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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42화 (42/224)

042. 잡목을 기르는 사람들 (2)

물줄기는 곧 엔티들을 덮쳤다.

촤아아아아!

한순간에 물벼락을 맞은 엔티들이 갑자기 달리기를 멈췄다. 그리고 다시 느릿하게 걸으며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뭐, 뭐지?”

양민철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소방 호스를 붙잡은 채로 이쪽에 물벼락을 선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뭐 하고 있나! 얼른 이쪽으로 오게!”

그제야 양민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을 도와줬다. 서둘러 몸을 일으켜 누군가에게 뛰어갔다.

“곧 터질 테니 조심하게!”

그 누군가란 하얀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 노인이었다. 그가 호스를 잠그는 순간, 물세례를 얻어맞고 있었던 엔티들이 한꺼번에 터져 버렸다.

콰콰과광!

“큭?”

나무 조각이 사정없이 날아오는 바람에 양민철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노인이 양민철의 팔을 잡아끌었다.

“얼른 도망쳐야 돼! 서두르게!”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양민철은 노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근데 저, 일행이……!”

“일행은 무슨!”

노인은 양민철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 몰려오는 녀석들이 안 보이는가?”

어느새 엔티들의 수는 폭증해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서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금, 녀석들의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쪽! 이쪽이야!”

노인이 인도하는 길은 양민철이 외우고 있지 않았던 경로였다.

“어서!”

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양민철은 혹시라도 고천수가 보일까 봐 계속 주변을 힐끔대면서도 결국에는 노인을 따라 움직였다.

덜컹!

그가 양민철을 데려간 곳은 풀숲 사이에 있는 지하 창고였다. 입구는 마치 맨홀처럼, 그냥 지면에 만들어져 있었다.

“내려가! 빨리!”

양민철은 거의 떠밀리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컥?”

높이가 좀 있었다. 바닥에 몸을 부딪친 양민철이 신음하는 사이 노인은 문을 닫고 사다리를 타서 내려왔다.

“괜찮나?”

노인이 양민철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뇨…….”

양민철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엄청 아픈데요.”

“그래도 잡혀서 온몸이 뜯기는 것보다는 나을 걸세!”

노인은 양민철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대로 데려가서 앉혔다.

“여기는……?”

양민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마치 방공호 같았다. 내부 구성은 단출해서 침대와 책장 몇 개가 전부였다. 배터리에 연결해 놓은 전구에서는 불도 들어왔다.

주변에 통조림과 과자들이 잔뜩 쌓여 있는 광경은, 근처 편의점을 누가 털어 갔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여긴 내가 사는 곳이지. 세상이 망해 버리기 전부터 꾸며 놨던 곳이야.”

노인은 마치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듯 말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덕분에 살았지. 근데 자네는…….”

노인은 의문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대체 어디서 온 건가? 그거 교복인 것 같은데. 자네 이름도 적혀 있고.”

“아, 이거요.”

양민철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예. 학생이기는 해요. 사실 이젠 별 의미는 없겠지만.”

“자네도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데?”

양민철의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가리지 못하는 흔적에 양민철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네, 뭐. 아시다시피 밖은 장난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던 양민철은 갑자기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천수 형! 큭……!”

아직 추락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몸을 감싸 안은 채 다시 주저앉는 양민철을 보며 노인이 급하게 외쳤다.

“이보게! 무리하지 말게!”

어차피 밖엔 녀석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노인은 양민철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누구랑 같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해! 저 녀석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이상 끝장이니까!”

“저, 저는 구해야 해요. 저랑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이란 말이에요.”

“아서라니깐!”

노인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정 구하고 싶으면 해가 떴을 때 나가! 그때는 괜찮으니까!”

“해가, 떴을 때……?”

“그래! 해가 뜨면 괜찮아진다고!”

노인은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가 뜨면 저 녀석들은 다시 뿌리를 땅에 박고 활동을 멈춰. 그러니까 참아.”

“하지만…….”

“네 일행도 같이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 아니더냐?”

거기에는 바로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었다.

양민철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래, 그러면 아침까지 어디든 숨어 있겠지. 해가 밝으면 나가서 찾아. 지금 나가면 개죽음당할 뿐이야.”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양민철은 한숨을 쉬며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알겠어요. 기다려 볼게요. 지금은 위험한 것 같으니까.”

“그래, 잘 생각했네.”

양민철의 어깨를 두드려 준 노인이 통조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 배고프면 얘기하게. 내가 뭐든 챙겨 줄 테니까.”

쿵.

그때, 천장에 있는 출입문에서 울림이 있었다.

쿵쿵.

엔티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분명했다.

양민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이거 괜찮은 거예요?”

소리만 들어봐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문을 뚫고 들어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괜찮네.”

그런데도 노인은 여유롭게 말했다.

“그 녀석들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모르거든.”

“모른다고요?”

“그래, 자네도 대충 눈치 채지 않았나? 녀석들은 눈과 귀가 없다는 걸. 보통은 그냥 내키는 대로 다닐 뿐이야.”

그 말은 지금도 우연히 위를 지나고 있을 뿐이란 얘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녀석들은 지면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아.”

노인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밤에는 항상 지면 위로만 다니더라고. 해가 뜨면 보통의 나무처럼 땅에 뿌리를 박고 광합성이나 하고 말이야.”

“그럼 지금은…….”

“그래, 우린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에 있는 거지.”

노인은 황도 통조림과 물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자.”

온화한 미소를 지은 그는 통조림과 물을 건네며 말했다.

“배고플 텐데 하나 들도록 해.”

엄청난 호의였다. 양민철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줬으니 상대를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왜 그러나? 통조림 따개랑 숟가락이라면 침대 머리맡에 있네. 마음대로 써.”

“그것 때문은 아니고요.”

양민철은 한숨을 쉬었다.

“제 일행들이 아침까지 살아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걱정 말게!”

노인은 한 번 더 미소를 그려 보였다.

“만약에 혼자 남게 된다면 내가 돌봐줄 테니까. 안 그래도 혼자라서 아주 적적했거든. 자네가 와서 정말 다행이야.”

“…….”

양민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인은 친히 통조림을 따서 숟가락과 함께 건네주었다.

“자, 일단 먹어 봐. 이럴 때야말로 뭘 먹어 두는 게 좋아. 안 그러면 언제 끼니를 챙겨 먹겠어.”

맞는 말이었다. 여태 긴장한 상태로 움직이느라 뭘 제대로 먹질 못했다. 양민철은 숟가락과 통조림을 받아들었다.

“그럼…….”

꿀꺽.

한 입을 대자마자 황도 복숭아 하나가 입을 타고 자연스럽게 목을 넘어갔다.

그 느낌은 분명히,

“맛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양민철은 황도를 허겁지겁 퍼 먹었다.

“허허, 천천히 먹게. 내가 복숭아 통조림은 잔뜩 챙겨 놨으니까 말이야.”

꿀꺽꿀꺽.

거의 마시듯이 황도를 밀어 넣은 양민철은 물병도 열어서 빠르게 들이켰다.

“파하.”

그러고 나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자니 노인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를 흘렸다.

“어린 나이에 고생을 좀 많이 해 버렸고만. 그렇게 정신없이 먹고.”

그러더니 노인은 양민철이 메고 있는 배낭을 가리켰다.

“혹시 거기에는 뭐가 들었는지 물어도 되나?”

“아, 이건…….”

양민철은 고천수의 짐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이쪽도 먹을거리가 안에 들어 있었다.

“걱정 말게. 가지고 있는 걸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비어 있으면 채워 줄 수 있다네.”

“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양민철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도와주기만 한 사람한테 잠깐이나마 의심의 눈길을 보내다니, 자신도 참 못됐다 싶었다.

“그런데 자네는 진짜 어디서 온 건가? 정문 쪽에서 온 건가?”

같이 침대 옆에 앉은 노인이 양민철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뇨, 저는 후문 쪽에서 왔습니다.”

대답 못 해 줄 것도 없었기에 양민철은 바로 답해 줬다.

“그랬군. 그럼 혹시 기차라도 타고 왔던 건가…….”

“아, 네. 어떻게 아셨나요?”

“그게 아니고야 거기로 지금 사람이 들어올 일이 없을 테니까. 근데 왜 대전역으로는 가지 않고?”

“그건…….”

양민철은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제가 타고 있던 기차가 고장 나서요. 다들 급하게 내려서 이쪽으로 왔어요.”

“그랬구먼.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해가 지는데 이런 곳으로 올 이유는 없었겠지.”

노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데 그럼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많은 건가? 얼마나 들어왔는지 궁금해서.”

“아뇨, 많지는 않아요. 저 포함해서 셋밖에 안 돼요.”

그러자 노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그럼 살아남기는 힘든 인원이겠구먼.”

“아, 뭐. 그렇죠…….”

“자네라도 살았으니 일단 푹 쉬게.”

노인은 책장 뒤에서 매트를 하나 꺼내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사람이 또 올까 해서 준비해 놨던 거지. 나는 여기서 자면 되니까 자네는 침대를 이용하게.”

“아니, 그래도 제가 이걸 쓰기엔…….”

“아니야. 괜찮아. 살았으니 이젠 마음 놓고 쉬게.”

그러더니 노인은 매트 위에 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 일은 전부 잊었다는 듯이 금세 코를 골기 시작했다.

‘대단하네…….’

양민철은 아직도 두근거림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보다 훨씬 여유로워보였다.

어떻게 보면 연륜에서 오는 관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할아버지?”

양민철이 불렀지만 노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양민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다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장의 출입문을 올려다보았다.

쿵쿵.

아직도 엔티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들어온 이상 나갈 수는 없어보였다.

‘형, 괜찮을까?’

양민철은 고천수를 만나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사실 죄다 양아치에 가까운 녀석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양민철을 구하기 위해 애쓰던 이들이었다.

고천수는 그들과 닮아 있었다. 뭔가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을 은근히 챙기는 부류였다.

그래서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하면 고천수에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랬다.

‘하.’

양민철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랍에는 많은 식량이 쌓여 있었다. 거기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

양민철은 통조림에 손을 가져갔다. 미끈거리는 무언가가 묻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깨끗한 통조림이었다.

몇 개라면 티 안 나게 가방에 집어넣을 수 있을 듯했다. 말만 하면 준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노인이 정말 그렇게 해 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아냐.’

이제 이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도와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양민철에 손에 묻은 것만 대충 닦아내고 다시 침대 위로 돌아와 누웠다.

드르렁, 컥!

그때 노인이 갑자기 몸을 들썩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구, 내 정신 좀 봐. 누웠다고 바로 잠들었나 보네.”

그러더니 양민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혹시 도망치려고 했던 건 아니지?”

“예?”

양민철은 놀라며 반문했다. 무슨 짓을 벌인 건 아니지만,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혹시나 해서.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나가면 안 되네. 이대로 나가면 위험하니까.”

“아, 네…….”

“정말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노인은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여기 데려왔던 사람은 자네만이 아니거든. 근데 항상 식량만 들고 도망치다가 죽더라고.”

“…….”

“그러니까 진짜 조심하게. 식량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제발 혼자 가다가 죽지만 말라고. 그 어린 나이에 말이야.”

양민철은 마른침을 삼키고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그래.”

나지막이 대답한 노인은 다시 매트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잘 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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