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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56화 (56/224)

056. 장대비 (4)

파악!

소리는 간결했다.

고천수가 휘두른 도끼가, 엔티의 뿌리를 천장에 매달고 있던 줄을 시원하게 잘라 버렸다.

풍덩!

뿌리는 곧장 물속으로 떨어졌다.

“…….”

잠깐의 침묵. 고천수는 뿌리가 떨어진 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일행도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그그그그.

하지만 반응한 것은 뿌리가 아니라 엘크로커 쪽이었다.

“뭐야.”

고천수가 중얼거리는 순간 사다리 밑의 수면이 상승했다.

-앜ㅋㅋㅋㅋㅋ

-계획대로 안 됐죠.

물이 출렁이긴 했지만 그건 엘크로커가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서였다. 뭔가 물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흥분한 듯 엘크로커는 고개를 마구 뒤흔들며 울부짖었다.

‘아, 시바.’

고천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령아! 뿌리 곧 커지는 거 맞지?”

“아마도요?”

김하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런데 저만한 물에 던져 본 적은 없어서요.”

텅!

고천수는 곧장 맨홀 뚜껑을 탕탕 쳐 대며 소리쳤다.

“제기랄! 이거 왜 안 열려!”

-천수야.ㅋㅋㅋㅋ

-좀 멋있나 싶으면 금세 추해짐.

-좀만 더 기다려 봐.

“형님들, 이거 다 계획이거든요?”

어차피 엔티 뿌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여기서 빠져나가기는 해야 했다. 고천수는 맨홀 뚜껑을 열어젖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크으윽! 개떡같이 무겁네!”

엔티 뿌리가 가볍다고 해도 본체를 포함한 무게가 결코 가벼운 건 아니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맨홀 뚜껑 위에서 몸을 고정하고 있다면 더 밀어내기 어려웠다.

“헉…….”

결국, 방법은 아래에 있는 엘크로커를 처치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야만 비가 그치고, 맨홀 뚜껑 위에 있는 엔티도 몸을 치울 것이었다.

“형!”

양민철이 고천수를 향해 소리쳤다.

“수면이 너무 빠르게 높아져요!”

이제 수면이 더 빠르게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엘크로커가 흥분한 것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들 침착해!”

고천수는 일행을 안심시키기 위해 소리쳤다.

“여차하면 이걸로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그는 도끼를 치켜들었다. 아직 활용 방식이 확실하지만 않지만, 추측되는 바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걸 최후의 수단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고천수!”

장서연이 빠르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저거라도 내가 어떻게 해 볼게!”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나 수영도 어느 정도 할 줄 아니까! 그 도끼 나한테 줘 봐!”

역시 강한 여자였다.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고천수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뇨.”

하지만 고천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못 줘요.”

“뭐?”

장서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고천수는 사다리 아래를 가리켰다.

꿀렁.

수심이 급격하게 얕아지더니, 무언가 물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엘크로커의 움직임 때문이 아니었다.

“사다리나 꽉 붙잡고 있어요.”

고천수가 그렇게 당부하는 순간, 강한 울림이 있었다.

쿠웅!

무언가 물속에서 빠져나와 벽을 친 것이었다.

“저건……!”

장서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향한 곳에는, 2미터는 넘게 자라난 엔티의 뿌리 하나가 있었다.

그 뿌리가 물속에서 뻗어 나와 벽을 친 것이었다.

꿀렁.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물 밖으로 몇 개의 엔티 뿌리가 더 나타났다.

그그그극!

엘크로커가 물속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동요를 보이며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그사이 엔티 뿌리들 사이에 큰 줄기가 나타났다.

그르르르르.

엔티였다.

물속으로 던져진 단 하나의 뿌리는, 아직 다 자라지는 않았지만 이제 여러 개의 뿌리를 가진 거대한 개체로 나타나 있었다.

그그그극!

그르르르륵!

서로 다른 두 개의 몬스터가 물속에서 뒤엉켰다.

후웅!

먼저 움직인 건 엔티였다.

거대한 엔티의 뿌리 하나가 채찍처럼 허공을 긋더니 엘크로커를 낚아챘다.

그그극!

엘크로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항하듯 몸을 크게 뒤흔들며 입을 벌렸다.

콰드득!

엘크로커가 이빨로 자신을 감싸 쥔 뿌리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엔티는 다른 뿌리들을 사용해 엘크로커의 주둥아리를 옭아매려고 했다.

그그그그그그!

당황한 엘크로커가 어떻게든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무리였다. 마치 크라켄처럼 엘크로커를 붙잡은 엔티가 주위 물을 더 흡수하며 몸을 키웠다. 아직 엔티는 줄기가 일부밖에 없었다.

물만 가지고는 그 양분을 채울 수 없었는지, 엔티는 뿌리를 엘크로커의 몸속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그극! 그그그극!

입이 막힌 엘크로커가 비명을 지르듯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이미 우위는 정해졌다.

엔티는 악어같이 단단한 엘크로커의 피부를 찢어 버리고 체액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형!”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양민철이 외쳤다.

“저거 괜찮은 거예요?”

수심은 낮아졌다. 물은 점점 없어지고 엘크로커는 박살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엔티가 너무 크게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기는 일단 멈춘 것 같은데.

-근데 맨홀 위에 있는 놈이 비켜야지.

-시간이 촉박하다.

그 말 대로였다. 고천수는 도끼를 맨홀 뚜껑 사이로 밀어 넣어서 지렛대 원리로 열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맨홀 뚜껑은 요지부동이었다. 위에 있는 놈이 비키지 않는 게 분명했다.

‘물이 고여 있을 테니까…….’

우기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이 안의 엔티를 피해 달아날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제 수심은 성인 무릎에 올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이제 수중전은 치르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문제는 엔티가 너무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못 피함, 이거.

-엔티는 또 너무 커졌어.

그건 고천수도 잘 알고 있었다.

엔티 뿌리를 던질 때부터, 이럴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형님들, 이 도끼에 뭐 있죠.”

하지만 고천수는 운에 모든 것을 맡길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제가 한번 얘기해 볼까요?”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라면 시청자들이 이 정도 수준에서 반응을 끝낼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는 건, 시청자들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천수가 이미 무대를 준비해 놨다는 사실을.

-ㅋㅋㅋㅋㅋㅋ 역시.

-천수는 천수네.

-우리도 준비한 거 가즈아!

[띠링! 한도초과, 엠바고, 최종보스, 새로운주인, 유체이탈, 울부짖는정신병자 님이 연합 보상 미션을 설정하였습니다.]

[연합 미션 - 도끼로 엔티 1개 퇴치]

[연합 보상 - 20젠]

“콜.”

고천수는 이제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행들이 각기 놀란 표정으로 반응했다.

“고천수! 그 괴물이랑 싸우게?”

“잠깐만요, 형! 위험해요!”

“고천수 님?”

찰박.

고천수는 물 위에 내려섰다.

“자.”

엘크로커를 무자비하게 뜯어먹고 있는 엔티를 보며 고천수가 중얼거렸다.

“한번 놀아 볼까.”

생존만 위해서는 좀 더 기다려 보는 것도 괜찮았다. 물속에서 엘크로커의 움직임에 반응해서 그렇지, 엔티는 원래 촉각 외에는 감각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사다리 위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맨홀 뚜껑 위의 엔티가 자리를 뜬 것 같으면 한 번 더 위로 빠져나갈 시도만 해 봐도 됐다.

그르르르르.

하지만 고천수는 스트리머였다. 저기 저 엔티를 보고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그냥 지나쳐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시청자들의 호응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콘텐츠를, 두려움에 밀려 시도조차 못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

“형님들, 응원 부탁합니다!”

위험을 지는 만큼 보상이 돌아온다.

고천수는 엔티에게 달려갔다. 이제부터는 벌목에만 온 정신을 집중할 것이었다.

따악!

그가 휘두른 도끼가 엔티의 줄기에 박혔다.

그르르.

엔티가 엘크로커를 뜯다 말고 몸을 흠칫했다. 하지만 고천수는 위축되지 않았다. 그대로 엔티에게 몇 번의 도끼를 더 휘둘렀다.

4.

엔티의 줄기에 붉은색 숫자가 새겨졌다. 그걸 본 고천수가 한 번 더 도끼를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촤악!

엔티가 줄기 하나를 고천수에게 휘둘렀다.

“큭!”

고개를 숙여 줄기를 피한 고천수는 도끼를 엔티에게 찍었다.

콰직!

수액이 크게 튀었다. 엔티는 깊은 상처를 느낀 듯 온몸을 크게 뒤틀었다.

‘먹힌다……!’

가로수처럼 숨어 있던 엔티를 찍어 봤을 때도 안 사실이지만, 이 도끼는 꽤나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도끼가 지닌 진짜 능력은 분명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르륵!

엔티가 엘크로커를 놓고 여러 뿌리로 고천수를 노렸다.

콱! 콰직! 콱!

고천수는 엔티의 뿌리에 계속해서 도끼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타격 지점에 새로운 숫자가 새겨졌다.

-왼쪽!

콰악!

이미 봤다. 고천수는 이미 동체시력까지 일반인보다 아득히 뛰어났다. 물론 중요한 건 그러한 사실이 아니라 지금 막 고천수가 찍은 곳에 생긴 숫자였다.

8.

엔티는 부상을 입은 뿌리들을 뺐다가 다시 고천수에게 내질렀다.

콰직!

“아홉……!”

숫자는 이제 9로 변했다.

그륵!

엔티는 고천수의 표정이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관성대로 뿌리들을 휘둘렀을 뿐.

10.

그 숫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천수가 도끼를 휘둘러 뿌리 하나를 내리찍자 도끼 자체가 붉게 변하며 그대로 궤적을 그렸다.

촤아악!

도끼에 베인 엔티의 뿌리가 분리되어 허공을 날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사다리에 있는 일행은 탄식을 뱉어냈다.

“잘랐, 어……?”

“헐.”

“고천수 님!”

눈짓이라도 보내서 호응해 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고천수는 드디어 도끼의 진가를 확인받았다.

‘역시……!’

카운트다운이었다. 정해진 숫자가 다 돌아가면 폭발적인 절삭력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나왔다! 십도끼!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안심은 금물이야!’

도끼는 마지막에 찍는 곳에만 강한 절삭력을 보여 주었다. 대상의 어느 부위든 타격의 시작점으로 잡아도 되지만, 마지막만은 반드시 치명적인 곳을 골라야만 했다.

그르르르.

엔티가 멈추지 않는 부상에 분노한 듯 물과 엘크로커의 체액을 좀 더 빨아 마셨다.

그러자 잘려나간 부위가 회복되고 몸집도 좀 더 커져 버렸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

하지만 고천수는 오히려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네가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어.”

딱 10번.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르륵.

위기를 감지한 듯 엔티가 괴성을 흘렸다.

“멍청하긴.”

흥분해서 엘크로커를 죽이고 방금 전 모든 물을 빨아들였을 때부터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고천수는 물 없이 바닥이 드러난 땅을 밟으며 엔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엔티는 패트롤 방식으로 돌아다니며 접촉하는 대상을 공격할 뿐이었다. 물이 있을 땐 파동으로 뭐라도 감지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콱!

고천수는 여유롭게 엔티의 줄기에 타격을 먹였다.

1.

엔티는 뿌리들을 허우적대며 고천수를 찾으려고 애썼다.

따악!

2.

고천수는 한 뿌리 위에 올라서며 중얼거렸다.

“여긴데?”

휘익!

엔티가 다른 뿌리들을 휘둘러 고천수를 잡아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이미 다른 쪽으로 옮겨 가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죠?”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게 엔티의 생존 방식일 것이었다.

따악!

친구가 없어서 서러울 엔티에게 몇 번이나 도끼질을 먹이고 고천수는 유유자적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르르르륵!

엔티는 고천수를 잡기 위해 뿌리들을 계속 허우적댔다. 그럴수록 고천수는 더욱 빠르게 도끼를 휘둘렀다.

따악! 딱! 콰직!

숫자가 9를 가리켰다.

고천수는 허우적대는 엔티의 뿌리들을 지나쳐 줄기 앞에 다다랐다.

“형님들.”

그는 몸을 크게 뒤로 뺐다가 도끼를 횡으로 줄기에 적중시켰다.

“장작 하나 갑니다.”

콱!

도끼가 엔티의 줄기에 깊게 박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 효과는 고천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났다.

콰드드드득!

도끼가 찍힌 곳을 기준으로 충격파가 앞으로 뻗어 나갔다. 엔티의 줄기는 그렇게 횡으로 완전히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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