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이 차는 이제 제 겁니다
그 시각 대전복합터미널 근처의 거리.
버스 기사 박창식과 헤어진 고천수는 군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우회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총 맞은 건 아니겠지?”
고천수는 박창식에게, 군인을 보면 소란을 좀 떨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좀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 안 쐈겠지.
-그보다 방금 총소리는 그냥 쏜 게 아닌 것 같은데?
-ㄹㅇ 뭐 막 걸레짝으로 만들려는 것 같았음.
적어도 십 수 명이 동시에 총을 쏜 소리였다.
‘역시 쫓아왔던 건가?’
그레이 울프들이 뒤를 쫓았던 거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그레이 울프가 박창식을 먼저 따라가 군인들에게 노출되는 바람에 그대로 사살됐다는 거니까.
더 이상 고천수를 위협하는 건 없었다.
‘아니…….’
아직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쪽에도 군인들이 있는 건가?’
대전복합터미널의 건물이 코앞에 있었다. 그만큼 주변에 있는 군인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2개 분대 정도는 있는 듯?
-경계 삼엄하네.
이 정도면 이곳에 모여 있는 군인들의 대략적인 수는 가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중대급.’
그것도 작은 중대는 아닐 것이었다.
“형님들, 저게 서관이죠?”
다만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건물은 대전복합터미널 전체는 아니었다.
구름다리로 연결된 또 다른 건물이 하나 더 존재했던 것이다.
-그치?
-역시 서관만 지키고 있네.
-동관은 버린 듯.
대전복합터미널에 먼저 들른 적이 있던 박창식에 의하면, 군인들은 하차장인 동관은 내버려두고 승차장인 서관만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럼 서둘러 진입하겠습니다.”
얼추 생각하면 동관에는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여기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고천수는 박창식에게 들은 내용이 있었다.
“……일단 사실이었군요.”
조용히 동관의 후문 쪽으로 진입한 고천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차들 좀 보세요.”
동관에는 꽤나 많은 차량들이 늘어서 있었다. 심지어 버스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박창식 씨. 땡큐입니다.”
라디오에서 대전복합터미널로 오라고 해서인지 하차장 쪽으로 들어온 인원도 많은 듯했다. 박창식이 알려 준 내용대로였다.
-조심해.
-그래도 뭐가 있을지 모름.
-뭐 튀어나오면 나 심장마비임.
그건 고천수도 조심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덜커덩.
어디선가 기척이 들렸다. 고천수는 근처에 있던 차 옆에 몸을 숨겼다.
“있나……?”
살짝 밖을 내다보니 한 초췌한 얼굴의 남자가 차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있네.
-키 맨.
남자는 곳곳의 차 문을 당겨 보고 열리는 게 있으면 안을 뒤지고 다녔다.
얼핏 보면 그냥 도둑인가 싶을 수 있지만, 그가 손에 들고 나오는 건 죄다 차키뿐이었다.
“좋아.”
박창식이 알려 준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면 바로 저 남자, 키 맨의 존재였다.
얘기를 나눠 보니 여기 동관에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라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가 주차장 직원처럼 키를 모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렇기에 고천수는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고천수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놀라며 주춤거렸다.
“아, 놀라지 마세요. 지금 막 도착한 사람입니다.”
“…….”
남자는 흑구까지 데려온 고천수를 경계하듯 바라보더니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군인들과 떠날 거라면 저쪽이야. 시간이 별로 안 남았을 테니 거기로 가 봐.”
그러더니 남자는 다시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흠.”
고천수는 살짝 신음을 흘리고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자동차 키, 모으고 계신 겁니까?”
“……보면 모르나?”
남자는 새로 얻은 키를, 자신이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 넣으면서 답했다.
“난 바쁘니까 말 걸지 말고 반대편으로 가 봐. 괜히 여기에 있다가 나처럼 남지 말고.”
“남는다고요?”
고천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는 안 가실 건가요?”
“나는 여기서 기다리기로 한 친구가 있어서.”
박창식이 알려 줬던 레퍼토리와 똑같았다.
“버스 키 맡기고 갔다던 그분인가 보군요.”
“……뭐냐.”
남자는 고천수를 돌아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거지?”
“여기 들렀다던 버스 기사님한테서요. 급행 2번.”
“하. 그 양반 다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다녔군.”
한숨을 흘린 남자는 키 수집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들었지? 내 친구가 키 맡기고 돌아오지 않았단 얘기까지 들었나?”
“네, 뭐.”
“그 양반 버스에라도 탔었나 보군.”
고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양반 살기는 했나?”
“예. 지금쯤이면 버스는 탔겠죠.”
같이 가자고 할 생각도 했으나 고천수는 박창식을 돌봐줄 여력은 없었다.
버스가 없으면 박창식은 그냥 신체 능력 떨어지는 아저씨에 불과했다. 못 믿을 놈들이기는 해도 청주공항까지는 이쪽보다는 군인들의 보호를 받는 게 나았다.
“자네는 왜 안 타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거든요.”
고천수는 그러면서 남자가 가지고 있는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그쪽한테 용건도 있고요.”
“차키가 필요한가 보군.”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열심히 모으고 다녔더니 뺏기게 생겼네.”
“뺏는 게 아니라 빌리고 싶은 겁니다.”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필요하시면 저랑 같이 여기를 떠나시면 되고 말이죠. 상부상조 같은 거죠.”
“나는 됐어.”
손사래를 친 남자는 천천히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를 떠난 사람들이 언제 차를 찾으러 올지 모르잖아. 난 그동안 다른 비렁뱅이들이 함부로 차키를 가지고 떠나지 못하게 여기서 관리할 거야.”
“친구분 기다리면서 말입니까?”
“그치.”
남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돌아올 거야. 그 친구는 이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거든.”
절그럭.
박스에서 거추장스러운 열쇠고리가 달린 스마트 차키를 찾아낸 남자가, 그것을 고천수에게 건네주었다.
“저쪽에 있는 차 키야. 버튼 눌러보면 찾을 수 있을 거다.”
고천수는 키를 받아들고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일은 순조롭게 풀렸다.
차 주인들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키를 모은다는 말과는 다르게 너무 순순히 키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삑삑.
중요한 건 고천수가 차를 가지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뿐.
“응?”
하지만 고천수는 키에 반응한 차를 보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차는 다른 차량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떻게도 빠져나가지 못할 장소에 주차돼 있던 것이다.
-ㅋㅋㅋㅋㅋ 무슨 아케이드냐.
-어디 한번 몰고 가 보라고 준 듯.
-답은 폭파뿐이다!
“……이거.”
확실히 엿 먹으라고 준 게 확실했다.
고천수는 남자에게 돌아가 키를 내밀며 말했다.
“아저씨, 다른 키를 주시면 좋겠는데요.”
“안 돼.”
“예? 뭐라고요?”
“그것밖에 못 줘.”
그 말에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 되도록 좋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실력 발휘를 할 수밖에…….
“그게 출구랑 제일 가까이에 있는 거야.”
그런데 남자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다른 건 키가 없어. 몰고 온 사람들이 가져간 거지.”
놀리려고 이런 키를 준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면 그냥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 따로 탈 거 구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망했네.
-이제 어쩜?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있는 차를 끌고 나가기는 어려웠다.
‘아, 망할.’
남은 방법은 군인들 속으로 잠입하거나 이곳 바깥에 있는 다른 차를 구하러 돌아다니는 것뿐.
하지만 그런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험성도 크고.
‘방법을 생각하자.’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응?”
그러던 고천수는 하차장 화장실 옆에 있는 승객 통로를 바라보았다.
원래 유리문이 있던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냥 뚫려 있었다.
“어라, 저기…….”
고천수는 바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아.”
동관 정문과 이어진 공간이 나타났다.
심지어 정문도 무슨 공사 중이었던 것처럼 문짝들이 떨어져나가 있었다.
고천수는 다시 하차장으로 돌아왔다.
“저기요, 아저씨.”
그리고 서둘러 물었다.
“가장 안쪽에 주차된 차, 그거 키는 있어요?”
“뭐? 왜?”
“저기로 나가게요.”
고천수가 승객 통로를 가리키자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엄청난 사람이었군.”
“그래서, 있습니까?”
고천수가 기대하며 바라보자 남자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경형 승합차가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장난감인가?
-오우, 귀요미잖아!
-전설이 요기 있넹.
아담한 크기로, 통로를 지나가는 데 제격으로 보였다.
“자.”
남자는 키를 하나 건네주었다.
“가지고 가.”
“오케이! 감사합니다!”
고천수는 바로 뛰어가 승합차의 문을 열었다. 경형이니만큼 내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왈!
조수석을 열어 주자 흑구도 위에 올라탔다.
“아, 잠시만.”
고천수는 계기판과 대시보드 쪽을 살피다가 차에서 내려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이것도 챙겨야지.”
아까 전의 그 차였다.
다른 차들에 막혀 나가지는 못하는 차지만, 그래도 내부에 귀중한 물건 하나를 달고 있었다.
“훌륭한 안내 수단이죠.”
내비게이션.
위성 위치 시스템을 사용하는 만큼, 지금도 활용이 가능할 수 있었다.
“좋았어.”
그것을 가져와 승합차에 부착하고 고천수는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후. 준비 완료.”
“……이봐.”
남자는 그렇게 행동하는 고천수가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
“그냥 군인들한테 의존하면 되지, 왜 그렇게 하는 거야? 진짜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
“이유? 뭐, 있다고 해 두죠.”
고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저씨도 너무 사람들 믿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무슨 소리야. 난 너 믿고 키도 줬는데. 그 기사랑 같이 온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긴 하네요. 감사합니다.”
고천수는 그러면서 찌뿌듯한 몸을 풀었다.
“아. 이제 다들 가나.”
어디선가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채비를 하고 이동하려는 듯했다. 고천수는 서관 정문으로 가 조심스레 밖을 확인한 뒤, 다시 돌아와 준비를 서둘렀다.
“아저씨, 친구분. 꼭 찾기를 바랄게요.”
“……그래, 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조심하라고.”
고천수는 남자의 작별을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키를 넣고 돌리자 조그마한 차체에 힘이 깃들었다.
부웅.
“아, 맞다. 아저씨!”
“응?”
“혹시 고천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제주도로 먼저 갔다고 전해 주세요!”
잠깐 창문을 열고 그렇게 외친 고천수가 차의 사이드브레이크를 풀려고 할 때였다.
『상점이 갱신되었습니다.』
순간 알림이 하나 떠올랐다.
“뭐야, 이거. 갱신?”
상점에 새로운 물건이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갱신?!”
-좋아하는 거 봐.ㅋㅋㅋㅋ
-난 이 표정만 보면 밥 한 그릇 뚝딱!
-어린애냐곸ㅋㅋㅋ
뭐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고천수는 얼른 상점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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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 동아줄(1젠) : 제법 단단한 10m 길이의 동아줄이다.
* 분노의 가속 페달 덮개(2젠) : 차를 7분 동안 시속 300Km까지 달릴 수 있게 해 준다. 다만 이 기능이 적용된 차가 계기판의 최고 시속을 돌파한 이후에 속도를 줄일 경우, 그 시점부터 운행 수명이 60분으로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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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거.”
터무니없는 아이템이 하나 생겨나 있었다.
“형님들, 이거 뭐예요.”
-ㅋㅋㅋㅋㅋㅋㅋ
-대혼란.
덮개? 분노의 가속 페달이면 가속 페달이지 덮개는 뭐란 말인가.
게다가 미친 기능에 비해 가격이 좀 쌌다.
아니, 그냥 싼 정도가 아니었다.
“…….”
수상했다.
“겁나게 불안하네요, 뭔가.”
페널티를 감안해도 유용할 것 같기는 한데, 스트리머에게 어떤 재미를 뽑아내려는 의도도 보이는 아이템이었다.
-아이템은 상황에 따라 갱신되지.
-있으면 좋으니까 나온 거 아닐까?
-불안해? 300도 못 달리면 그냥 접자.
왠지 시청자들이 소악마들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형님들, 제가 정말 쫄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하지만 수상해 보여도 아이템은 아이템이었다. 고천수는 고민할 생각도 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장착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