비행기 짐칸에 있던 보급함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요한 아이템이 잠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보급함이 있을 가능성을 뒤늦게야 떠올린 고천수는 이제라도 알아챈 것에 감사하며 보급함을 살펴보았다.
‘방패 모양……!’
10젠짜리 보급함.
남은 일은,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