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55화 (55/224)

055. 장대비 (3)

“예, 고천수 님…….”

그러자 뒤집힌 상태로 기묘하게 자고 있던 김하령이 몸을 옆으로 데굴 구르며 눈을 살짝 떴다.

그 모습을 보고 고천수는 순간 놀라서 외쳤다.

“아 깜짝이야! 표정 좀 밝게 지어, 좀비 된 줄 알았잖아! 아니, 일단 얼른 일어나 봐!”

고천수는 김하령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천장을 가리켰다.

“쟤 발작난 거 같으니까 어떻게 좀 해 봐!”

“아.”

김하령은 살짝 입을 벌리더니, 곧 손을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물 떨어져서 그런 걸 거예요.”

“물?”

“원래 물 뿌리는 방향으로 계속 뻗어 나갔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하거든요.”

뿌리인 만큼 양분과 물에도 자극받는다고 김하령은 설명했다.

“다시 자라려면 많은 물하고 양분이 필요해요. 적은 양에는 변화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은 그냥 위에서 물이 좀 떨어져서 그런가 봐요.”

그 말에 고천수는 손전등으로 철제 구조물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고인 물이 엔티의 뿌리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물…….”

물은 맨홀 뚜껑에서부터 철제 구조물로 흐르고 있었다.

‘밖에 비가?’

날이 안 좋게 바뀔 때부터 예측하기는 했었다.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는 했으니까.

뚝뚝.

물은 이 아래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양을 봤을 때는 부슬비 정도로 추측됐다.

텅!

엔티 뿌리가 다시 철제 구조물을 때렸다. 청각이 활성화되지 않은 엔티들에게는 저게 자극이 되지 않을 테니 별 문제는 되지 않을 터였다.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아직까진 안은 메말라 있는 걸 보니 물에 잠길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였다.

“후.”

고천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괜찮은 것 같다. 돌아가서 다시 자, 하령아.”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임을, 고천수는 오래잖아 알게 되었다.

『……야! 야 이 미친 새꺄!』

또다시 변조된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이번엔 벽에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고천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으, 음? 무슨 일이십니까?”

-아 나, 진짜 젠 또 다 털렸다, 아이고.

우는 소리를 하는 시청자를 보며 고천수는 하품을 내질렀다.

“형님, 괜찮으니까 젠 너무 쓰지 마세요. 차라리 후원하면 좋잖아요. 목소리도 다른 걸로 골라서 써 주시고요.”

-아니, 도와준 거라고! 앞을 봐라!

고천수는 그 말에 앞을 봤다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이거……!”

낮은 지대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고천수는 눈을 크게 뜨며 탄식했다.

“10분도 안 잔 것 같은데……!”

고작 그 사이에 물이 이만큼 차 있었다. 고천수는 위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쏴아아아아.

천장에서 물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맨홀에서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물이 더 유입되고 있는 듯했다.

“다들 일어나! 일어나라고!”

고천수는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일행들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며 손으로 눈을 비볐다.

“뭐야, 갑자기…… 헉?”

“형!”

장서연과 양민철이 각각 상황을 확인하고 놀라서 일어났다. 김하령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의료 배낭에 물품들을 쑤셔 박기 시작했다.

“다들 물건 챙겨! 배낭 하나씩 지고!”

고천수도 옆에 있던 배낭을 짊어지고 위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망할……!’

물이 이대로 더 차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수심이 상승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보니까 물이 흐르지도 않고 있었다.

‘여기는 그냥 수로가 아냐!’

지하 공간치고는 공기가 쾌적하다고 느낀 건, 다른 곳으로 연결돼서가 아니라 그냥 환기 설비가 되어 있던 것으로 보였다.

그 설비 사이로 물이 더 빠르게 들어오고, 물이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아 수심이 더 빠르게 차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지하 물탱크라고!’

비가 올 때 물을 저장해 가둬 놓는 시설이었다. 이런 날씨에서는 최악의 장소에 들어와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필……!’

하필 이런 장대비라니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어떻게 해, 천수야? 밖으로 나가야 하나?”

채비를 마친 장서연이 물었다. 고천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나가면 엔티들을 마주치게 돼있었다.

“형님들, 엔티들 비가 올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엔티 뿌리는 본체가 있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듯하니 참고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청자한테 물어보는 게 제격이었다.

-글쎄. 난 비 올 때 엔티는 본 적이 없어서.

-계속 비 오면 멈춰서 물 먹지 않나?

-물 먹긴 하는데, 뿌리 이곳저곳으로 뻗어서 위험할 수도 있을걸?

올라가면 어쨌거나 위험을 피할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잘 쉬다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나 맞으면서 돌아다니게 생겼다.

‘일단은…….’

혹시 비가 그칠 가능성도 있었다. 모든 걸 준비한 상태로 고천수는 잠시 대기하기로 했다.

“저, 고천수 님.”

김하령이 어딘가에서 꺼내 온 노란색 우비 하나를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여태 비 온 적 없긴 한데, 혹시 몰라서 막 가지고 있었어요.”

고천수는 우비를 받아들었다. 김하령의 손을 보니 다른 인원에게 줄 우비도 잔뜩 들려 있었다.

애초부터 여럿이 동료가 될 때를 대비해 놓은 듯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비 금방 그칠 것 같아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거든요. 저, 간절히 그치기를 바라고 있어요.”

“…….”

꼭 그쳐야 한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는 김하령을 보고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기껏 들어온 파티에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았다.

불안해 보이는 김하령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고천수는 한참 동안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결국 비는 그치지 않았다.

***

물이 계속 차올랐다.

고천수는 탄식을 흘렸다.

‘대체 뭔 비가 이렇게……!’

재난이라도 닥친 듯했다. 갑자기 폭풍이 몰려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올라갈 준비해!”

고천수는 사다리를 잡았다. 위에 있는 맨홀 뚜껑을 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엔티 뿌리가 맨홀 뚜껑을 때려서 열게만 유도하면 되니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천수야.

그때, 한 시청자가 채팅을 올렸다.

-이거 우기일지도 몰라.

우기? 갑작스러운 발언에 고천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무슨 소리죠?”

-주변 환경에 영향을 주는 몬스터가 있어. 지금 이것도 연관이 있을지 몰라.

순간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주는 몬스터라면…….

“설마!”

그는 차오르고 있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지저분한 물이었다.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장서연이 곁으로 와 같이 물을 내려다보았다.

“뭐라도 보이는 거야?”

“뭐가요?”

양민철도 같이 시선을 향했다.

“저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도요.”

김하령도 고개만 갸웃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물속이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라가요!”

그때였다. 고천수는 급하게 소리쳤다.

“다들 사다리 잡아요!”

고인 물이 한 방향으로 출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고천수는 물속에 무언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망할……!”

장서연이 식겁하며 먼저 사다리를 잡고 올라갔다. 그다음은 양민철과 김하령이었다. 홀로 아래에 남은 고천수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잡동사니 하나를 물속으로 던졌다.

퐁당.

파동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파동 위로 녹색의 긴 주둥이와 번뜩이는 두 눈이 올라왔다.

“으아아아아아!”

그걸 본 장서연이 위에서 소리쳤다.

“악어잖아!”

그랬다. 어느새 악어 한 마리가 들어와 있던 것이다.

“제기랄!”

놀란 고천수도 사다리를 잡고 올라갔다.

꿀렁.

그와 동시에 바닥의 물도 한순간에 더 높게 차올랐다.

‘뭐야, 저건……!’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청자가 말했던 환경 변화가 생겨나는 게 분명했다.

“형님들! 저 몬스터 뭐예요!”

그렇다면 저것 또한 일반적인 악어는 아닐 것이었다.

-엘크로커 같은데.

-운도 없네.

-하필이면 저게 여기에…….

“저거 평범하게 여기 들어온 거 아니죠?”

갑자기 나타났다.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라 차오르는 수심과 함께 여기서 등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엘크로커는 물이 차오르기 좋은 곳에서 갑자기 태어나는 천재지변 몬스터야.

-확률적으로 만나기 쉽지 않은데.

-물탱크라니, 장소가 기가 막히긴 했다 야.

역시 운이 안 좋았다는 얘기였다.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대로 수심이 높아져 모두 물에 빠지게 될 터였다.

“장서연 씨! 위에 있는 나무뿌리 붙잡고 맨홀 뚜껑 열어요! 그거 물 떨어지는 데로 반응하니까 그거 이용해서!”

나가야 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

하지만 일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

“고, 고천수!”

줄을 당겨서 엔티의 뿌리로 맨홀 뚜껑을 몇 번 쳐낸 장서연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이거 안 열려!”

“뭐라고요?”

“안 열린다고!”

엔티의 뿌리가 계속해서 움직여도 맨홀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에 뭐가 있나 봐!”

고천수는 비명을 지르듯 외치는 장서연을 보며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있다고?”

그게 뭔지는 대번에 추측이 됐다.

엔티는 비가 내리면 멈춰 서서 물을 먹는다고 했다.

우기라는 게, 이 안뿐만 아니라 밖에도 영향을 줘서 사방에 비가 내리고 있는 거라면 역시 지금 엔티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을 먹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

맨홀 뚜껑이 열리지 않는 건, 엔티 하나가 이 위에 있다는 소리였다.

그그그그.

밑에서 계속 물이 차오르는 가운데, 엘크로커가 적의를 보이듯 괴성을 내뱉었다.

-방법이 없겠는데.

-엘크로커 쓰러뜨려야 할지도.

위가 막혔다면 적어도 우기를 끝내야 했다.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물속에서 싸워야 한다고?’

엘크로커는 계속 물속에 있었다. 이대로 수심이 높아지면 공격을 해 올 것이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소리는 엘크로커와 수중전을 벌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돌겠네, 진짜…….”

고천수는 허리춤의 도끼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 밖에서 싸웠다면 그나마 써먹을 만했을지 모르지만, 이 상태로는 무리였다.

수중전으로 가면 제대로 휘두를 수조차 없을 게 뻔했다.

‘아직 어그로도 안 잡히나.’

엘크로커는 고천수를 노리고 있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물이 찰 때까지 유유자적하겠다는 것으로 보여 고천수는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고천수! 어떻게 해! 이 망할 나무뿌리 때문에 맨홀 뚜껑을 못 연다고!”

위에서는 장서연이 절망한 듯 소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고천수는 이마를 붙잡으며 침음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수중에서 나오지 않는 몬스터라고 해도 상대할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었다.

“천수야!”

그리고 그때, 고천수는 한 가지를 생각해 냈다.

“김하령!”

“네? 무슨 일인가요, 고천수 님?”

이런 때에도 그다지 공포에 질려 있지는 않은 김하령을 올려다보며 고천수가 물었다.

“저거 뿌리, 자라려면 많은 물이랑 양분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게 있기만 하면 바로 커?”

보통의 나무뿌리면 수조 같은 데 떨어졌다간 맥없이 죽어 버리겠지만 엔티의 것은 달랐다. 지금도 물 좀 들이켜 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지 않은가.

“네, 맞아요. 정말 많이 먹어야 겨우 자랄 테지만요.”

“좋아. 다들 비켜.”

고천수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응? 고천수 님?”

“형?”

“뭐, 뭐야.”

고천수는 일행들을 지나쳐 꼭대기로 향했다. 그리고 엔티의 뿌리와 마주했다.

“네가 그렇게 미친놈이라며?”

잘려 나간 상태로도 여전히 발악하고 있는 뿌리는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미친 듯한 생존 본능이야말로 지금 고천수가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간다.”

고천수는 도끼를 빼어들었다.

목표는 하나.

엔티를 천장에 매달아 두고 있는 하나의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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