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간호학과생 김하령 (3)
“형…… 저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약국에서 멀어져 가자, 수레에 실려 가던 양민철이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고천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려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부상이 부상이었으니 아직도 불안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런 상태로 계속 데려가는 것도 무리였다.
“그래.”
고천수는 수레를 멈추고 양민철이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걸을 수 있으면 그냥 걷자.”
양민철은 살짝 비틀거리다가 곧 혼자서 균형을 되찾았다.
“후. 보이죠? 저 이제 괜찮아요.”
“무리는 하지 마라.”
괜히 무리하다가 잘못되면 그게 진짜 폐가 될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형. 신경 쓰이게 하지는 않을게요.”
“말은.”
이미 신경이라면 많이 썼다.
고천수는 시선을 멀리 던져 어디로 갈지를 고민했다.
“차가 있으면 좋은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차는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었다.
-천수야, 영화에서처럼 어떻게 안 되냐.
-맞아, 너 헬 프로그 잡을 때도 차 뜯었잖아.
-난 천수가 언제 메카닉으로 변하나 기대 중임.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형님들, 그런 건 겁나 구형 차 아니면 되지도 않아요.”
강제로 시동 걸려다가 도난 방지 장치 때문에 핸들이 잠기는 건 애교였다. 요새 차는 정비공이 아니면 건들지도 못할 만큼 내부가 복잡했다.
“멀쩡한 차를 찾는 게 빨라요. 괜히 힘만 빼지.”
인터넷 방송으로 모은 지식에도 한계가 존재했다. 그렇게 복잡한 일은 할 수 없었다.
고천수는 한숨과 함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장서연이 배낭을 뒤지고 있었다.
“장서연 씨, 뭐 하십니까?”
“응? 아니, 배고파서.”
“배고프다고요?”
하긴 뭘 먹은 지 시간이 좀 되기는 했다. 양민철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고천수는 배고픈 것도 잊고 있던 차였다.
“아까 그 여자한테 음식 좀 줬더니 알겠더라고. 내가 배고프다는 걸.”
참으로 대단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말하는 장서연을 보며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민철아, 너도 배고프지?”
“예? 아, 저는…….”
말은 안 해도 허기진 상태일 게 분명했다.
부상을 입으며 고생은 고생대로 해 놓고 여태 먹은 게 없으니 배를 곪고 있는 상황이 아니면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었다.
“일단은 우리 체력부터 좀 회복해야겠네.”
어딜 가든 속부터 추스르는 게 우선이었다. 고천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장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저기.”
군데군데 헤지고 녹슨 분식집이었다. 가스관이 연결되지 않은 건물에서 영업을 한 건지 LPG 가스통이 밖에 보였다.
도시 가스가 어떻게 됐든 지금 불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
함께 걸어가 먼저 식당에 들어간 장서연이 살짝 탄식을 뱉었다.
“왠지 분위기가 좋아.”
주변이 어질러져 있지 않고 깔끔했다. 적어도 누군가 여기에 좀비 사체 같은 걸 남기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렇네요. 분위기 괜찮네요.”
테이블도 잘 정돈되어 있으니, 여기가 고급 레스토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형, 안에 뭐 있나 한번 볼까요?”
“민철아, 스탑.”
냉장고를 열려는 양민철을 제지하며 고천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전기가 나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전기가 나갔다면 안에 들어있는 식자재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괜히 속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대로 놔둬.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아…… 네.”
양민철이 뒤늦게 알아챈 듯 냉장고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그사이, 장서연은 주방 안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설탕, 소금, 고추장……. 기본적인 양념 같은 건 다 있고, 라면도 몇 개 있네. 정수기용 생수통도 있고.”
-물 있어서 좋긴 한데, 약간 부실한 거 아님?
-통조림 먹는 거랑 비슷한 듯.
-냉장고 열자, 천수야.
“형님, 냉장고는 오바라니까요.”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부실한 건 형님들이 저한테 주는 후원 금액입니다. 거지니까 많이 좀 주세요.”
-ㅋㅋㅋㅋ자기가 빚져 놓고.
-웃기는 놈이네.ㅋㅋ
누가 도끼 하나만 덜렁 나올 줄 알았던가.
고천수는 그놈의 도끼를 치켜들고 출입구로 향했다.
“형, 어디 가요?”
“잠깐 기다리고 있어.”
양민철의 질문에 대답하고 밖으로 나간 고천수는 바로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편의점…… 근처에 하나는 있을 텐데.’
대한민국에 있는 편의점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인구에 비례하면 거의 사회 복지 차원에서 공급하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나와라, 나와.”
찾았다.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작은 편의점 하나가 있었다. 고천수는 곧장 근처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딱히 위험한 건 없어 보였다.
딸랑딸랑.
“아!”
문을 열고 들어가던 고천수가 식겁하며 움찔했다.
“개깜놀했네.”
별것도 아닌 종소리에 놀라 버렸다. 유리문 위에 있는 종을 떼어 버리고 고천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진열장 다 박살나 있네.
-그러게.
-근데 왜 좀비는 하나도 없지?
신경 쓸 게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고천수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수목원에 있던 엔티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위협이 되는 몬스터는 만나지 못했다. 좀비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말이다.
‘흐음.’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천수는 편의점 바구니를 하나 집고 안을 맴돌았다.
“즉석 밥이랑 죽이랑 탕들이랑…… 함박스테이크, 미트볼…….”
상온 보관이면서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식품은 최근에 꽤 많았다. 심지어 유통기한도 긴 편이라 안전했다.
땅에 떨어지고 박스가 찢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꺼내 보니 내부 포장은 멀쩡한 것들이 남아 있어 바구니에 넣었다.
“저건…… 좀 아쉽네.”
냉장 진열장에 하나 있는 도시락을 먹지 못한다는 건 좀 아쉬웠다. 그래도 음료수는 멀쩡하니, 몇 개 챙길 수 있었다.
“가 볼까.”
당장은 너무 욕심 낼 필요 없었다. 고천수는 바구니를 들고 나가려고 하다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와 나, 개소름;
-언제 와 있었냐.
김하령이었다. 초췌한 얼굴로 그곳에 있는 그녀를 보면서 고천수는 작게 숨을 뱉었다.
“……형님들, 뒤 좀 잘 봐 주십쇼.”
아무리 먹방을 앞두고 있어도 같이 한눈을 팔면 어쩌자는 말인가.
“후.”
다만 고천수는 가지고 있는 도끼를 치켜들진 않았다. 놀라긴 했어도 양민철을 구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역시 따라온 건가.’
이미 따라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게 게임에서도 이런 캐릭터들은 대개 사람을 스토킹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면 좋겠는데.’
일행에 합류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제 확인해 봐야 했다.
고천수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뭡니까, 저를 미행한 겁니까?”
“…….”
문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인지 김하령이 제대로 듣지 못한 듯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하아.”
고천수는 문을 열고 눈짓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김하령이 들어오자 고천수는 바구니를 계산대 위에 올리고 물었다.
“왜 따라온 거죠? 답례는 했던 것 같은데.”
음식이 널려 있는 편의점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아까 전에는 줄 수 있는 게 통조림 몇 개밖에 없었다.
“……그게.”
김하령은 우물쭈물하더니 갑자기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필요하시지 않을까 해서요. 그, 환자는 지속적으로 돌봐야 하잖아요? 언제 상처가 도질지 모르니까. 네.”
“필요?”
고천수는 눈썹을 살짝 움찔댔다.
“김하령 씨가 더 신경 써 줄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감사 인사를 더 원하시면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
김하령은 대답 대신 시선만 이리저리 돌렸다. 뭔가 핵심적인 말을 피하고 있는 느낌이 강했다.
-분위기가 싸한 여자네.
-쓸 만한 서포터인 건 알지만 좀 무서워.
-난 성능충이라 끌린다.
그래, 생각이 있었다. 다만 필요한 부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고천수는 김하령에게 굳이 시간 투자를 하지 않을 셈이었다.
‘멀쩡한 부분.’
김하령의 사고 방식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고천수도 다음 단계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고천수는 짐짓 답답한 척하며 다시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할 얘기가 없으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갈 길이 바빠서요. 저희가 빨리 몸을 추스르고 여기서 멀어지면, 김하령 씨도 더 이상 저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일방적으로 대화를 정리한 고천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김하령이 빠르게 따라 나와 말했다.
“정말 필요 없나요? 데려가면 유용해요. 다른 사람보다는 좀 떨어지지만요. 그 환자분 엄청 신경 쓰이니까 데려가 주세요.”
“그럼 민철이가 있는 곳에 가서 물어보지 왜 제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까?”
고천수는 뒤돌아서서 물었다.
“왜 제가 따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서 쫓아온 거냐고 묻는 겁니다. 굳이요.”
“아, 그건.”
김하령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제가 리더 같아서죠?”
고천수의 물음에 김하령의 몸짓이 멈췄다.
“환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룹에 끼고 싶은 거니까.”
장서연은 김하령을 계속 경계했다. 말투도 굉장히 강했으니, 김하령의 입장에서는 두려웠을 것이었다.
그래서 고천수가 혼자 있을 때 은근히 찾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 저 감히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고요. 환자가 있으면 제가 도움이 되니까…….”
“그게 그 얘기 같은데 말입니다.”
고천수가 조금 날 서게 반응하자 김하령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이내 몸을 달달달 떨기 시작했다.
“아, 아아음.”
처음에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고천수는 이게 김하령의 진짜 모습이라고 확신했다.
‘자기가 쓸모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자신감이 붙었다가…….’
지금은 역할을 잃고 두려움에 발악하는 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뜬금없이 이런 여자애가 혼자 있다 했지.’
고천수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이젠 완전히 얼어붙어 있는 김하령을 보자니, 이내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떤 게임을 하든지 특이한 캐릭터를 만나게 돼 있고, 그 캐릭터 안에 담겨 있는 내러티브가 무엇인지 얼마나 빠르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향후 게임 공략의 질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김하령. 뭐가 됐든 서포터는 확정이니까.’
이런 모습이 무섭지만 않다면 활용성은 충분했다.
‘좋아.’
고천수는 지금 막 결정을 내렸다.
***
“왔어요, 형? 대체 어디에 다녀…….”
분식집에 들어선 고천수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던 양민철은, 그가 들고 온 바구니를 보고 숨을 삼켰다.
“야, 민철아! 너 혹시 매운 라면 잘 먹…… 어?”
그때 마침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묻던 장서연도 눈을 크게 떴다.
“뭐야?”
그녀의 시선은 다시 분식집으로 돌아온 고천수가 들고 온 바구니에 향하고 있었다.
“우리 먹을 거 찾아온 거야?”
“네. 제대로 된 거 먹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러면서 주방에 있는 테이블에 바구니를 가져다 놓자니 장서연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멀쩡한 것들 맞지?”
박스 포장 없이 내부 포장지만 남은 식품들을 보며 장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걱정 마세요. 멀쩡한 것만 가져온 거니까요. 저만 믿으세요.”
오랫동안 혼자 살다 보면 레토르트 식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내부 포장 상태가 멀쩡한지도 불량 검수 직원처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식사 준비할 테니까 거기 냄비랑 프라이팬 좀 준비해 주세요.”
고천수는 바구니에 들어 있는 것 중 먼저 조리할 것을 급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렇게 급해.”
“급하다니요?”
장서연의 의문에 고천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이 정도면 정상이죠.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나고 있잖아요.”
못 먹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허기가 질대로 진 상태였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서두르는 건 아니었다.
-천수야, 근데 30분은 너무 빨리 잡은 거 아니냐?
고천수는 대답 없이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