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잡목을 기르는 사람들 (5)
“야, 뭐 해.”
그녀가 고천수를 끌어당기며 몇 번 더 크게 흔들어 보았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똑같았다.
“얘가 왜…….”
콰득!
느닷없이 난 소리에 장서연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거친 시멘트 바닥 위, 폰 하나가 그녀의 발에 밟혀 망가져 있었다. 고천수가 들고 있던 게 떨어진 걸까.
그는 알람만 맞춰놓고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으로 보였다.
“야, 고천수!”
뭔가 이상했다.
조바심이 생긴 그녀가 한 번 소리까지 질렀지만 고천수는 역시나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며 유기성을 바라보았다.
“얘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걸 왜 저한테 묻죠?”
유기성은 장서연을 빤히 쳐다보며 반문했다.
“이렇게 묶어 뒀는데 제가 뭐 아는 게 있겠습니까?”
“아니, 한숨도 못 잤다면서요!”
그렇다면 유기성이 본 게 있을 것이 확실했다.
“얘 무슨 일 있었어요? 의식이 없잖아요!”
“글쎄요. 좀 깊게 자고 있나 보죠.”
유기성이 태연하게 답하는 모양새를 보고 장서연은 잠시 멈칫했다.
“뭐야, 당신…….”
그녀는 유기성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역시 뭐 알고 있는 거지.”
“뭘 말이죠?”
“고천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자 유기성은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이상한 사람이네. 자기들이 나한테 한 짓은 생각도 못하고 무슨 짓을 했냐니.”
“그건 유감인데, 얘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장서연의 날선 물음에 유기성은 더 웃음을 멈추지 못하며 답했다.
“깊게 자고 있는 걸 거라니깐? 알려줘도 알아듣질 못하네.”
“자고 있는 거라고……?”
장서연은 고천수를 살폈다. 확실히 그냥 곯아떨어져 있는 거로밖에 안 보이기는 했다. 다만 일어나질 못할 뿐.
“이게 그냥 자고 있는 거냐!”
장서연은 유기성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빨리 대답해! 고천수한테 대체 뭘 한 거냐고!”
“풀어 줘.”
유기성은 나지막이 답하자 장서연이 탄식했다.
“뭐?”
“풀어 달라고.”
말라서 두드러진 유기성의 눈두덩이가 더욱 음침하게 그늘졌다.
“풀어 주면 도와줄 테니까, 일단 풀고 얘기하자고.”
“…….”
“왜, 못 믿겠어?”
유기성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을 뻔한 거 살려 줬잖아. 안전한 곳에 넣어 주고 잠자리까지 제공해 줬잖아. 근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해? 그럴 만한 자격이나 있어?”
“도와준 건 고맙다고 했잖아. 근데 너도 알 거 아냐, 겁나 수상한 거.”
장서연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한밤중에 나와서 갑자기 우리를 구한다고? 고맙긴 한데, 그게 우연일 수 있는 거냐고.”
“그래서. 우연인 것 같지 않아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유기성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추측만 가지고? 아니, 난 너희를 도와줬는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시끄러! 아는 게 있으면 일단 얘기하라고! 고천수가 왜 이러는지!”
“알려줘?”
유기성은 벽에 있는 찬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봐 봐.”
거기에는 많은 통조림통들이 진열되듯 늘어서 있었다.
“고천수라는 놈, 저거 만진 거야.”
“저거……?”
장서연은 통조림통을 만진 게 대체 무슨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음표를 띄우는 장서연을 보며 유기성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모르겠지? 통조림통 겉면에 뭔가 발라져 있는 거.”
그 말에 장서연은 깜짝 놀라며 찬장 옆으로 가 보았다.
확실히 통조림통 겉면이 유난히 반들거리고 있었다.
“엽독 발라 놨거든.”
굳어 버린 장서연은 유기성이 하는 말들을 다 듣고서야 확실히 알아차렸다.
“너희 같은 은혜도 모르는 도둑놈 잡으려고.”
이곳은 피난처가 아니라 덫이었다는 걸.
***
“……해독제 내놔.”
하지만 장서연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쳐맞고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해독제 내놓으라고.”
그러자 유기성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독제? 잘 모르겠는데?”
“이 자식이!”
퍽!
달려간 장서연이 그대로 발로 유기성의 얼굴을 후려 찼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내놓으라고!”
“큭, 푸흐흐.”
유기성이 신음과 함께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거친 타입이었네?”
“그래, 새끼야.”
장서연은 유기성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해독제가 없다고? 지금 장난하냐? 풀어 줘 봤자 그럼 아무 소용도 없는 거였네?”
“그거야 모르지.”
유기성은 장서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흔들림이 전혀 없는 부자연스러운 눈동자가 장서연을 직시했다.
“풀어 주면 또 있다고 할지도 모르잖아.”
“너……!”
“근데 사실 안 풀어 줘도 되긴 해.”
갑자기 유기성의 뒤편으로 연기가 올라왔다.
“알아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거든.”
불이었다. 유기성의 옷소매와 침대보에 붙은 불이 삽시간에 커지고 있었다.
“놀랐어? 나 소매에 라이터 하나씩은 넣어 두고 다니거든. 옷도 잘 타는 거 입고.”
생각보다 불길이 컸다. 장서연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하는 거야!”
“난 장작이야. 아니, 여기에 있는 게 다.”
나무로 만들어진 사다리도 같이 타고 있었다. 장서연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어. 여기 갇히고 싶지 않으면 얼른 풀어 줘.”
유기성이 씨익 미소를 그렸다.
“아니면 여기 갇혀서 연기 다 들이마시고 죽든가.”
“이 미친 새끼!”
장서연은 고천수가 덮고 있던 이불을 가져와 유기성에게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콜록콜록!”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장서연은 구석에 있던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욕실.
다행히 수도꼭지에 연결된 기다란 고무 호스가 있었다. 장서연은 물을 틀고 호스를 들어 유기성에게 달려갔다.
촤아아악.
물줄기가 유기성에게 닿았다. 그러자 불길이 조금 잦아들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하지만 내부 공기는 심하게 안 좋아졌다. 장서연은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끄으으으으.”
잔뜩 불에 그은 유기성이 크게 신음을 흘렸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할 고통일 터.
툭.
하지만 유기성은 그런 고통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않는 듯했다. 불에 타 결속이 약해진 매듭을 끊어내고 장서연에게 달려들었다.
“풀었다!”
유기성은 괴상한 웃음을 뱉으며 장서연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가 놓친 고무 호스가 뱀처럼 몸을 꼬며 이리저리 휘날렸다.
“풀었다, 풀었다!”
“이, 이 새끼!”
당황한 탓에 장서연은 뒤로 넘어져 버렸다.
“끅!”
“너도 풀어 봐! 어디 한번 풀어 보라고!”
퍽!
장서연이 무릎으로 유기성의 고간을 쳐 버렸다.
“꺼져, 이 미친놈아……!”
유기성이 반사적으로 손을 놓고 몸을 움츠러뜨리는 사이, 장서연은 기어서 일어나 비틀거렸다.
“헉, 헉.”
숨이 가쁜데 들이마시는 공기의 질은 좋지 않았다. 눈앞이 흐렸다. 장서연은 고천수를 쳐다보았다.
“고, 고천수.”
이대로는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장서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유기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짠!”
유기성이 연기를 뚫고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 찾았어?”
유기성은 어느새 방독면 하나를 착용하고 있었다. 장서연은 칼로 옆구리를 찔린 듯, 사색이 되어 버렸다.
“너, 그건 어디서 났…….”
“그게 중요한가?”
유기성은 당황스러워하는 장서연을 붙잡아 찬장 쪽으로 밀쳤다.
“난 살았고, 넌 죽을 거라는 게 문제지.”
“컥.”
유기성이 장서연의 목을 붙잡아 밀어붙였다. 가뜩이나 숨쉬기가 어려웠던 장서연은 고통스러워하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텅!
손에 잡힌 것은 통조림통이었다. 미끈대는 통조림통을 집어 던지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뜨리는 장서연을 보며 유기성이 비웃듯 말했다.
“일용할 양식을 그렇게 대해서야 쓰나. 뭐, 그래도 너희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끄, 끄윽.”
“안 그래도 비료가 필요하던 참이었거든.”
비료? 장서연이 인상을 더욱 찌푸리자, 유기성이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래, 비료. 내가 기르는 나무들을 괴롭혀 놓고 그냥 가면 안 되지.”
“미친 새끼야……!”
장서연은 유기성의 새끼손가락을 붙잡아 꺾었다. 하지만 유기성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장서연을 놓치지 않았다.
“나, 통각이 좀 죽었나 봐. 하긴 좀 타 버렸으니까.”
유기성은 장서연의 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 다 타 버렸으면 나도 비료로 써 줬겠지. 응. 할아버지가 분명 그렇게 써 줬을 거야.”
“고, 고천수!”
장서연은 의식이 날아가려는 것을 겨우 붙잡으며 외쳤다. 게다가 방금 통조림통까지 만졌다. 이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네가 만진 게 뭔지 궁금하지? 엽독. 걱정 마, 죽지는 않아. 피부로 천천히 흡수되는 수면제라고 보면 돼. 일반 성인이면 해 뜨고도 반나절은 잘 거야.”
“끄윽.”
“그러니까 그냥 자. 물론 엽독이 흡수되기도 전에 죽겠지만.”
방독면 안쪽으로 유기성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퍼졌다. 장서연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상대가 너무 나빴다. 정정당당하게 싸웠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건만.
‘젠, 장…….’
장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응?’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일순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후우웅.
연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응?”
유기성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바로 그 남자가 있었다.
“아, 시원하네.”
무너지기 직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출입구를 개방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고천수였다.
“역시 안보다는 바깥이 좋아. 그치?”
그러면서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는 고천수를 보며 유기성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고천수.”
고천수는 씨익 미소를 그리더니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와사삭.
그가 내려오자 사다리가 쪼개지며 무너져 내렸다.
“아, 괜찮아. 문 열었으니까 저 정도는 점프해서 올라갈 수 있어.”
“너 뭐냐고!”
여유롭게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고천수를 보며 유기성이 소리쳤다.
“어떻게 일어난 거야? 엽독이 흡수됐을 텐데!”
“아 그거 독이었냐. 시발, 더 강했으면 진짜 죽을 뻔했네.”
고천수는 갑자기 미소를 지우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내 몸에다가 지랄한 값은 받아야겠는데, 괜찮지?”
“무슨…….”
유기성은 말을 채 다 잇지 못했다. 고천수가 손목을 붙잡아 돌려 버렸던 것이다.
“헉? 끄, 끄아악!”
몸이 불에 타 통각이 좀 죽긴 했다. 하지만 관절을 통째로 돌려 버린 것까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신경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끄악! 끄아악!”
유기성은 장서연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고천수는 그런 유기성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쿵!
벽에 몸을 부딪친 유기성이 갈 곳 없이 고천수의 힘에 짓눌렸다.
“놔! 놔아!”
유기성은 멀쩡한 다른 손으로 고천수의 얼굴을 치려고 했다.
꾸득!
“아냐 아냐, 얼굴은 안 돼.”
고천수는 그 주먹도 붙잡아 돌려 버렸다.
“꺽?”
유기성이 놀란 얼굴로 주춤댔다. 고천수는 유기성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야, 많이 탔네. 몰골이 벌써 박살났어.”
“끄, 꺽.”
“그러니까 심보를 곱게 썼어야지. 도와줄 거면 진심으로 좀 도와주고.”
때 아닌 훈계를 받은 유기성은 고통에 침을 흘리다가 고천수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대체 어떻게…….”
그러자 고천수는 유기성을 비웃듯이 말했다.
“난 남하고 신체가 좀 달라서, 회복 속도도 훨씬 빠르거든.”
“허, 헛소리를…….”
턱.
고천수는 유기성의 방독면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이제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