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장대비 (2)
“……진짜 하수도에 살았던 거야?”
장서연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는 불행히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네, 여긴데요.”
김하령은 뭘 그런 표정으로 보냐는 듯 말하더니, 어딘가에서 맨홀 개폐기를 가지고 왔다.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예요?”
양민철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김하령은 개폐기를 맨홀 홈에 설치하면서 답했다.
“네? 이거 근처 공사장에 있던데요?”
-대단한 여잔데.
-이거 가지고 살 만한 하수도 찾아다닌 거임?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세계였지만, 고천수는 그녀의 행동 논리 자체는 납득할 수 있었다.
‘잡것들 피하기엔 딱일 테니까.’
엔티한테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려면 방법이 필요했다. 오히려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알려주는 게 훨씬 신뢰감도 주고.
드륵.
바퀴가 달려 있는 개폐기를 끌자 홈에 고리가 걸린 맨홀 뚜껑이 그대로 끌려서 열렸다.
“됐다.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김하령이 맨홀 뚜껑에서 개폐기를 빼서 숨겨 두고 와서는 물었다.
고천수는 잠시 고민했다. 일단 이곳에 온 목적은 김하령이 가지고 있는 전용 의학 도구와 약품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르르르.
어딘가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양민철과 장서연이 각각 고개를 돌리며 탄식을 흘렸다.
“형! 이 소리……!”
“고천수! 그놈들인가 봐!”
역시 어둠이 깔리면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르르르.
아예 시야에 들어왔다. 근처에서 엔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아 나, 망할.”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고천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 엔티들을 피해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수목원에서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곤란했다. 벌써 이렇게 보일 정도면 엔티의 수가 가늠이 됐다.
‘이 근처에 엔티들이 쫙 깔려 있다면……!’
남은 길은 하나였다. 고천수는 맨홀로 뛰어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들 내려와!”
엔티는 지하 공간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 피할 곳은 이 장소뿐이었다.
“형! 같이 가요!”
“에이 씨!”
양민철과 장서연이 뒤를 따랐다. 김하령은 제일 마지막에 사다리를 탔다.
탁!
고천수는 손전등을 꺼내 일행을 비추면서 소리쳤다.
“김하령! 맨홀 뚜껑 닫을 수 있어?”
이제 와서 생각난 거였다. 하지만 이런 곳에 두는 맨홀 뚜껑은 일반적인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무겁기 마련이었다.
잡기도 힘들어서 지렛대에 바퀴까지 달린 개폐기가 없으면 움직이기 힘들었다.
“어?”
어차피 커다란 엔티가 맨홀 구멍을 통과해 떨어질 일은 없으니 관두려고 했지만, 순간 고천수의 눈에 예상치도 못한 것이 들어왔다.
“뭐야, 저게.”
맨홀 구멍 근처에 커다란 뿌리 하나가 그물 같이 엮인 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게 뭔지 이해하기도 전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던 김하령이 품에서 웬 손전등 하나를 꺼내 그 뿌리를 비쳤다.
꾸드득!
그 손전등에서 나온 푸른빛에 얻어맞은 뿌리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야, 뭐야!
-이 여자 괴물 기르고 있었나 봐!
-ㅋㅋㅋㅋ 미친.
순간 고천수도 식겁했지만 뻗어나간 뿌리는 일행을 노리지 않았다. 갑자기 맨홀 구멍 바깥으로 나가더니 뚜껑을 질질 끌고 와 닫아 버렸던 것이다.
“응……?”
황당하긴 했지만 뚜껑이 닫히면서 지하 공간은 더 어두워졌다.
“형! 사다리 좀 더 비쳐 줘요!”
“어? 어엉!”
먼저 밑에 다다른 고천수는 양민철과 장서연도 무사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수 있게 손전등을 비쳐 주었다.
“후. 갑자기 어두워져서 놀랐네.”
사다리를 다 타고 내려온 장서연이 위를 쳐다보았다.
“위에서 뭐가 움직인 것 같았는데, 봤어?”
“저는 못 봤어요. 형은요?”
양민철의 물음에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방금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천수 당황잼.ㅋㅋ
-난 이럴 때마다 천수 겁나 귀엽던데, 정상임?
-이런 걸 즐기고 있다면 상담이 필요합니다.
고천수는 손전등을 김하령이 있는 곳으로 비쳤다. 어느새 푸른빛을 낸 손전등을 끈 그녀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읏차.”
그리고 바닥에 도착해 고천수를 올려다보았다.
“저 확실히 쓸모가 됐죠?”
“어. 그런 것 같긴 한데…….”
고천수는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
“뭐요? 증상이 있으시면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여기 필요한 건 다 있거든요.”
“아니, 저거 말야.”
고천수는 위를 가리켰다.
“뿌리가 있던데.”
“뿌리? 아.”
김하령은 손전등을 까딱이며 답했다.
“그 나무 괴물 뿌리예요.”
“뭐?”
“뿌리만 남았을 때 자외선 비추면, 햇빛 들어오는 줄 알고 구멍을 막아 버리거든요. 땅속에 묻혀있어야 다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나 봐요.”
그걸로 맨홀 뚜껑을 막았다는 얘기였다. 고천수가 멍하니 바라보자 김하령이 고개를 까딱였다.
“왜요? 뭐 문제 있나요?”
“아니.”
고천수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너 완전 인재라서.”
***
딸깍.
김하령이 어딘가에 달린 줄을 당기자, 주변 벽에 매달려 있던 전등에서 불이 켜졌다. 캄캄했던 내부 공간이 옅은 빛으로 가득 찼다.
“이거…… 다 본인이 설치하신 거예요?”
양민철이 감탄하자 김하령이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근처 매장에 제품 다 있었어. 그냥 끌고 와서 설치만 하면 되는 거였지.”
“……그래도 대단하긴 한데.”
장서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잘 꾸며 두기도 했고.”
내부의 높은 지대에는 얇은 매트리스 위에 이불이 깔려 있고 작은 접이식 책상도 존재하고 있었다. 김하령이 실제로 이곳을 집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칭찬해 주시니까 고맙네요. 집들이를 한 기분이기도 해요. 아, 저 그러고 보니 집들이는 처음이에요.”
다시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기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고천수는 내부를 좀 더 둘러보았다.
‘실험 도구…….’
한구석에 웬 플라스크와 이름 모를 약품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엔티의 나무뿌리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는 메모장도 있었다.
‘직접 실험해서 알아본 건가?’
고천수는 천장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잘려나간 엔티의 뿌리를 저렇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알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하령아, 뿌리는 대체 어떻게 구한 거야.”
고천수가 묻자 김하령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거요. 밖에 꽤 널려 있어서 몇 개 주워서 실험해 봤어요. 군인들이 엔티들이랑 좀 싸우다가 흔적으로 남긴 것 같았어요.”
“그래?”
“네. 제가 직접 잘라서 구한 건 아니라서 부끄럽네요.”
그다지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다. 저 나무의 뿌리가 엔티의 것임을 알게 되면 웬만한 사람은 건들지도 못할 테니까.
“그리고 저거 생각보다 무겁지도 않아요. 속이 빈 것 같은 무게였어요.”“더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돼.”
고천수는 김하령을 진정시키며 이불의 개수를 확인했다. 어차피 당장 나갈 수는 없으니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민철아, 너는 저기 매트리스 위에 가서 누워라.”
“네?”
주인의 허락을 묻지도 않았다. 양민철은 고천수의 지시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김하령을 돌아보았다.
“먼저 물어보고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전 지금 괜찮은데…….”
“괜찮을 리가.”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휴식을 취해 주는 게 좋았다. 고천수는 그 취지를 이해받기 위해 김하령에게 시선을 보냈다.
“네, 저도 괜찮아요. 환자가 가장 좋은 자리를 이용하는 거니까요. 당연한 거죠.”
그녀도 양민철이 푹신한 자리에 눕기를 종용했다.
“……정말 여기서 쉬어도 괜찮나요?”
성격상 한 번 더 거절할 법도 하건만, 양민철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그만큼 몸에 쌓인 피로가 컸던 것이리라.
“어, 괜찮아. 푹 쉬어라.”
“아앗, 형……!”
고천수는 당황스러워하는 양민철을 붙잡고 억지로 매트리스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은 이불이 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 하나를 집어왔다.
“나머지는 알아서 자리 잡고 쉬도록 합시다.”
그게 오늘의 마지막 지시였다. 고천수는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웠다. 솔직히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분 나쁜 지하 공간이긴 했지만, 이곳은 마치 층고가 높은 집처럼 크기만큼은 쾌적했다.
상시 하수도로 쓰이지 않는지 주변은 젖어 있지도 않았다. 어딘가 외부로 통하는 곳이 있는 듯 공기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참, 대단했다.’
일어나서 양민철을 찾아 헤매고, 덩치와 치고받기도 했다. 나중엔 양민철을 살리기 위해서 뛰어다니는 와중에 김하령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악몽이 끝나는 줄 알았더니, 역시 세상사 쉽게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또 엔티를 마주치게 되어 버렸으니까.
“형님들.”
하지만 원래 쉽게 해결을 볼 수 없는 일이란 건 흔하지 않았다.
고천수는 졸려 감겨 오는 눈을 조금씩 감으며 시청자들에게 고했다.
“혹시 저 자다가 위험 상황이 오면 좀 깨워 주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뭐든지 미리 준비해 두면 좋은 것이었다.
-깨워도 네가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정도는 자기 암시로 하자.-꿈에 나와서 알려주면 됨?
말은 좀 짓궂게 해도 고천수는 이 시청자들에게 믿음이 있었다. 더 이상 도와줄 게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플레이어를 그냥 이탈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네, 형님들. 꿈에 나와 주세요.”
수목원에서부터 이래저래 피곤했다. 고천수는 이내 잠에 들었다.
***
『고천수!』
어디선가 들리는 음성.
『야, 고천수! 일어나!』
웬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변조된 여성의 목소리였다.
『일어나라고, 이 멍청아! 모아 온 젠 또 다 쓰게 생겼네, 시발!』
‘모아 온 젠……?’
고천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젠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꿈 꿨나?’
비몽사몽간에 고천수는 상체를 일으켰다. 근처에서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텅!
그때였다.
작지만 소름끼치는 울림이 고천수의 귀를 때렸다.
텅!
“뭐야.”
고천수는 소리를 쫓아 고개를 들어올렸다.
텅!
위였다. 순간 정신을 차린 고천수는 손전등을 켜서 천장 쪽을 비췄다.
“설마 엔티들이……!”
텅!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건 아니었다.
“응……?”
천장에 그물로 묶여 있는 엔티의 뿌리가, 바로 위에 있는 철제 구조물을 후려치고 있었다.
-드디어 일어났네.ㅋㅋ
-저 소리에도 안 일어나가지고.
-한도초과 또 한도초과 될 뻔.
그제야 시청자들의 채팅에 눈을 가져간 고천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형님들, 무슨 소리죠? 저 깨우지도 않고서는!”
-야이 씨! 깨웠잖아!
고천수의 망언에 딱 봐도 한도초과로 보이는 시청자가 격노했다.
-젠 뿌려서 계속 스피커 기능 켜고 얘기했다고, 이 개자식아!
스피커?
고천수는 꿈처럼 들렸던 그 음성을 기억해냈다.
“아아. 헐. 그거 형님이었어요?”
당연히 환청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설마 한도초과가 음성으로 직접 귀에 쑤셔 박은 것인 줄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대체?”
여태 이렇게 깨운 적은 없었다.
-너 자는 사이에 스피커 기능 활성화됐어.
“아, 망할. 잠수함 패치까지 했어요?”
꼭 플레이어가 모르는 새에 업데이트할 때가 있는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곤혹스러웠다.
“아니, 시발.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고천수는 정신을 차렸다. 어차피 채팅 기능에 당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후원 기능이 활성화됐을 때도 뒤늦게 알았으니까.
오히려 지금은 도움이 된 경우였다.
“김하령! 야, 하령아!”
고천수는 김하령에게 달려가 어깨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