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갈림길 (2)
-응? 왜?
-기억하는디.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고천수의 의중을 깨달았다.
-아, 잊지 말고 걸어 달라고?
-ㅋㅋㅋㅋ 유비무환 쩌네.
추락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이 비행기가 멀쩡하게 날아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플라이 때문에 비행기가 방향을 바꿨다.
그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쉽게 방향을 잡을 수 없을 정도라는 거다.’
하늘을 날고 있는 만큼 충분히 길을 우회해서 남쪽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예 그 길을 포기할 정도면, 메이플라이를 비롯한 날벌레들이 남쪽의 제공권을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위도 마찬가지야.’
당장 남쪽으로 갈 수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쪽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 그냥 근처의 어딘가로 가고 있는 듯했다.
승무원에게도 미리 알려 놓지 않은 걸 보면 단편적인 정보로 경로를 즉흥적으로 선택한 게 분명했다.
날벌레들의 하이브가 어디에 더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와중에, 객기에 어울려 줄 수는 없었다.
-[울부짖는정신병자] : 미션 걸어. 못 참겠으니까.
-ㅋㅋㅋㅋㅋ 갑자기?
-안 걸면 어쩔 건데.
쾅!
벼락같은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안 걸면 어쩔 건데.’라는 댓글이 지워졌다.
“뭐예요. 강퇴한 거예요?”
-ㅋㅋㅋㅋ 아, 미친놈.
-진짜 돌았냨ㅋㅋㅋㅋ
“강퇴한 거냐고요.”
고천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한도초과가 대신 대답해 줬다.
-[한도초과] : 아냐, 블라인드 처리만 한 거야.
“블라인드……?”
멍하게 중얼거리던 고천수가 순간 탄식하며 물었다.
“그럼 그때 그 시청자는…….”
-[한도초과] : 아직 이 방에 있는 거야.
강제 퇴장시킨 게 아니었다. 고천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니, 매니저님!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안 내보냈어요!”
-다급. ㅋㅋㅋㅋ
-ㅋㅋㅋㅋ 그러게. 생각해 보니까 안 내보냈네.
-뭐임. 지금 그놈이 우리를 소. 리. 없. 이. 지켜보고 있는 거임?
쿠아아아아아앙!
거의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음과 같은 알림이 떠올랐다.
[매니저가 ‘지옥수’ 님을 대화방에서 내보냈습니다.]
-[울부짖는정신병자] : 이젠 안 지켜봄.
-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ㅋ
늦었지만 올바른 조치였다. 고천수는 식은땀을 쓸어내렸다.
“매니저님, 앞으로는 좀 더 적절한 조치를 부탁드려요.”
분위기를 보니 일부러 악독 시청자를 남겨 둔 건 아닌 듯했다.
“참, 방금 전에 블라인드 건 분은 풀어 주시고요.”
-[울부짖는정신병자] : 알겠음. 다들 빨리 미션 참여하셈.
하지만 매니저는 시청자들이 미션을 걸게 압박하는 것을 먼저 선행했다.
-아휴, 거참. ㅋㅋ
-무섭네.
-집요해, 아주.
[띠링! 그냥받아들여, 편돌이, 니얼굴, 새로운주인, 울부짖는정신병자 님이 연합 보상 미션을 설정하였습니다.]
[연합 미션 - 추락 상황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연합 보상 - 15젠.]
미션이 설정됐다.
고천수는 그걸 보며 눈썹을 살짝 움찔했다.
‘15젠……!’
추락 상황에서 살아남는 미션치고는 젠이 좀 적었다.
“형님들, 좀 더 걸어 주세요.”
-날강도냐.
-매니저나 너나 아주 ㅋㅋㅋㅋ
하지만 시청자의 반응을 보니 이해가 됐다.
‘예상하고 이렇게 한 건가?’
대놓고 참여를 유도하는데 너무 많은 젠을 걸게 하면 반발이 있을 수 있었다.
의외로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매니저일 수도 있었다.
‘설마 간극도 보려고 한 건가?’
블라인드와 강제 퇴장은 해당 방송을 진행하는 스트리머의 성향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울부짖는정신병자는 일련의 과정으로 고천수를 한 번 떠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냥 물어보지.’
닉값을 지키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크게 상관은 없는 문제였다.
일단 미션에 걸린 젠은 15젠.
완료에 성공하면 현재 가지고 있는 젠과 합쳐 재산은 총 57젠으로 불어나게 돼 있었다.
그야말로 역대급.
왈!
옆에서 흑구가 한 번 짖으며 고천수에게 몸을 기댔다.
“왜 그래. 불안하기라도 한 거냐?”
흑구는 눈을 대록 굴리고 있었다. 그걸 보자니 고천수도 살짝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진짜 떨어지길 바라진 않는데 말이지.’
비행기가 떨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고천수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딱히 마땅치 않았다.
“상점창.”
괜한 마음에 한 번 더 열어 보았지만 갱신은 되어 있지 않았다.
‘뭐, 괜찮아.’
어차피 상점창은 언젠가 갱신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타났던 아이템으로 봤을 때, 특정한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주로 나오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게 없었다.
살짝 숨을 내쉬며 상점창을 닫은 고천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
순간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초록색 선이 보였던 것이다.
[분기점을 통과하였습니다.]
호재였다. 고천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정보창.”
[상시 정보 :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정보 1 : 지금 당신이 탑승하고 있는 비행기의 목적지는 포항 공항입니다.]
[정보 2 : 남쪽으로 향하는 비행기들의 항로는 현재 일부 몬스터에 의해 끊어져 있습니다.]
“뭐야, 이거.”
예상치도 못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ㅋㅋㅋㅋㅋ 목적지 이미 정해져 있었네.
-천수 속았죠.
-당장 승무원에게 벌을 주어야 합니다, 즈은하!
고천수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통로의 끝, 이제는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곳에 그 승무원이 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하아.”
다른 사람에게 말할까 봐 에둘러서 말했던 것일까.
기장이 정말로 어느 곳을 목적지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이제 결정을 내린 것을 수도 있기에, 속였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포항 공항…… 이라.’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비행기가 조금씩 방향을 트는 게 느껴졌다.
뒤늦은 선회였지만, 어찌됐든 비행기는 이제 북쪽으로 올라가지는 않는 듯했다.
“형님들, 포항 공항이면 옆에 항구 있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바다랑 워낙 가까우니까.
-포항공항을 거꾸로 하면 항공항포.
“쓸데없는 소리는 마시고요.”
-ㅋㅋㅋㅋ 표정 풀어 줄라고 한 거잖아!
고천수는 턱에 손을 얹으며 생각에 잠겼다.
‘항구가 옆에 있는 공항이면…….’
십중팔구 바닷길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뭔가 골치깨나 썩을 것 같네요.”
제주도까지 가는 길이 그리 원만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덜컹!
비행기가 크게 한 번 더 흔들렸다.
충돌이었다.
메이플라이가 또 날아와 부딪힌 것일까.
의외로 크게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고천수는 이맛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잘 갈 수 있을지.’
포항공항이면 대전에서는 그나마 남쪽으로 많이 내려가지는 않아도 되는 방향이었다.
남쪽 비행기 항로가 막혀 있어도 일단 갈 수는 있을지도 몰랐다.
‘망할.’
대전을 포함해서 여태까지 지나 왔던 곳은 전부 대한민국 중심을 기준으로 서쪽이었다.
위도에 별 차이가 없을 군산 공항으로 향하지 않는 걸 보면, 반도의 서쪽엔 이미 몬스터가 더 많이 퍼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괜찮으려나…….’
물론 포항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어느 방향이 옳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
고심만 깊어지던 그때, 고천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형님들, 찾을 게 있습니다.”
***
대전.
흙먼지로 지저분한 길을 걷던 양민철 일행은 어느 붉은색 버스 앞에서 멈춰 섰다.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양민철은 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버스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털 뭉치가 발견됐다. 아니, 아예 죽어서 널브러져 있는 늑대 괴물들이 발견됐다. 버스 안을 살핀 양민철은 거기에도 사체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일까요?”
사체들에는 총알의 흔적이 없었다. 있는 거라곤 무언가 날이 있는 것으로 찍은 흔적뿐이었다.
“확실해.”
김하령이 사체들에 남아 있는 흔적을 살피더니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천수 님이 죽여 버린 거야. 천수 님이 아니면 불가능해.”
“꼭 천수여야만 가능한 건 아니잖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장서연이, 하지만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천수가 잡은 건 맞는 것 같아. 버스 타고 갔다고도 했으니까.”
“서둘러요, 우리.”
양민철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가면 형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몰라요.”
“글쎄.”
장서연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벌써 시간 많이 버렸잖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길을 좀 헤맸다.
털들이 다른 곳에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들 중 일부가 이 버스를 쫓던 중 이탈했던 듯한데, 그 흔적이 길을 헷갈리게 만들었던 터다.
“빨리 가야 돼요. 천수 님이 기다려요.”
김하령이 장서연의 옆으로 다가오며 눈을 부릅뜨고 팔을 붙잡았다. 장서연은 질색하면서 그녀의 팔을 걷어냈다.
“넌 아까는 시무룩하더니 지금도 또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천수 님이 흔적을 남긴 게 분명하니까요.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거예요.”
“어휴.”
장서연은 양민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갔더니 고천수가 이미 거기서도 떠났으면?”
“그건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해요.”
양민철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떠났어도 뭔가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한테 무조건 도움이 될 거예요.”
“……음.”
“어서요.”
양민철이 앞서나가며 손짓했다.
장서연은 한숨을 쉬면서도, 김하령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
대전복합터미널.
일행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면서 다른 괴물들을 맞닥뜨리지 않은 게 큰 도움이 됐다.
“여기에도…….”
늑대 괴물의 사체가 있었다.
양민철은 다가가 사체들을 살폈다.
이번에는 사체에 총알이 박힌 흔적들이 있었다.
“군인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주변이 조용하기만 했다.
터미널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저쪽으로 가 보죠.”
양민철은 일행과 함께 터미널 서관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가자 쓰레기 같은 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기 다들 몰려 있었나 본데?”
장서연이 바닥에 있던, 음료수가 조금 들어있는 병을 차며 말했다. 양민철은 달려가 대합실로 향했다.
“……여기도.”
아무도 없었다. 바로 승강장으로 나간 양민철의 눈에, 주차되어 있는 몇 대의 버스가 보였다.
“뭐라도 있어?”
뒤따라온 장서연의 물음에 양민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없네요. 이미 떠났나 봐요.”
“그러냐.”
장서연은 한숨을 지으며 남아 있는 버스를 가리켰다.
“저것들 키는 없으려나? 찾으면 내가 운전할 수 있을 텐데.”
“그러게요. 저기 가면 있지 않을까요?”
양민철은 근처에 보이는 사무실로 뛰어갔다.
들어가서 키가 있을 만한 곳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후.”
군인들이 다른 데다가 빼돌린 것인지 원래 없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여기서 빠져나갈 수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네. 뭐라도 챙기자. 오면서 보니까 쇼핑몰처럼 되어 있더만.”
사무실로 온 장서연이 양민철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살짝 입술을 깨문 양민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좋은 가방들 많아.”
근처 상점에서 미리부터 쇼핑을 즐기고 있던 김하령이 가방 하나를 들고 말했다.
양민철은 장서연과 함께 각각 가방을 하나씩 골라잡았다.
“각자 생필품 찾아서 챙기도록 해요. 빠르게.”
“뭐 담아 넣을지 서로 정하는 게 좋지 않아?”
“안 돼요.”
의문을 표하는 장서연을 보며 양민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어떻게 서로 떨어질지 모르잖아요. 각자 생존할 수 있는 건 알아서 챙겨 놔야 해요.”
“……그렇네.”
장서연은 걸음을 움직이면서 답했다.
“그럼 빠르게 챙기고 모이자고.”
그렇게 셋은 터미널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과자, 생수, 식칼 등 주변 식당과 상점들에 남아 있는 것들을 선별해 일단 필요한 건 다 챙겨 넣었다.
“……응?”
그러던 중 2층 통로를 지나던 양민철의 시선을 붙잡은 것이 있었다.
“뭐지?”
아니, 것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구름다리로 연결된 동관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