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잡목을 기르는 사람들 (4)
“그런데 여기는 혼자서 지내는 곳인가요?”
고천수가 바로 질문하자 유기성이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네, 맞아요. 혼자 지내기엔 좀 큰데 두 분을 찾은 거죠.”
“그런가요.”
“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유기성은 아까의 위기 상황이 떠올랐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두 분을 발견했을 때는 녀석들이 워낙 많이 몰려 있었으니까요. 못 도와드릴 뻔했어요.”
“그 점은 다시 한 번 감사드릴게요.”
진심이었다. 이 남자가 없었다면 고천수는 정말로 생명이 위험했으니까.
‘하지만…….’
고천수는 유기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지금 묻지는 않았다.
“고천수. 나 물 좀.”
그사이 장서연이 고천수에게 다가왔다. 고천수는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앞으로 내렸다.
“아, 잠시만요.”
유기성은 찬장으로 가 물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이거 드세요. 가지고 있는 거 마시지 말고.”
“아뇨, 괜찮습니다.”
고천수는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장서연에게 내밀며 말했다.
“도와주셨는데 그런 것까지 다 달라고 할 수는 없죠.”
“뭐, 그렇긴 하지.”
장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천수에게서 물병을 받아들었다.
“괜히 남의 집 와서 다 얻어먹으면 좀 그럴 테니까.”
꿀꺽꿀꺽.
그렇게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는 장서연을 보다가, 고천수는 유기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시죠, 유기성 씨? 저희는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
“네? 아, 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기성은 순간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분들이라 다행이네요. 그래도 혹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유기성은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식량 같은 건 충분하니까요.”
“감사합니다.”
고천수는 고마움을 전하며 지하실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럼 저는 여기서 잠시 쉬겠습니다. 위가 잠잠해지면 나가도록 하죠.”
딱딱하게 구는 고천수의 행동을 보며 장서연은 조심조심 옆으로 와 함께 쭈그려 앉았다.
“야, 역시 좀 걸리는 게 있는 거야?”
장서연이 속삭이듯 묻자 고천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 그러는 거예요.”
갑자기 나타나 쫓기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다니, 그것만으로 무척이나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더 빚을 질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이유에서.
-천수야, 이불이라도 달라고 해.
-맞아, 아침까지는 있어야 할걸?
-엔티가 햇볕에 약했던가?
시청자들의 대화를 보며 몇 가지 사항을 유추할 수 있었던 고천수가 유기성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위에 있는 녀석들은 언제쯤 잠잠해집니까?”
“아, 그것들이요.”
유기성은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내일 아침은 되어야 얌전해질 거예요. 햇빛을 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식물처럼 박혀 있더라고요.”
“그런가요.”
“네, 그러니까 나가실 거면 아침에 가세요. 물론 더 머무르셔도 좋고요.”
유기성은 그러면서 한편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침대 사용하셔도 돼요. 저는 잘 곳이 또 있거든요.”
책장 뒤에 매트가 있는 게 보였다. 유기성의 친절에 장서연이 입을 열었다.
“너무 감사하네요. 덕분에 살았는데 편한 자리까지 내어주시고요.”
“아닙니다. 진짜 저는 사람들 구해낸 것만 해도 너무 기분이 좋아요. 계시고 싶을 때까지 계시다 가세요.”
그 말에 장서연이 고천수에게 물었다.
“야, 나 침대 써도 되냐.”
“예, 마음껏 쓰십쇼.”
“후. 고마워.”
장서연은 비틀비틀 몸을 이끌고 침대로 걸어갔다.
‘잘하네. 그렇게 계속 의심 없는 척 해 주라고.’
고천수는 벽에 몸을 기대면서 살짝 눈을 감았다.
‘왠지 금방 귀찮아질 것 같으니까.’
***
부스럭.
얼마나 지났을까,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던 고천수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몸을 흠칫했다.
‘…….’
얼마 보이지 않는 좁은 시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천수 뚝배기 깨려는 거 아님?
-조심해!
순식간에 경고성 채팅이 가득 찼다. 고천수는 곧장 눈꺼풀을 활짝 열었다.
“……!”
그러자 다가오던 유기성이 놀라며 움찔거렸다.
“아, 아유, 깜짝이야.”
“뭡니까?”
고천수는 주춤대는 유기성을 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유기성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가리켰다.
“이, 이거 드리려고요.”
그건 다름 아닌 이불이었다. 유기성이 맨 바닥에 있는 손님을 위해 이불을 건네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고천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인성.ㅋㅋㅋ
-거동이 수상하다면 당연히 이불을 주려는 행동이지!
시청자들의 반응 때문에 당했다.
‘진짜로 뚝배기로 깨러 오는 줄 알았네.’
품안에 단검과 손도끼도 숨기고 있었다. 정말로 유기성이 공격하려고 했다면 그대로 박살을 내 버렸을 것이었다.
“받으세요.”
유기성은 이불을 건네준 뒤 책장 뒤에서 매트도 하나 꺼내 왔다.
“바닥이 많이 딱딱할 테니까, 이거 깔고 누우시고요.”
“네, 뭐. 감사합니다.”
상당히 호의적인 모습이었다. 딱히 할 말은 없었기에 고천수는 매트를 깔고 그 위에 이불을 가지고 누웠다.
‘겁나 나른하네.’
잠깐 누워 있자 고천수는 저절로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민철이는 어떻게 됐을까.’
양민철은 어린 나이긴 하지만 생존 능력이 결코 낮지 않았다. 그러니 죽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 여기기로 했다.
-천수야, 자지 마.
살짝 곯아떨어질 뻔했더니 시청자의 채팅이 올라왔다. 고천수는 입 밖으로 살짝 흐른 침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저 안 잡니다, 형님들.”
뒤척.
고천수는 몰래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잠기운을 날려 보냈다.
‘하. 자기 혼자 잘도 자네.’
침대 쪽을 돌아보자니 장서연은 이미 기절해 버린 상태였다. 누적돼 있던 피로가 엄청났던 걸까.
이해는 되지만 고천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군 안 자고 싶냐고.’
매트리스와 이불의 조합은 너무 무시무시했다. 고천수는 유기성이 다른 매트리스를 꺼내 와 잠에 들 때까지 계속 자신의 몸을 꼬집으며 버텼다.
‘후.’
모두 잠들었다고 판단한 고천수는 이불에서 나와 몸을 일으켰다.
“형님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는 안심하고 잘 수 없었다. 유기성을 묶어 두든지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의심이 많네, 천수.
“의심이 적으면 살아남지도 못했죠.”
유기성은 엔티들이 밤에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지하실에서 빠져나와 굳이 위험을 자처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하는 놈인지는 알아봐야겠어.’
일단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지하실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자니 화장실과 샤워실이 나왔다.
‘CCTV실 같은 건 일단 없는 것 같고.’
그럼 대체 왜 바깥에 나왔던 걸까.
고천수는 고민에 잠기다가 벽 쪽에 있는 찬장을 돌아보았다. 통조림통 같은 게 잔뜩 늘어서있었다.
‘많이도 모아 놨네.’
고천수는 같은 브랜드 제품의 통조림통 몇 개를 집어 들었다. 보관을 어떻게 한 것인지 겉면이 심하게 미끈거렸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통조림통들의 뚜껑을 살폈다.
‘……이 새끼.’
통조림통의 뚜껑 디자인이 미묘하게 달랐다. 열려 있던 걸 다른 뚜껑을 구해 밀봉기로 닫았을 가능성이 보였다.
-의심할 만했네.
-미리 때려눕히는 게 낫나?
고천수는 누워 있는 유기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른 체구의 남성. 그다지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천수는 유기성의 위에 올라타 팔을 꺾었다.
“으, 억?”
유기성이 놀라며 일어나더니 크게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뭐 하긴요. 그쪽이야말로 뭐 하는 겁니까.”
몸을 붙잡은 순간 고천수는 확신했다. 유기성도 진짜 잔 게 아니라 잔 척을 했다는 것을.
“눈치 봐서 저희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했습니까? 왜 깨어 있는 겁니까.”
“아, 아니, 잠깐……!”
유기성은 몸을 돌려서 고천수의 구속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고천수의 완력은 힘없는 체격을 가진 유기성이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끄악!”
손목을 비틀린 유기성이 또 한 번 비명을 내뱉자 장서연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음, 자 버렸네.”
“장서연 씨.”
고천수는 나지막이 그녀에게 요청했다.
“거기에 있는 침대보라도 가져오세요. 이 사람 좀 묶게.”
“응? 뭘 묶……. 헉!”
장서연은 놀란 눈으로 고천수에게 소리쳤다.
“뭐야! 결국 일 터진 거네! 그렇지?”
“아니, 그렇게 경계했으면서 곯아떨어진 겁니까?”
“어차피 네가 안 잘 거 알았으니까 그랬지!”
장서연은 침대보를 꼬아 동아줄처럼 만들어서 가져왔다.
“자! 얼른 써!”
대답은 생략했다. 고천수는 바로 침대보를 받아 유기성을 묶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뭐 하는 거냐고요! 지금 실수하는 겁니다!”
“실수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반발하는 유기성을 꽁꽁 동여 메며,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마음 놓고 자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서요.”
“아니, 무슨……!”
유기성의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유기성을 완전히 결박한 고천수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이제야 잘 만하겠네.”
-묶은 김에 사다리에도 묶어 두셈. 아무데도 못 가게.
좋은 의견이었다. 고천수는 이불을 들고 유기성을 끌고 가 출입구에서 뻗어 내려와 있는 사다리에 묶어 버렸다.
“이봐요!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저는 당신들을 도와줬잖아요!”
유기성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고래고래 소리쳤다. 고천수는 유기성의 턱을 붙잡으며 말했다.
“조용히 하세요. 입도 막아 드릴까요?”
“……!”
“사과할게요. 오늘밤만 좀 이러고 있어 주세요. 어차피 저희 나가면 다시 편안한 침대 위에서 쉬시면 되잖아요?”
고천수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내지르다가 자신의 매트리스로 돌아갔다.
“그럼 굿나잇하시고요. 아침에 뵙죠.”
그렇게 말한 고천수는 곧 눈을 감고 매트리스 위에 쫙 늘어졌다.
유기성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다가 장서연을 돌아봤다.
그녀 역시 아직 일이 터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풀어 주지는 않았다.
“저기요!”
유기성이 장서연에게 외쳤다.
“저 좀 풀어 주시죠!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에요!”
“어…….”
아직 무슨 일이 터진 게 아니면 심한 짓을 한 거긴 했다.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장서연은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침대로 돌아갔다.
“저기요!”
“죄송합니다~.”
유기성의 외침에 장서연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밤만 좀 부탁드릴게요.”
이미 묶어 버렸으니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 장서연은 손짓으로 대강 유감을 표시하다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
침대보도 없었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곯아떨어졌다. 고천수 덕분에 이젠 진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유기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장서연과 고천수를 돌아보다가 탄식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부탁, 같은 소리 하네…….”
***
우우웅.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장서연은 퍼뜩 눈을 떴다.
“뭐, 뭐야.”
놀라며 일으키는 몸이 제법 개운했다. 장서연은 자신이 꽤나 오래 잤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우웅.
소리는 누워 있는 고천수에게서 나고 있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깊게 자고 있는지 그 진동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스럭.
반응을 보인 건 오히려 기둥에 묶여 있던 유기성 쪽이었다.
“저기요.”
초췌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어 올린 유기성이 말했다.
“일어나셨으면 이것 좀 풀어 주시죠.”
그는 곧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묶여 있느라고 한숨도 제대로 못 잤어요. 구해 준 사람한테 이게 할 짓입니까?”
“아…….”
장서연은 호쾌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요. 저희만 실컷 자 버렸네요.”
하지만 의심스러웠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장서연은 고천수와 상의 없이 그를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일을 택했다.
침대에서 벗어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았다.
“음.”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쿵쿵하고 출입문을 짓밟는 존재는 이제 위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
“야, 고천수.”
장서연은 아래로 내려와 고천수를 흔들었다.
“일어나 봐. 이제 밖으로 나가도 될 것 같…….”
그러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천수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