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장대비 (1)
고천수는 그렇게 장서연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김하령에게서 확인했던 다른 내용을 일행에게 모두 알렸다.
“저희, 여기에서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근처에는 몬스터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좀비조차도.
“우리가 수목원에서 싸웠던 것들이, 여기에 잔뜩 밀려나왔다고 하더군요.”
엔티. 그것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게 좀비 같은 놈들은 죄다 뜯어먹어서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거고요. 사실 되게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 근처에도 엔티가 있다는 얘기였다. 고천수의 말에 양민철과 장서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설마…….”
“그 설마입니다.”
경악하는 장서연을 보며 고천수는 분식집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가로수가 하나 서 있었다.
고천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도끼를 들고 바로 그 가로수를 찍어 버렸다.
푸슛.
마치 피가 새어나오듯 수액이 미친 듯이 튀었다.
일반적인 나무는 확실히 아니었다.
“보세요.”
고천수는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며 유리창 안쪽에 있는 인원들에게 가로수를 가리켰다.
이건 엔티였다.
‘응?’
그걸 확인해 주려고 도끼를 휘두른 것이었지만, 고천수는 예상 외의 것을 발견했다.
바로 수액이 뿜어져 나오는 부분에 남아 있는, 붉은색 표식이었다.
‘이건…….’
수목원에서 자물쇠를 내리쳤을 때도 나타났던 것이었다.
딱.
순간 충동적으로 고천수는 한 번 더 도끼를 엔티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표식이 하나 더 생겨났다.
“……!”
그것을 본 고천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2?’
그 표식은 단순히 도끼에 맞아 생긴 흔적이 아니었다. 숫자 2의 형태로 그려져 있던 것이다.
‘뭐지?’
고천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곧 알아챘다. 처음에 고천수가 엔티의 줄기를 찍으면서 생겼던 일자 붉은 표식은 사라졌다는 사실을.
딱!
망설일 것 없었다.
고천수는 또 한 번 엔티의 줄기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3.
2가 없어지고 새로운 타격점에 생겨난 숫자를 바라보며 고천수는 탄식을 흘렸다.
‘이건…….’
명백하게 무언가를 카운트하는 것이었다.
“고천수!”
그때, 장서연이 다시 뛰쳐나와 고천수를 찾았다.
“그게 뭔지는 알았어! 근데 일단 들어와 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천수를 데리고 분식집에 들어온 장서연이 주방 앞에 올려놓은 무언가를 가리켰다.
『……듣고 계십니까, 여러분.』
거기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끊임없는 위협을 피하며 살아 계신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
누군가 하고 있는 방송. 당장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고천수는 곧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희 부대가 운영하고 있는 생존자 캠프로 오십시오.』
7.5사단이었다.
『다른 곳을 찾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각 도시의 주요 거점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에서 저희와의 연결고리를 찾으실 수 있습니다.』
대전에 한정된 방송이 아니었다.
『국가는 아직 여러분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살아 계시다면 서둘러 주요 시설로…….』
고천수는 더 이상 라디오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장서연 씨, 이 라디오는 어디서 찾았습니까?”
“아까 선반에 있는 거 발견해서 구석에 켜 뒀던 거야. 배터리로 작동되는 거라 아직은 전파를 수신하는 것 같아.”
라디오를 어디서 발견했는지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방송 내용이 워낙 터무니없어서 잠시 안정을 되찾고자 쓸데없이 물은 것뿐이었다.
‘각 도시 주요 시설에 거의 다 퍼져 있다고?’
엄청난 규모였다. 물론 사단 병력을 생각할 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 7.5사단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존재감을 흩뿌리고 다니면 다른 부대와의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세상에 저들 부대만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7.5사단 겁나 조직적인 것 같지 않냐.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조직적임.
-조심해야 됨.
고천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식사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하령은 여전히 멀뚱히 서 있었고, 양민철은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유리창 밖에서는 수액이 튀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었다.
“식사 끝.”
고천수는 테이블로 걸어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린 바로 터미널 쪽으로 간다.”
***
-터미널?
-거기 위험한 거 아냐?
-차 찾는다며.
당연하게도 시청자들의 우려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점은 이미 고천수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갑자기 거기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을 바꾼 것도 아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불구덩이에 뛰어들자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
고천수는 쓴맛이 나는 풀이라도 씹은 듯한 장서연의 표정을 보며 손을 저었다.
“우리는 여기서 멀지 않은 대전복합터미널 직전까지만 갈 겁니다. 올 때 근처 부동산에서 다 확인했어요. 거기 도착하기 전에 멈출 수 있습니다.”
“직전까지요?”
양민철이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
“또 뭔가 계획이 있으신 거군요.”
“뭐, 그렇긴 해.”
죽다 살아나서인지 더 적극적으로 변한 양민철을 보며 고천수가 헛웃음을 지을 때였다.
김하령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럼 그 계획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군인들 별로 만나고 싶지 않거든요.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해요.”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일원이 되어 버렸네.”
당돌하게 의견을 표출하는 김하령을 보고 고천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설명했다.
“차야.”
“차?”
“그래, 자동차. 이동 수단.”
지금 이 근처에서 이동 수단을 얻을 방법은 없었다. 간혹 주차돼 있는 차가 보이긴 했지만 움직일 방법이 딱히 없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솔직히 보급함에서 만능키라도 나왔으면 좋았겠지만, 도끼 한 자루를 얻은 게 전부였다.
“생각해 봐, 이 라디오 소리는 우리만 듣는 게 아니야.”
하지만 어디에나 방법은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라디오 소리를 듣고 고민을 할 거란 말이지.”
지금 있는 안전한 장소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군인들의 도움을 바라고 역이나 터미널로 이동할 것인지 말이다.
여기서 전자를 선택할 사람이 있겠지만, 후자를 선택할 사람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당연히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뺏자는 건가요?”
김하령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팅게일 선서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건 어려운데요.”
“글쎄, 믿기 어려운데.”
처음 등장했을 때의 분위기를 보면 뭔가 무서운 짓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고천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김하령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짠데요.”
“알았어.”
“믿어 주세요.”
“알았다니깐. 진정해.”
음영 진 눈두덩을 이쪽에 향하고 있으니 왠지 몸을 흠칫하게 됐다. 고천수는 김하령을 달래주며 말했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 걸 빼앗지는 않을 거야. 웬만하면 말이지.”
“그러면?”
장서연이 걸어와 끼어들며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 두고 간 차라도 얻겠다는 거야?”
“정확합니다.”
고천수는 장서연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역 안에 들어갈 때 사람들이 차를 두고 들어가겠죠. 그중에 하나를 얻으면 됩니다.”
“키는?”
“역 안에 들어가려는 사람한테 달라고 하면 됩니다.”
간단했다.
“……아, 저기.”
장서연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듯 질문했다.
“그럼 키를 안 주려고 하면?”
“그럴 땐 강제로 빌리면 됩니다.”
고천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러자 김하령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거 사람 해치는 일 아닌가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지.”
강제로 키만 빌리는 것이었다. 약간의 고통을 줄 수는 있어도 사람을 해치는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명쾌한 계획이었지만 모두의 반응이 조금 미묘했다.
-ㅋㅋㅋㅋ동료들 표정 봐라.
-그냥 해친다고 해.
-솔직히 누구 하나 죽어나갈 듯.
“형님들, 이 정도면 훌륭한 계획이죠. 아무도 안 죽을 거고요. 물론 죽어야 될 사람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고천수가 그렇게 자신이 세운 계획에 만족하고 있을 때, 양민철이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알겠어요, 형.”
그는 고천수가 세운 계획에 길게 의문을 품지 않았다.
“형이 절 살렸으니까, 저는 어떻게 가시든 좋아요.”
“내가 살렸는데.”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김하령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못 들은 듯, 양민철은 몸을 풀며 나갈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장서연도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 뭐.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가서 어떻게든 차를 얻어 보자.”
이로써 의견은 모였다. 고천수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에 있던 많은 음식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고천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갑시다.”
배는 충분히 채웠을 테니까.
***
휘잉.
길거리는 여전히 휑했다. 사람들도 없는 길거리에는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만 가득했다.
‘기분 나쁘네.’
가로수 중에 엔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고천수는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다.
“하령아, 도착지까지는 아직 멀었어?”
하늘이 어두웠다. 아직 밤에 될 시간은 아니지만 비라도 오려는 듯했다.
고천수의 물음에 김하령이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앞에서 골목 하나만 돌면 돼요.”
고천수가 일행을 데리고 김하령의 거처로 이동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단순히 그 정도면 모르겠지만, 구름이 점점 먹색으로 변해 가는 게 고천수는 여간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거리에 깔려있는 수많은 가로수들.
엔티는 밤이 되면 몸을 일으키지만, 주변이 밤처럼 어두워져도 사냥에 나설지 모를 일이었다.
“거의 다 왔어요. 다들 좀만 더 참아요.”
다행히 김하령의 거처는 멀지 않았다. 그녀가 환자를 달래듯 하는 말을 들으며 일행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아 씨, 어디야!”
앞에서 갑자기 외침이 들렸다. 고천수는 김하령의 뒷덜미를 붙잡아 함께 옆에 있던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뭐야.’
그의 다급한 손짓을 따라 나머지 일행도 급하게 골목 안쪽에 숨었다.
‘사람?’
고천수는 혼자 골목 안쪽에서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상황을 살폈다.
“에이 씨, 잘못 온 거 같은데.”
“엿 같네.”
“그래도 뭐 방향은 맞겠지. 일로 가자고.”
젊은 남자들이었다. 기껏해야 김하령과 비슷한 나이라고 추정됐다.
-오우, 뭔가 불안하죠.
-뭐가 불안?
-쟤네 자세히 보셈.
아닌 게 아니라 남자들은 온몸에 문신이 가득했다. 물론 거기까지는 취미로 했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길바닥에 침을 뱉으며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는 거동은 선입견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다들 조금만 기다렸다가 가죠.”
고천수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일행에게 고했다.
“……어떤 놈들인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장서연의 물음에 대답하며 고천수는 남자들을 계속 살폈다.
“하지만 별로 엮이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조금 기다리자 남자들은 저들끼리 뭔가를 상의하다가 사라졌다. 고천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남자 몇의 완력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이미 어느 정도의 힘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거동부터가 수상한 놈들과는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게 좋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자, 여러분. 다시 잘 따라오세요.”
고천수가 손짓하자 김하령이 앞서 나갔다. 나머지는 조심스레 사방을 경계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도착했어요.”
목적지는 코앞이었다.
김하령은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예요.”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맨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