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간호학과생 김하령 (4)
“으아아아아!”
고천수는 큰 냄비에 곰탕을 붓고 다른 냄비들에는 즉석 밥을 데우거나 면을 익힐 용도로 각각 물을 채웠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미트볼, 스테이크 같은 것들을 올렸다.
화르륵.
화력은 최대로 키웠다. 시야에 불꽃이 강렬하게 아른거렸다.
“형님들, 시간 내로 끝냅니다.”
치이이익.
업소용 가스레인지의 화력은 상당히 강했다. 이미 반은 조리돼 있던 음식들이 빠르게 익기 시작했다.
“저기, 고천수……?”
옆에서 장서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천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거 하나 더 올리고…….”
추가 프라이팬을 다른 화구에 올려놓은 고천수는 바구니에서 버터와 빵을 찾아냈다.
그리고 프라이팬이 금세 달궈지자 버터를 바르고 빵을 구웠다.
“우와, 형. 요리 좀 했었어요?”
양민철이 냄새를 맡고 다가와 감탄사를 흘렸다. 하지만 이 정도는 고천수에게 별로 자랑할 만한 거리도 못됐다.
‘혼자 지내다 보면 간편 식품에는 익숙해진다니까.’
그걸 어떻게 해야 더 맛있게 먹는지 정도는 연구해서 적용한 것뿐이었다.
“민철아, 바구니에서 스파게티 면도 좀 꺼내 줘.”
모든 화구를 최대한 활용할 셈이었다. 고천수는 물만 끓고 있던 냄비에 소금을 살짝 넣은 뒤 온도를 확인하고 양민철에게서 받은 면을 삶기 시작했다.
“그릇. 장서연 씨, 그릇들 준비해 놓으세요.”
고천수는 다시 미트볼을 조리하다가 맛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파게티와 섞기에는 간이 좀 약한 느낌이었다.
“음.”
고민하던 고천수는 바구니에서 케첩을 찾아 미트볼 위에 살짝 뿌렸다. 그리고 물을 살짝 넣고 섞기 시작했다.
-진짜 엄청 열심히 만드는데.
-솔직히 대강 만들 줄 알았더니.
벽에 걸린 시계가 압박을 주기는 해도 고천수는 대충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도 일종의 쇼맨십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형님들, 순서는 좀 엉망이어도 봐주십쇼.”
정신없이 조리하다 보니 어느새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장서연 씨, 담아 주세요.”
곰탕과 즉석 밥, 미트볼과 함께 볶은 스파게티, 스테이크 그리고 편의점 구석에서 찾았던 김치까지 준비됐다.
“……음.”
장서연은 음식들을 담아 주방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장서연 씨, 그러고 있지 말고 날라 주세요.”
계속 시켜먹기만 하는 고천수를 보며 장서연이 눈썹을 살짝 움찔했지만, 딱히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눈앞의 음식이 너무나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앗! 제가 도울게요!”
양민철이 도우면서 둘은 준비된 테이블에 음식들을 빠르게 서빙할 수 있었다.
“형! 더 하실 거 있나요?”
고천수는 바구니에 남은 것들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만하면 됐다.
“형님들, 빨리 약속한 젠 주십쇼.”
여기에 오기 전 시청자들과 조리할 음식 개수로 내기를 걸었던 터였다. 완벽하게 해냈으니 고천수는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띠링! 한도초과 님이 1젠 후원! - 먹방 준비 인정.]
“에라이.”
한 명밖에 후원이 없었다.
“형님들, 이거밖에 안 줘요? 한도초과 님은 물론 감사합니다. 영원히, 영원히 기억해 둘게요.”
-ㅋㅋㅋㅋ기억하긴 뭘 기억해.
-애초에 네가 멋대로 내기한 거잖아.
-맞아. 이 대출쟁이야.
그랬다. 조금이라도 갚아 보려고 여기 오면서 내기를 걸었던 건데, 이제 대출 잔액은 34젠이 남아 있었다.
“후, 됐습니다. 할 일이나 빨리 하겠습니다.”
음식을 조리하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지금 고천수는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자! 다들 맛있게 먹길!”
그러고 곧장 고천수는 곰탕을 한 번 떠서 맛을 보았다.
“와…….”
뜨끈한 국물이 위장에 들어가는 순간, 전율이 다리부터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엄청 맛있네.”
허기질 때 먹었더니 진짜 고급 레스토랑 음식의 뺨을 치고도 남았다. 물론 그런 곳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음.”
빵도 하나 가져와 미트볼과 함께 맛을 보았더니 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고천수는 남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음식을 계속 먹어 댔다.
-천수야, 같이 좀 먹자.ㅋㅋㅋㅋ
-얘는 머 먹는 순서가 이러냐.ㅋㅋ
격식 같은 것도 없고, 음식을 조화롭게 먹는 차례조차 고천수에게는 의미 없었다. 그저 와구와구 음식을 먹고 있자니 장서연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고천수.”
“…….”
“천수야!”
그녀의 부름에 고천수가 마침내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왜 이렇게 다 서둘러.”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대답하는 대신 먹는 길을 택했다. 어차피 좀 이따가 다 설명해야 할 텐데, 먹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뭐야.”
장서연이 그런 고천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형, 물 좀 드세요.”
양민철은 캐묻는 대신 고천수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고맙.”
순식간에 배를 채운 고천수가 그 물을 받아 단숨에 들이켜고는 장서연에게 말했다.
“장서연 씨, 가끔씩은 제가 터무니없는 짓을 해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뭐?”
“그냥 제가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두시는 게, 마음 편할 테니까요.”
그러면서 고천수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서연이 그 모습을 보며 급하게 외쳤다.
“야, 고천수! 또 어디 가!”
“잠깐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올 테니까.”
그게 끝이었다. 고천수는 그대로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
“후. 형님들, 이제 가 보겠습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진짜 개처럼 먹어서 시간 맞췄네.
-굳이 진짜로 밥 다 먹고 올 이유가 있었나?
-그러게. 그냥 근처에 숨어 있지.
“형님들.”
고천수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가 제 배를 만져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밥 먹고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김하령과 상호간의 신뢰를 쌓는 과정에 있었다. 괜한 술수는 한구석으로 치워 두는 게 나았다.
-배까지 만져 볼까, 과연.
-어차피 김하령 ‘기다려’ 훈련시키는 건데, 너까지 똥개 훈련할 필요 없잖아.
“아유, 참.”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들, 친구 안 사귀어 보셨나요?”
사소한 거라도 초반에 신뢰를 다져 놓으면 인간관계에서 더 강한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아무리 NPC라고는 해도 김하령도 실제 인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 점까지 잘 활용한다면 현재 김하령이 가지고 있는 설정에서 더 큰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너무 기계적인 판단만 하지 마시고, 실제 친구를 사귀고 저와 대화를 나눠 주세요.”
-아.
-천수야, 그건 너무 아픈 부분이었다.
-아니, 자기도 친구 없었으면서.ㅋㅋㅋㅋ
마지막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고천수는 아까 전에 들렀던 편의점 근처로 향했다.
“과연…….”
이러나저러나 김하령이 약속된 장소에 있어야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아!”
있었다.
김하령은 편의점 앞에 쭈그려 앉아 멍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있네.
-천수가 원하는 대로임.
고천수는 자신이 밥을 먹고 올 동안 편의점 앞에서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으면 그룹에 넣어주겠다고 했다.
‘통제 가능.’
시청자들이 서포터라고 하긴 했어도 고천수는 그녀가 어디까지 통제 가능한 인간인지 직접 가늠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확인했다.
그녀는 적어도 시키는 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하령 씨.”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었다. 고천수는 김하령의 앞에 나섰다.
“앗!”
그를 발견한 김하령이 반색하며 뛰어왔다.
“돌아오셨네요!”
“네, 약속했으니까요.”
“저는 또 저를 버리고 가신 건 아닐까 하고, 시간도 아직 안 지났는데 속으로는 불안해하고 그랬거든요. 물론 믿었지만요. 그래도 점점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살짝 졸도할 뻔했어요.”
표현은 좀 직설적이지만 괜찮았다. 고천수는 그녀의 성향을 이해했다.
‘진짜 버림받았다니까.’
분식집에 돌아가기 전, 고천수는 김하령에게서 대략적인 사정을 들었다.
김하령은 근처 대학교의 간호학과생이었다. 하지만 주택가도 아니고 근처에 큰 병원도 없는 이곳에 그녀가 덩그러니 있던 이유는, 바로 버림받았기 때문이었다.
“김하령 씨, 학생증 좀 다시 줘 보시겠습니까?”
“학생증? 그거요?”
김하령은 편의점 앞을 가리켰다.
“아직 저기에 있어요.”
“다시 안 주웠습니까?”
고천수는 김하령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학생증을 내려다보았다.
4학년.
그건 거짓이었다. 원래 학년 표시가 없는 학생증에 김하령이 정교하게 숫자를 붙여 놓았던 것뿐이었다.
학번상으로는 2학년이었다.
‘아주 우스운 꼴을 당했지.’
선배들과 함께 이 근처로 왔던 김하령은 곧 군인들과 맞닥뜨렸다. 군인들은 차에 태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며 고학년만 태워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얘기를 들은 고천수가 학생증을 확인하려고 하자 김하령이 그대로 학생증을 내버렸던 터다.
“학생증 다시 챙기셔도 됩니다.”
고천수는 김하령에게 말했다.
“어차피 사정 설명은 다 하셨지 않습니까.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챙기세요.”
“정말요?”
“네, 이해하니까 돌아왔지 않습니까. 받아 주려고.”
그러자 김하령이 반색하며 다가와 학생증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도 되죠? 앞으로 성심성의껏 도울 테니까요. 2학년이긴 해도 교내 실습은 다 했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네.”
김하령을 휘어잡는 건 간단했다. 받아주고, 역할만 주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쓸모가 있다고 느끼면 안정감을 얻는 타입이었다.
‘따를 줄만 알면 됐어.’
시키는 대로 기다릴 줄 안다는 건 기본적인 통제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개나 사람이나 그룹으로 들이려면 이 부분이 정말 중요했다.
“아.”
그때, 김하령이 갑자기 탄식했다.
“근데 그럼 고천수 님이라고 해도 될까요?”
“고천수 님?”
“저를 받아 주신 분이니까요. 고천수 님은 저를 편하게 대하셔도 돼요.”
그 말에 고천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누군가한테서 그런 호칭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아예 주인님이라고 하지.
-얘 데려가면 다들 어찌 볼지 벌써부터 눈에 선하네.
-천수야, 정말 괜찮겠냐.
대전에는 군인들이 잔뜩 있을 게 분명했다. 고천수의 입장에서는 쓸 만한 패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괜찮고말고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형님들.”
고천수는 결정을 내리고 김하령을 붙잡아 끌었다.
***
“뭐?”
그리고 분식집에 돌아와 당연한 수순으로 장서연의 황당해하는 표정과 마주했다.
“데려간다고? 얘를?”
“네. 잘 부탁드려요.”
김하령은 장서연과 양민철에게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고천수…….”
장서연은 뭐가 어떻게 된 거냐는 듯 탄식을 흘렸다.
“저희를 도와주기도 했고, 사정도 있었거든요. 얘기 좀 나눠보니 동료들한테 버림받은 듯하던데, 같이 가기로 하죠.”
“버림받았다고?”
“네. 그래서 이런 데 혼자 있었다고 하더군요.”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장서연은 숨을 삼키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장서연 씨, 가끔씩은 제 행동을 이해해 줘야 한다고 했죠?”
고천수는 김하령을 가리켰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
“저를 믿는다면 받아 주세요.”
그러자 잠시 눈치를 보던 양민철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럼 전 받을게요.”
“앗, 너……!”
“절 살려 주셨잖아요. 형이 괜히 데려왔을 리도 없고요.”
양민철은 놀라는 장서연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같이 가요. 누나도 이해해 주세요.”
언제 그런 호칭을 쓰게 된 걸까, 양민철이 너스레를 떨면서 하는 말에 장서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후.”
그러더니 장서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마치 허를 찔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도 안 믿는다고 할 수도 없잖아. 반칙이야.”
“다행이네요.”
고천수는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럼 결정됐습니다. 다 같이 가는 걸로.”
결정을 한 이상 무르기는 없었다. 고천수는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공지도 하나 있으니까, 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