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잡목을 기르는 사람들 (8)
-고천수!
-야, 새꺄!
-일어나!
머리에 온 충격 때문에 고천수는 잠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하지만 희미한 시야로 보이는 채팅을 보고 얼른 몸을 옆으로 굴렸다.
쾅!
남자가 내리찍은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피해 갔다. 고천수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아아아아!”
하지만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남자는 달려들어 또 한 번 몸으로 고천수를 박았다.
“큭?”
고천수는 벽에 부딪히며 신음을 토해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자는 고천수의 멱살을 붙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으아아!”
그러고는 자신의 몸으로 짓누르기까지 했다.
“이, 이 자식이……!”
엄청난 무게와 근력이었다. 통나무라도 짊어지고 산 것일까. 고천수가 바닥을 짚고 힘을 주는 사이, 장서연이 나타났다.
“야아!”
구덩이 위에서 점프한 장서연이 남자의 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으아아아!”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남자에게 먹히기는 했다. 얼른 떨어지라는 듯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털어대기 시작했다.
“망할.”
온몸을 치닫는 고통을 이겨내며 상체를 일으키던 고천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야, 엔티 뿌리다!
듣자마자 찬물을 머리에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엔티의 뿌리는 땅을 더듬으며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천수는 장서연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위험해요!”
“야 씨, 지금 장난 하냐!”
장서연은 남자의 머리털을 붙잡고 늘어지며 소리쳤다.
“너 먼저 나가!”
남자는 어깨 근육이 심하게 비대한 탓에 팔을 돌려 장서연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 점을 이용해서 계속 남자의 뒤를 붙잡고 버티다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크악!”
남자의 눈 한쪽을 찌른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아!”
고통에 겨워하던 남자가 미친 듯이 몸을 뒤흔들다가 마침내 장서연을 떨어뜨렸다.
“장서연 씨!”
남자가 장서연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며 이번엔 고천수가 나섰다.
퍼억!
고천수의 날아 차기가 남자의 골반을 때렸다.
크게 휘청거린 남자는 벽면을 짚다가 엔티 뿌리에 손목을 붙잡혔다.
“으아아아!”
그가 뿌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동안 장서연이 구덩이 위로 재빠르게 올라갔다.
“고천수!”
그러고서는 아직 구덩이 안에 있는 고천수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아, 시발!”
뿌리가 고천수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그로 1 - 09:59]
그는 뿌리를 향해 몇 번이나 발길질을 해 댔다.
“저리 꺼지라고!”
“으아아아아!”
겨우 뿌리를 떨쳐냈지만, 마침 남자도 뿌리에서 벗어났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또 한 번 고천수에게 달려들었다.
“아, 미친…… 컥!”
고천수는 남자에게 옆구리를 붙잡혀 바닥에 내리깔렸다.
남자는 고천수가 반사적으로 내민 양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깍지 꼈다.
꽈드득.
힘겨루기.
남자는 고천수의 손을 그대로 꺾어 버리려고 했다.
“아아아아! 이 미친 새끼가!”
밥 먹고 근육만 기른 건지 엄청난 힘이었다.
“너만 센 줄 알아?”
하지만 고천수도 쉽게 지지는 않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강하게 힘을 주자 온몸의 신경이 곧추섰다.
꾸득!
위기 상황에서 발휘되는 힘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고천수는 모든 면이 강화된 신체로 자신을 예전보다 확실히 통제할 수 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잠재된 힘을 끌어올렸다. 고천수는 괴성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손을 앞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밀린다!
남자의 손이 조금씩 밀렸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어그로 2 - 09:11]
고천수는 엔티 뿌리가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을 개의치 않고 기다렸다.
[어그로 3 - 09:05]
“끄아아아아아!”
보강된 신체가 폭발적인 힘으로 남자를 옆으로 밀어냈다.
“제발 좀 꺼지라고오오오!”
콰득!
순간 몸이 넘어가면서 남자는 손가락이 꺾여 버렸다.
“끄아아아아!”
터져 나오는 남자의 비명은 고천수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재빠르게 일어난 고천수는 자신의 다리에 달라붙은 뿌리에 발길질을 날렸다.
“진짜 징그럽네, 시발!”
겨우 뿌리를 다 떨쳐내려니 남자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와, 무슨 좀비세요?”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남자가 또다시 달려드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바로 구덩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탁.
대기하고 있던 장서연이 고천수를 끌어당겨 주었다.
쾅!
남자는 구덩이 벽에 몸을 처박았다. 하지만 불굴의 남자는 온몸에 부상이 가득한데도 고천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으아아아!”
구덩이를 기어 올라오는 남자를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템이라도 있었으면……!’
보급함을 못 연 게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천수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고 이를 악물었다.
올라오면 고간을 노려 끝내 버릴 참이었다.
“으아아아!”
마침내 남자가 구덩이 위로 올라와 섰다.
“뒈져!”
고천수가 던진 돌멩이가 남자의 고간으로 향했다.
파악!
결과는 명중이었다.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야, 씨.
-인간임?
-으아아아아아!
남자는 비틀거리며 고천수에게 걸어왔다. 그 모습은 정말 좀비와 비견해도 훌륭할 정도였다.
“혀어어어엉!”
순간 들린 소리가 고천수의 고개를 돌렸다.
“양민철?”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양민철이 뾰족한 삽을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비켜요!”
순식간에 고천수의 옆을 지나친 양민철은 삽으로 남자의 목을 찔렀다.
“쿠엑?”
남자는 삽 끝을 붙잡고 뒤로 주춤거렸다.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양민철과 함께 삽을 잡았다.
“밀어!”
고천수의 외침과 함께 양민철이 힘껏 삽을 앞으로 밀었다. 남자는 삽을 빼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크아악!”
그러더니 곧 발을 헛디디고 구덩이 안쪽으로 떨어졌다.
“끄아! 끄아아아!”
그사이 구덩이 안쪽에 잔뜩 깔린 뿌리들이 남자를 붙잡았다.
몇 번 자극을 받아서인지 뿌리들은 이번에 붙잡은 남자를 쉽게 놓지 않았다.
푸욱.
한 뿌리가 삽을 붙잡고 찍어 누른 게 결정적이었다. 남자는 허공에 손짓을 하다가 점점 힘을 잃고 늘어졌다.
뿌리들이 그런 남자의 몸을 관처럼 덮어 갔다.
“후.”
양민철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이에요.”
그러더니 고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짜 걱정했어요, 형.”
그 얼굴에는 일말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만 남은 줄 알았다고요.”
양민철의 지친 표정에서 고천수는 감정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양민철 또한 고천수를 찾아 헤매며 잠시 절망을 맛본 듯했다.
“살았으니 됐지.”
고천수는 양민철의 어깨를 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대로 양민철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했다. 찾지 못하면 포기하고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일은…….’
전혀 바라지 않았다. 고천수는 서로를 믿을 수 있는 동료가 필요했다. 유기성이 그딴 짓을 벌였을 때도 장서연이 시간을 끌어 주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혼자서는 이 세계를 돌파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뭐, 다른 것도 있지만.’
이런 거지같은 세상에서 멀쩡한 길동무도 없으면 돌아 버릴지도 모르니까.
“얀마!”
딱!
장서연이 양민철의 뒤통수를 때렸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놀란 양민철이 장서연을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고천수만 신경 쓰는 거야? 나도 같이 찾아다녔는데!”
유치한 발언이었지만 양민철은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 그렇네요. 죄송해요.”
“실없긴.”
고천수는 그를 보며 같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살아남았다.
일단은 그거면 된 거였다.
***
“형님들.”
수목원을 벗어나기 전, 고천수는 일행을 대기시키고 홀로 보급함 앞에 와 있었다.
“72젠이래요.”
-그래서?
-달라는 거야 뭐야. ㅋㅋㅋㅋ
-예끼, 이놈.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며 고천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젠이 없어서 열 수가 없잖아요.”
현재 가지고 있는 젠은 37개였다.
2배에 가까운 정도로 뻥튀기해야만 이 보급함을 열 수가 있었다.
“솔직히 안에 엄청나게 좋은 거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얼마 안 했던 손전등도 나름의 큰 역할을 해 냈다.
72젠짜리면 뭐가 들어있을지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같이 보죠, 이거.”
하지만 고천수의 말에도 채팅창은 비웃음으로만 가득 찰 뿐이었다. 고천수는 한숨을 쉬며 보급함을 잡아 들었다.
“그럼 할 수 없네요.”
덜컹.
힘으로 잡아끌려고 하자 보급함이 살짝 움직였다.
“끄아아아아!”
이를 악물고 잡아당기자 보급함이 들썩이며 살짝 끌려왔다.
-애쓴다.
-천수야. 그러다가 손 박살난다.
-포기해. 그러면 편해.
“어후!”
고천수는 결국 보급함에서 손을 뗐다.
“와, 진짜 무겁네.”
이 정도면 짐처럼 들어서 옮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형님들, 이거 지게차 들고 와서 들면 움직여요?”
-ㅋㅋㅋㅋㅋ 야! 그만하라고!
-아, 헛웃음 터졌는데 안 멈춤. -_-
-되긴 함.
긍정적인 답변이 있었다. 고천수는 이마를 잡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디로 가면 지게차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천수야, 룰렛 돌려.
그때, 흥미를 끌 만한 채팅이 올라왔다.
“룰렛……?”
-나중에 게임기처럼 생긴 거 나와. 네 젠 걸고 배팅할 수 있어.
“아, 정말입니까?”
근데 그 룰렛이란 거, 지금 돌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 게임기 같은 게 보이진 않았다.
“당장 쓸 수 있는 거 없습니까?”
다들 대답이 없었다.
고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보급함을 잡았다.
“별 수단 없으면 그냥 어떻게든 가지고 가렵니다.”
-그렇게 가지고 싶어?
익숙한 말투의 채팅이 올라왔다. 고천수가 잠시 가만히 서 있자, 다시 채팅이 올라왔다.
-네가 갖고 싶으면 빌려 줄 수는 있어. 하지만 당분간 버는 족족 내가 갖게 될 거야.
“동의하면요? 정말입니까? 바로 주시는 겁니까?”
-그래. 이번만. 하지만 명심해.
다음에 이어진 말은 꽤나 묵직했다.
-미래에는 이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어차피 72젠짜리는 흔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고천수는 이미 결심을 내렸다. 무기가 있어야, 수월하게 생존할 수 있었다.
[띠링! 온리원 님이 직권으로 35젠 대출! - 이후에 이런 배려는 없어.]
고천수는 바뀐 자신의 소지 금액을 확인하고 한숨을 뱉었다.
‘괜히 찝찝하네.’
무조건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억지를 부린 거였는데, 결과는 좋아도 약간의 불안이 생겨 버렸다.
‘모르겠다.’
72젠짜리는 그냥 넘기기 힘든 물건이었다. 보물찾기고 뭐고 이게 당장은 가장 좋은 선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삐걱.
지체할 건 없었다.
고천수는 보급함을 열어젖혔다.
“이건……!”
도끼가 들어 있었다. 고천수는 그 도끼를 꺼내들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고천수 표정 봐. ㅋㅋㅋㅋㅋ
-벌써 후회가 물씬 느껴지죠.
고천수는 도끼를 높이 치켜들고 말했다.
“이것도 뭐 특수한 능력 있고 그런 거죠?”
손전등도 일반적인 손전등은 아니었다. 이 도끼도 그런 면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믿을게요. 예? 그렇게 믿어도 되죠?”
고천수는 채팅창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온리원은 답변이 없고, 채팅창은 계속 웃음으로 가득 찰 뿐이었다.
고천수는 보급함 안에 같이 들어있던 도끼 전용 벨트를 착용하고 도끼를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고천수!”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솔직히 좀 더 특수한 무기를 바랐던 입장에서 기운이 좀 빠지긴 했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고천수는 아쉬움을 삼키고 장서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천수!”
“왜 그렇게 불러 댑니까.”
딱딱하게 대답하던 고천수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
“민철이가 이상해!”
그 말에 고천수는 양민철을 쳐다보았다.
양민철은 주저앉은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천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양민철의 상태를 살폈다.
“양민철, 너…….”
그제야 고천수는 알아챘다.
양민철의 옷은, 다른 사람의 피가 아닌 스스로의 피로 적셔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