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잡목을 기르는 사람들 (3)
하지만 문제는 아침이 되기도 전에 터졌다.
‘뭔가…… 이상한데.’
양민철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졸음기에 침대보를 틀어쥐었다.
‘뭐지, 이거.’
피곤해서 잠이 드는 거라고 하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웠다. 양민철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지금 잠을 자면 위험할 듯싶었다.
“왜 그러나? 앓는 소리를 좀 내는 것 같은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민철은 겨우 몸을 돌려서 노인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몸이…… 이상해요.”
“몸이?”
노인은 여전히 매트에 누운 채로 양민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이상한 건가?”
“네. 너무 졸려요.”
짧게 대답하면서 양민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한 건 자신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의 태도도 뭔가 미묘했다.
“졸리면 자면 되는 거 아닌가? 편하게 자게.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그렇게 졸린 게 아니에요. 뭔가가 억지로 눈을 감기는 것 같아요.”
설명해 줬는데도 노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양민철은 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서, 설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잘도 버티는구먼.”
노인은 매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버티지 말고 자는 게 좋을 텐데. 아침까지 푹 자면, 모든 게 끝나 있을 텐데 말이야.”
“뭘 끝낸다는 거죠?”
“회복이 끝나 있을 거라고.”
노인은 짐짓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피로감도 싹 날아가 있을 거고.”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양민철의 물음에 노인은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무슨 짓을 하긴.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네. 구해 준 게 전부일 뿐인데?”
“무슨 짓을 하지 않았으면, 제가 이럴 리가 없잖아요.”
“그거야 자네가 저걸 만져서겠지.”
노인은 통조림을 가리켰다.
“겉면에 뭐가 발라져 있지 않았나?”
“겉에 뭐가……!”
“엽독.”
노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가 봤던 괴물들의 잎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독이지.”
“독……!”
“걱정 말게. 그래 봤자 수면제 정도일 뿐이야. 피부에도 잘 흡수되는.”
양민철은 이제 더 이상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콰당탕!
억지로 일어나려던 양민철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노인은 그런 양민철의 곁으로 다가와 그윽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다칠 수도 있네.”
양민철은 그런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친절한 말투였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불온한 기운이 느껴졌다.
“읏차.”
노인은 양민철을 부축해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다시 인사를 해 주겠네.”
“망할…….”
양민철은 이를 악물고 눈꺼풀이 감기는 걸 참아냈다. 고천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이 장소에 위험한 인간이 있다고, 전해야만 했다.
“그럼 아침에 보세나.”
하지만 그 말을 듣는 것을 끝으로, 양민철의 시야는 그대로 암전돼 버렸다.
***
그 시각, 수목원의 어느 구석.
“미치겠네.”
고천수는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엔티들을 보며 탄식하고 있었다.
“많아도 너무 많잖아…….”
이 수목원에 있는 대다수의 나무들이 엔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고천수는 옆에 있는 장서연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다친 거 같은데.”
함께 도망치다가 바닥에 넘어졌던 장서연은 K2를 잃어버리고 팔을 붙잡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보다 우리 빠져나갈 수 있어?”
장서연의 물음에 고천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잊고 있던 손전등을 꺼내 길을 찾아 보려고 했지만 딱히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이런 데서 발목 잡히네.
-그러게 내가 불안하다고 했지.
-천수야, 주변에 도끼라도 없는지 찾아 봐.
시청자들도 이 상황에서는 딱히 해 줄 수 있는 조언이 없는 듯했다.
“형님들, 곰 인형 잔뜩 보일 거라면서요.”
뭐라도 보여야 살아날 희망이라도 얻지 않겠는가.
“기껏 거기서 빠져나왔는데, 형님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ㅋㅋㅋㅋ
-또또 시청자 탓.
“망할.”
가까이 다가오는 엔티들을 보며 고천수는 장서연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장서연 씨, 계속 이동해야 해요. 시간 없으니까.”
“어, 어.”
장서연은 고통 때문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고천수를 따라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르르르르.
그때였다. 바로 옆까지 다가온 엔티에게 손전등을 향한 고천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
곰 인형이 있었다. 그것도 엔티의 줄기에 타 있는 상태였다.
“뭐야, 저거……. 온리베어?”
온리베어는 고천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했다.
“고천수?”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고천수를 보며 장서연이 닦달했다.
“뭐 해! 빨리 가야지!”
“잠시만요.”
고천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여기를 못 빠져나가.’
사방이 죄다 몬스터인데 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양민철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혼자라도 잘 살아 있으면 다행이었다.
“장서연 씨, 이쪽으로 가죠.”
일단은 온리베어를 따라간다. 고천수는 냅다 온리베어가 탄 엔티 하나를 쫓아갔다.
장서연은 고천수의 행동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딴죽 거는 일 없이 재빨리 뒤를 따랐다. 서로 간에 그 정도의 신뢰는 이미 충분하게 쌓였으니까.
‘내렸다!’
엔티를 타고 가던 온리베어가 아래로 뛰어내린 것을 보고 고천수가 탄식했다.
온리베어는 그런 고천수를 의식하듯 돌아보고는 어딘가로 뒤뚱뒤뚱 뛰어갔다.
“장서연 씨! 알아서 따라와 주세요!”
고천수는 온리베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온리베어를 놓칠 수는 없었다.
몇 분쯤 뛰었더니 고천수는 온리베어가 앞에 멈춰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찾았다……!”
고천수는 온리베어가 서 있는 자리에 놓인 초록색 상자를 발견했다.
보급함이었다.
고천수가 바로 그쪽으로 다가가자 온리베어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젠은 지금 37개……!’
처음 보급함을 열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금액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발견한 이 보급함이 줄 아이템은…….
“어?”
고천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보급함에 나와 있는 표식은 무기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보급함을 여는 데 필요한 젠의 개수를 보자마자 고천수는 정신이 멍해졌다.
-72젠.ㅋㅋㅋㅋㅋㅋ
-조졌다.
-천수 어떻게 하냐.
“뭐예요……?”
고천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72젠짜리 보급함이 나타나다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왜 72젠짜리가 있어요?”
고천수의 물음에 채팅창이 ‘ㅋㅋㅋㅋ’으로 가득 찼다. 죄다 웃을 뿐 제대로 답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뭐냐고요!”
보급함은 유료였다. 젠을 들고 있는 만큼 보이는…….
“아.”
고천수는 순간 탄식했다.
“아, 시발.”
젠을 들고 있으면 보인다고 했지, 딱 들고 있는 젠만큼의 가격으로 보급함이 나타난다고는 안 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고천수는 머리를 쥐어 잡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
“고천수!”
쫓아온 장서연이 고천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주저앉아서 뭐 해!”
그녀는 보급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고천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장서연을 돌아봤다.
“아니, 여기 이게…… 젠이……!”
“야야! 정신 차려!”
장서연이 고천수의 뺨을 양손으로 두드렸다.
“뭐 하나 했더니 정신 놓았던 거야? 빨리 일어나! 얼른!”
그녀는 고천수의 팔을 잡아끌어서 일으켰다.
“뭘 봤든 간에 나중에 찾아! 그러면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보급함의 위치는 확인했다. 열기 전까지 발견한 게 없어지지만 않는다면, 나중에 찾아도 될 일이었다.
“됐지? 가자!”
이미 주변에 엔티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그러자 장서연이 고천수를 힘차게 끌고 갔다.
“도망가자고! 서둘러!”
장서연은 이런 상황에서도 엄청나게 적극적이었다. 이번엔 자기가 길을 이끌어 주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활로를 찾아 뛰었던 것이다.
‘이제 어쩐다.’
그녀 덕분에 정신을 차린 고천수는 다음 수단을 강구했다.
‘어떻게든 어그로를 끌어 볼까?’
현재 고천수의 신체 능력은 누적 스킬에 의해 1.9가 돼 있었다. 즉, 맨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할 때보다 2배에 가깝게 더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지금 더 어그로를 끈다면 엔티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냐.’
그러기엔 엔티의 갑주가 너무 단단했다. 어그로가 어느 정도나 필요할지 몰랐다. 게다가 괜히 접촉해서 어그로를 끌어 보려다가 줄기에 몸이 꿰뚫리기라도 하면, 신체 능력이고 나발이고 생존하기 어려웠다.
안전하게 엔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불. 역시 그게 필요했다.
촤아아아아아.
그때였다.
불 대신 물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나타난 물줄기가 엔티들을 덮쳤다.
그라아아아아아.
물줄기에 얻어맞은 엔티들이 방향을 바꿔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고천수가 눈썹을 움찔거리는 사이 근처에 있던 스프링클러도 켜졌다.
각종 살수기(撒水器)가 물을 뿌려 대자 엔티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사방을 서성였다.
“여기!”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왔다. 고천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야, 여기!”
웬 마른 남자가 기다란 호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고천수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도와줄게! 이쪽으로 와!”
이런 곳에 사람이?
고천수가 물음표를 그리는 사이, 장서연이 팔을 잡아끌었다.
“고천수! 저쪽으로 가자!”
고천수는 모르는 사람이라서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곧 결심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여기서 더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빨리빨리!”
남자는 더 크게 손짓하다가 호스를 땅에 내려놓고 뛰기 시작했다. 고천수와 장서연은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여기야!”
남자는 지면에 있는 커다란 문을 하나 열어젖혔다. 거기에는 사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얼른 내려가!”
고천수는 남자의 외침에도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고천수! 빨리 가자!”
장서연만 지체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고천수는 남자에게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예? 제가 문 닫고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아뇨, 도와주셨는데 그럴 수는 없죠.”
고천수는 남자를 문 안쪽으로 떠밀었다.
“아, 아니, 잠깐, 무슨 힘이……!”
남자는 고천수의 완력에 이기지 못하고 발을 뗐다.
“아, 알았습니다! 먼저 들어갈게요!”
그렇게 남자는 먼저 사다리를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고천수는 그제야 같이 사다리를 타고 문을 닫았다.
쿵쿵쿵.
문 위로 엔티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후.”
바닥에 먼저 내려선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살았네요. 진짜 위험했어요, 두 분.”
천천히 사다리를 다 타고 내려온 고천수는 대답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공호.
그렇게 생각이 될 정도로 잘 정돈된 지하실이었다. 전구 몇 개에 불이 들어와 있고, 벽 주변은 책장과 서랍으로 가득했다. 한편에는 침대도 놓여 있었다.
‘화장실도 있는 건가?’
문이 하나 더 있는 걸 보니 추가 시설도 있을 거라 고려해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 저기.”
고천수가 마냥 주변만 보고 있으려니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저희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둘러볼 시간은 충분히 있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천수는 답하지 않고 장서연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장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먼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저부터 인사할까요? 장서연이라고 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하긴요. 저도 구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아, 제 이름은 유기성이에요.”
유기성이 손을 뻗자 장서연이 맞잡고 흔들어 주었다.
제법 화기애애했지만 고천수는 약간 딱딱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예, 저는 뭐, 고천수라고 합니다.”
“아, 고천수 씨.”
유기성은 이질적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