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57화 (57/224)

057. 장대비 (5)

그르륵…….

엔티가 상황을 눈치 챘지만 이미 늦었다. 줄기는 잘렸고, 넘어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야야야야!

-피해!

완전히 잘리기 전, 엔티가 발악처럼 움직인 바람에 줄기가 도끼의 진행 방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위로 기우는 줄기를 보며 고천수는 빠르게 뒤돌아 뛰었다.

쿠아앙!

줄기는 조금 전에 고천수가 있던 곳에 쓰러졌다. 바닥에 미세하게 남아 있던 물방울들이 폭발과도 같은 충격에 밀려 살짝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우우웅.

그 충격은 사다리에까지 향했다. 그곳에서 고천수를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은 모두 굳은 상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천수는 그사이 도끼를 다시 치켜들었다. 아직 모든 게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벌목 끝.

-장작패기 시작.

고천수는 쓰러진 줄기에 도끼를 휘둘렀다. 뿌리들은 줄기가 없으면 지능이 떨어진다. 김하령이 메모장에 적어 두었던 내용에서 확인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라난 줄기가 부숴 버리면 모든 걸 끝내 버릴 수 있었다.

팍! 파작! 콰직!

마치 장대비가 내리듯, 도끼가 몇 번이나 줄기를 찍어 내렸다. 카운트다운은 반복되고, 바닥에는 곧 장작과도 같은 엔티의 잔해만 남았을 뿐이었다.

“헉…… 허억.”

고천수가 바닥에 주저앉는 순간, 알림이 있었다.

[미션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부여합니다.]

[정보는 채팅창의 $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사방에서 꿈틀대며 다가오는 뿌리를 도끼로 쳐내며 고천수는 숨을 골랐다.

“하. 형님들, 다시는 장작패기 안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엔티 완전히 샌드백 되어 버렸네.

-다음에도 기대한다.

안 한다고 하는데도 괜한 기대만 남겨 버렸다. 고천수는 몸을 늘어뜨리며 사다리 쪽을 올려다 보았다.

일행들이 아직도 사다리에 매달린 채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

고천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승자의 세리머니였다.

***

“이거 정말 죽은 거 맞죠……?”

다른 일행들과 함께 사다리에서 내려온 양민철이 뿌리를 툭툭 쳐댔다. 굴러다니는 뿌리를 보며 장서연이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어 다리 같아.”

“훌륭한 실험체가 늘었네요.”

김하령이 끼어들자 장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야? 엄청 고생했고만.”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며 일행은 고천수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형.”

“괜찮은 거야?”

“고천수 님, 엄청났어요.”

각자 한 마디씩 던지는 걸 보며 고천수가 헛웃음을 뱉었다.

“사다리에서 볼 때부터 호응 좀 해 주시지들.”

관객들이 조용해서 혼자 싸우느라 좀 힘겨웠다. 물론 시청자들이 떠들긴 했지만, 채팅이 보이는 거랑 육성이 들리는 건 또 느낌이 다르니까.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형.”

양민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 진짜 장난 아니어서 뭐라고 하기가…….”

“그래, 너 엄청 대단했어.”

활약이 인상 깊었는지 장서연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 괴물, 완전히 보내 버렸잖아. 미친 듯이 패 버리던데. 우리가 암 말 안 했어도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고천수 님, 엄청났어요.”

김하령까지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뭔가 기계처럼 똑같은 말을 한 듯했지만.

“뭐, 그렇게 생각해 줬다면 다들 고맙네.”

고천수는 김하령을 보면서 감사를 표했다.

“특히 하령아, 도움이 많이 됐다.”

“아아, 정말요?”

“그래.”

그러자 김하령이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자신도 한 역할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듯했다.

‘괜히 이 지경이 된 걸 자기 탓하면 곤란하니까.’

여기 들어온 건 김하령의 안내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위기에 처할 줄은 몰랐다는 점에서 그녀가 괜히 죄책감을 가지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랬다간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아, 그리고 하령아. 그냥 천수 님이라고 해. 불편해 보인다.”

-불편해 보이면 다른 호칭을 쓰라고 해. ㅋㅋㅋ

-주인님 쓰라고 하라니깐.

시청자들의 짓궂은 농담을 못 본 척 넘기고 고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다.

“그럼 다들 정리 좀 부탁하겠습니다.”

***

시간이 흘렀다.

지하를 정리한 일행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길지는 않았지만, 지쳐 있는 몸을 회복할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맨홀 뚜껑을 다시 열 수 있는 때가 왔다.

덜컹.

다른 엔티 뿌리를 매달아 맨홀 뚜껑을 열어젖힌 고천수는 도끼를 치켜든 채 조심스레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나?”

엔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을 밝히는 햇볕이 물기가 스며든 지면을 반짝반짝 비추고 있었다.

“읏차.”

먼저 밖으로 나간 고천수가 아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들 밖으로.”

일행이 차례대로 고천수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왔다. 비 내리고 난 뒤의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구름은 아직도 좀 껴 있네.”

장서연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어차피 엘크로커가 죽었으니 갑자기 장대비가 또 쏟아질 일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그냥 구름만 좀 끼어 있을 뿐.

“그럼 이만 이동하죠.”

고천수는 일행을 데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저쪽이에요.”

앞장선 김하령이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길거리 가방 상점이었다. 일행은 바로 그곳에 들어가 가방부터 얻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가방은 물탱크에서 전부 젖어 버렸다. 안에 든 식품들은 괜찮다고 해도, 마르지 않은 가방을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가방은 됐고.”

다들 각기 마음에 드는 가방을 메게 된 것을 보며 고천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음은 옆에 있는 스포츠용품점이었다.

“무기 하나씩 챙깁시다.”

특별한 건 없었지만 나무로 된 야구방망이가 몇 개 있었다. 일행은 자신에게 맞는 길이로 야구방망이를 하나씩 챙겼다.

-고천수 야구단.

실없는 소리였지만 고천수가 무심코 헛웃음을 뱉을 때였다.

“……아, 시발!”

갑자기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천수는 일행에게 손짓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일행은 스포츠용품점의 진열장 뒤에 각기 몸을 숨겼다.

‘뭐야.’

고천수는 진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스포츠용품점의 커다란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좆됐네, 진짜.”

웬 남자 한 명이 유리창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고천수가 바라보고 있자 다른 남자가 나타나더니 비슷한 소리를 지껄였다

“뭐야, 없어졌어? 아 씨, 어디로 간 거냐.”

“그러니까. 리더한테 쳐맞게 생겼네.”

둘은 뭔가를 찾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야, 여기야 여기!”

유리창에 보이지 않는 쪽에서 누군가 또 소리쳤다. 그러자 두 남자는 그 방향을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뭐야?”

같이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장서연이 물음표를 그렸다.

“방금 전에 뭐였어?”

물어봤자 고천수가 답을 해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번에 그 녀석들은 아니었는데.’

맨홀 뚜껑 아내로 들어가기 전에 봤던 남자들과 비슷해 보였다. 잠깐이지만 팔에 문신이 있던 것도 확인했다.

‘같은 그룹인가?’

그렇다면 좀 골치 아팠다. 수가 적지 않다면 어딘가에서 부딪힐 확률이 높았다.

“흠.”

신음을 흘리던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민철아?”

양민철이 놀란 눈으로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고천수가 물었다.

“왜 그러냐?”

하지만 양민철은 반응이 없었다. 김하령이 그런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아.”

그제야 양민철은 흠칫 놀라며 움직임을 보였다.

“민철아.”

고천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래. 놀란 거냐?”

“예? 아, 그게…….”

양민철이 떠듬거리는 모습을 보며 장서연이 말했다.

“뭐야, 겁먹은 거야? 걱정 마. 우리를 발견한 것도 아닌데.”

“으음.”

고천수는 신음하는 양민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양민철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비슷하긴 하지만 다른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단 내가 살펴보고 올게.”

고천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유리로 된 출입문으로 향했다. 바짝 달라붙어서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살짝 열고 좌우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남자들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 쪽으로 사라진 듯했다.

“없어. 지금 가자고.”

일행을 돌아본 고천수가 말했다.

남자들이 뭔가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 거면 또다시 여기 나타날 확률이 있었다. 그러기 전에 이 근처를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이었다.

“으아아아아!”

그렇게 일행과 함께 스포츠용품점을 나서자니, 타이밍 나쁘게도 누군가 웬 비명을 지르며 거리에 나타났다.

“저건 또 뭐야.”

와이셔츠 차림의 한 남자였다. 그는 고천수를 보자마자 손을 뻗으며 달려왔다.

“도와주세요! 저 좀 살려…….”

하지만 그 외침은 길지 않았다. 문신한 장신의 남자 하나가 나타나 그의 머리를 가격해 버린 것이었다.

깡!

기분 나쁜 울림과 함께 셔츠남은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아 씨, 새끼. 진짜 고생하게 하네.”

장신남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다가 고천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엉……?”

놀란 표정을 짓는 장신남을 보며 고천수는 도끼를 꽉 붙잡았다.

“야야야야! 얘들아, 여기!”

장신남의 외침에 두 명이 더 달려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옷을 입었는데도 드러날 정도로 커다란 문신을 하고 있었다.

-오우 쉣.

-야생의 양아치들 등장.

고천수는 살짝 고개를 뒤로 하며 중얼거렸다.

“다들 달릴 준비해. 도망치게.”

싸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룹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굳이 충돌할 필요는 없다는 게 고천수의 생각이었다.

‘원한 심어 봤자 좋을 일은 없으니까.’

추격자가 붙으면 귀찮아진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던 고천수는 순간 양민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양민철은 문신을 한 남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와우, 시발!”

장신남이 갑자기 소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뜬금없이 흥분한 장신남은 양민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너 혹시 양민철?”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고천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야.”

처음 마주친 놈이 양민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고천수는 양민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

양민철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철아, 아는 사람이냐고.”

“그, 그게…….”

그러는 사이 장신남이 걸음을 조금 옮겼다.

고천수는 그걸 보고 재빠르게 도끼를 치켜세웠다.

“잠깐.”

어떤 인연인지는 몰라도 좋은 인연은 아니었다.

그렇게 확신한 고천수는 장신남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지 마. 얌전히 떠날 생각이니까.”

“뭐?”

장신남은 살짝 입맛을 다시더니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와아, 얌전히 떠날 생각이라니.”

그는 양민철을 가리켰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못 하고 가게 하려고 하네?”

고천수는 양민철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과거의 질긴 악연쯤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별로 인사하고 싶진 않은 것 같으니까 그냥 바이바이 하는 건 어때?”

고천수의 말에 장신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아, 씁.”

고천수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별 게 다 꼬이네.’

물탱크에서 고생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엿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

물론 이런 건 멸망한 세계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긴 하지만.

“인사 좀 한다니까? 어이, 민철아. 넌 우리 안 반가워?”

장신남이 말을 건넸지만 양민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천수의 뒤로 주춤주춤 물러설 뿐이었다.

“하.”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고 장신남에게 말했다.

“야.”

양민철에게서는 이후 사정 설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고천수는 갑자기 나타나서 도망치는 사람의 머리를 깨 버리는 양아치들을 친절하게 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조용히 갈 테니까 바이바이 하자고.”

이건 경고였다.

“하.”

그럼에도 장신남은 알아듣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바이바이 안 하면, 어쩔 건데?”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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