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갈림길 (1)
‘이런……!’
불안감이 현실이 됐다. 아직 경고등이 꺼지지 않았지만 고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자리에 앉으세요!”
통로 근처 좌석에 앉아 있던 군인이 고천수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고천수는 군인의 팔을 붙잡아 끌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요.”
“예? 뭘…….”
“이 비행기, 목적지가 어딥니까.”
그 물음에 군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목적지라니…….”
“대답 안 하실 거면 가겠습니다.”
고천수는 군인의 손을 치워내고 통로를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커튼을 치자 여자 한 명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승무원이었다.
“이 비행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대뜸 질문부터 던지는 고천수를 보며 승무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는지 말씀이신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고천수는 비행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걸 확인했다.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디로 가냐고요!”
“지, 진정하세요.”
승무원은 고천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일단은 앉아 계세요. 위험합니다.”
“그것만 알려 주면 앉아 있을 테니 알려 주세요.”
어려운 답을 원하는 것도 아닐 터였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면.
“목적지는 제주도입니다. 탑승하실 때 얘기 못 들으셨…….”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고천수는 빠르게 걸어가 조종실 출입문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기장님! 기장님……!”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근처에 있던 군인 몇이 안전벨트를 풀고 달려와 고천수를 붙잡았다.
“그만두세요!”
“대체 뭘 하는 겁니까!”
“자리로 돌아가세요!”
고천수는 그대로 붙잡혀 뒤로 끌려 나가면서 소리쳤다.
“자리로 돌아가긴 무슨! 이 비행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
-ㅋㅋㅋㅋ 진상 아니냐 이거.
-근데 천수 화날 만하긴 함.
-뱅기 다른 데로 가고 있으니까…….
고천수가 군인들을 밀쳐내며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 비행기가 어디로 가고 있냐는데…….”
“제주도로 가는 거 아냐?”
사람들은 각자 창문 밖을 내다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놓으세요!”
고천수는 군인들에게 붙잡힌 팔을 떼어내며 소리쳤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제주도로 간다니까요!”
“대체 왜 이러십니까!”
만류하는 군인들을 보며 고천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왜 이러긴……! 이 비행기, 확실히 제주도로 가는 거 맞냐고요!”
조종석에 엉뚱한 놈이 타 있으면 곤란했다. 고천수는 이 비행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잘못하면 죽는다고!’
이 비행기째로 다른 데에 꼬라박으면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소란을 피워서 곤란해지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 판단이 안 서는 것부터가 가장 큰 문제였다.
정보가 없으면 고천수도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기장님한테 물어보세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방향을 잡은 뒤 비행기가 선회하는 걸 고천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조금씩 머리를 돌리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고천수가 확인한 방향이 북쪽이었다.
완전히 반대 방향인데, 돌고 있다면 이 정도로 아무 느낌도 없을 수가 있을까.
감각까지 강화되어 있는 자신이 모를 만큼?
남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거라면 적어도 행선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었다.
“기장님한테 물어보라니 뭘…….”
덜컹.
비행기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순간 군인들이 고천수에게 묻다 말고 비틀거렸다.
“뭐, 뭐지?”
“난기류인가.”
“난기류?”
덜컹덜컹덜컹.
비행기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균형을 잃다 못해 여기저기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큭?”
“뭐, 뭐야.”
“으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고천수는 옆에 있는 의자를 붙잡고 버티고 서 있었다.
“대체 뭐가……!”
그러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고천수의 눈에 뭔가 얼핏 보였다.
-[한도초과] : 천수야, 꽉 잡아!
쿠웅!
뭔가가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크게 요동쳤다.
“꺄악!”
“으아아아!”
주변이 비명으로 가득 차는 가운데, 고천수는 입술을 깨물고 소리쳤다.
“형님들, 뭐예요! 뭔가 알고 있죠? 저 봤다고요!”
-봤냐?
-뭐였는데?
-하늘에 뭐가 있겠냐.
『여러분, 기장입니다!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따라붙고 있으니 모두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안전하게…….』
쿠웅.
또다시 비행기가 흔들렸다. 기장이 뭐라고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기장이 아니었다.
고천수는 창문 밖을 다시 살폈다.
날벌레.
얇은 날개와 몸체를 가진 몬스터가 비행기에 몸을 충돌하고 있었다.
-메이플라이네. 또 온다!
쾅!
몸을 부딪친 날벌레, 메이플라이는 다시 날아오르지 못하고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며 그대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고천수는 숨을 삼켰다.
“망할.”
하늘에도 몬스터가 있는 세계라니, 난이도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저 비행기 못 타게 말리기라도 하시지……!”
-우리 탓하는 거냨ㅋㅋㅋ
-네가 어디로 가든 위험한 건 똑같아.
-충격 받을까 봐 말도 아꼈구먼.
충격은 이미 받았다.
흔들리는 비행기에서 버티고 선 상태로 고천수는 한숨처럼 토해냈다.
“다 말은 못 해도 언질은 주시라고요……!”
그 정도의 애정이 있는 건 한도초과뿐일 거라고 보기는 하지만, 불만을 안 터뜨릴 수는 없었다.
-[한도초과] : 잘 헤쳐 나가면 다들 젠을 많이 줄 거야……!
괜한 기대였다.
큰 고난을 이겨내면 다른 시청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고 본 걸까.
고천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형님, 왜 이렇게 짠한 소리를 하세요.”
그래도 맞는 말이긴 했다.
시청자들은 공짜로 젠을 주지는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더 짠하네, 망할.’
수치상으로만 보면 한도초과가 줄 수 있는 젠이 더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젠이 시청자들의 생활에서도 사용하는 재화라면 얘기가 달랐다.
줄 수 있는 젠은 거의 다 소진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한도초과 입장에서는 고천수를 돕기 위해 더 극한 상황으로 빠지게 둘 수밖에 없었다.
고천수의 역량을 믿고.
“믿으시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ㅋㅋㅋㅋㅋ 여윽시 천수!
-우리도 믿는다!
-[울부짖는정신병자] : 살아남는 것 자체가 미션일 때가 있지.
매니저가 나서서 분위기를 이어받았다.
-[울부짖는정신병자] :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살아남기, 어떰.
그 얘기를 듣고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추락……?’
매니저가 미션을 유도하면서 필요한 정보를 말해 버렸다.
‘추락한다고?’
다들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막 말해도 되나 싶지만,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내뱉는 점 때문에 한도초과가 울부짖는정신병자를 매니저로 추대한 거라면 땡큐였다.
고천수는 바로 군인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낙하산! 비행기에 낙하산 있습니까?”
이 비행기는 여객기였다.
연비나 무게 문제 때문에 낙하산이 있을 가능성이 적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있으면 확보해야 했다.
“낙하산? 그런 게 있을 리가…….”
말을 흐리는 군인을 놓아 버리고 고천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망했다!”
-ㅋㅋㅋㅋㅋㅋ
-진정하셈.
-아직 뭔 일 난 것도 아니잖앜ㅋㅋㅋ
뭔 일이라면 이미 난 거나 다름없긴 했지만, 고천수는 잠시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은…… 괜찮은 건가?’
비행기가 충돌로 흔들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고천수는 다시 창문 밖을 살폈다.
메이플라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한 번 부딪히면 그대로 죽어 버리는 몬스터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비행기 동체에 큰 손상만 있지 않다면 당장은 괜찮은 것이었다.
“후우.”
고천수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으며 몸을 늘어뜨렸다.
“괜찮은 거였네요, 형님들. 괜히 오바했어요.”
-태세전환 ㅋㅋㅋㅋㅋ
-진짜 이랬다 저랬다 뭐임. ㅋㅋㅋ
-쫄보 아닌 쫄보.
지금까지 당황했던 건 확실한 정보가 없던 탓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생기면 굳이 허둥지둥할 이유가 없었다.
“음료수 서비스 안 오나. 긴장 풀리니까 갑자기 목이 마르네요.”
-돌았냨ㅋㅋ
-이 비행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아, 맞다!”
고천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 비행기는 남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다시 물을게요.”
아까 전의 그 승무원을 찾아간 고천수가 입을 열었다.
“이 비행기,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세요. 급하니까.”
상황이 바뀌어서인지 승무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조종실 출입구 쪽에 붙어 있는 수화기를 들고 조종실 쪽과 대화를 나누더니 고천수에게 말했다.
“저, 그게, 지금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하시네요.”
“곤란이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쪽 하늘에 방금 전의 그 괴물들이 잔뜩 있나 봐요. 먼저 출발한 다른 비행기 쪽에서 추락하기 전 통신이 왔다고…….”
역시 일이 쉽게 돌아가지는 않는 듯했다.
“그럼 어디로 행선지를 잡고 있다고 하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다른 공항으로요.”
“예?”
전혀 예상외의 도착지가 거론됐다.
고천수는 놀라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공항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제주도가 아니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저, 저도 잘은 모르겠네요.”
승무원도 고천수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어쨌든 기장님은 남쪽으로 내려가기에는 하늘길이 막혔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저도 그 이상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고천수가 수화기를 집어 들려고 하자 승무원이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뭐죠?”
“방금 말씀드린 걸로 만족하세요. 이것도 그냥 제가 멋대로 답해 드린 거예요. 기장님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간에 승객들에게는 말하지 않을 셈이에요.”
“네?”
승객들한테 말하지 않을 셈인데, 왜 이쪽에는 얘기를 해 준단 말인가.
“사람들한테 도착지를 숨기고 비행기를 몰겠다는 겁니까?”
“괜한 혼란만 사니까요. 감이 좋은 그쪽한테는 제발 그만해 달라는 뜻으로 이 정도라도 말해 준 것뿐이에요.”
승무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사람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고천수는 한숨을 흘리며 물었다.
“그럼 확실히 안전하게 착륙할 공간은 있는 거죠? 하늘에서 그냥 떠돌게 되는 건 곤란하니까요.”
“그건…….”
“이 정도 확답은 좀 해주세요.”
7.5사단마냥 자기네들식으로 일 처리를 하는 건 질색이었다.
승무원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확답할 수 있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정말이죠?”
고천수는 굳게 닫혀 있는 조종실 출입문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승무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정말이에요.”
승무원은 퀭한 눈빛으로 고천수를 마주보았다. 이제는 그만해달라는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실랑이를 해 봐야 고천수에게 좋을 것은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군인들이 사람들을 안정시키며 소란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군인도 있어서 고천수는 승무원을 더 괴롭힐 수도 없었다.
“음료수나 한 잔 주세요.”
“네?”
“목마르니까 한 잔 달라고요. 전 마실 거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고천수가 물러서려고 한다는 걸 알아챈 듯, 승무원이 반색하며 음료수를 한 잔 떠 왔다.
“이제 자리에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저한테 들으신 건 제발 혼자 아시고요…….”
“걱정 마세요.”
고천수는 이런 정보를 아무데나 떠 버릴 생각은 없었다.
‘괜히 일만 키울 수 있으니까.’
비행기가 곧장 제주도로 가지 않는다는 걸 남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었다. 괜한 소란만 커질 테니까.
“으음.”
다들 겁에 질렸던 와중에 음료수 한 잔을 들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오는 고천수를 보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뭐, 뭐야.”
“역시 이상한 사람이었나 봐.”
-우리 천수 평가 좋네.
-이상한 사람. ㅋㅋㅋ
딱 좋은 평가였다. 이로써 아까 전에 일으켰던 소란은, 그냥 이상한 사람이 저지른 일로 치부되었다.
“형님들.”
고천수는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옆에 있던 흑구를 한 번 돌아보곤 말했다.
“아까 매니저가 말했던 미션 기억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