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잡목을 기르는 사람들 (1)
끼이이익.
기관차가 긴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섰다.
“도착했어.”
장서연의 말에 고천수는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록 수목원이라고 했던가?
-이름값 하긴 하네.
-초록초록.
시야가 녹색으로 가득 찼다. 이름이 아기자기해서 작은 곳이 아닐까 했던 고천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밀림 느낌인데…….”
일단 숨기에는 제격인 곳으로 보이긴 했다. 고천수는 먼저 기관차에서 내려섰다.
“형, 같이 가요.”
“나도.”
양민철과 장서연이 차례대로 뒤를 따랐다. 고천수는 그들의 무장을 살폈다. 양민철은 피 묻은 쇠파이프를, 장서연은 되돌려받은 K2 소총을 들고 있었다.
“민철아, 그거 쓸 만했었냐.”
고천수의 물음에 양민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엄청 만족한 듯.
-우리 천수도 빨리 더 좋은 무기가 필요할 텐데.
그건 맞는 말이었다. 단검만 가지고는 역시 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럼 다들 이동하죠.”
어쨌거나 이곳을 빠르게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고천수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조용하네.’
들리는 소리가 있다면 새들의 지저귐과 땅을 지르밟는 것뿐이었다. 고천수는 뒤따르는 양민철과 장서연의 기척을 느끼면서 고개를 위로 올려보았다.
주황색 햇살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시간이…….’
해가 지고 있었다. 다시 기관차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바스락.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고천수는 놀라며 멈춰 섰다.
“……뭐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고천수는 뒤에 있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불행히도 일행 또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고개를 가로젓는 둘을 보며 고천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형님들, 뭐 보신 거 있어요?”
-아니.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들었음.
-아, 난 소리만 들리는 게 젤 짜증 남.
딱히 얻을 만한 정보는 없었지만, 어쨌든 뭔가 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고천수는 불안한 느낌을 가지고 다시 일행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르르.
또다시 들린 소리에 고천수가 멈칫했다.
“아, 망할…….”
뭐가 있기는 있는데 눈에 보이질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형님들, 혹시 눈에 안 보이는 몬스터도 있습니까?”
-글쎄?
-있긴 있을 텐데 지금은 아닐걸?
뭔가 거지같은 답이 돌아왔다. 고천수는 장서연에게 물었다.
“장서연 씨. 이 수목원, 큽니까?”
“빠르게 걸으면 15분 정도면 통과할 규모이긴 할 거야.”
“그럼 좀 더 서두르죠. 해도 지고 있으니까.”
주변을 경계하며 걷기에는 해가 너무 빠르게 지고 있었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둠까지 깔려 버리면 답이 없었다.
“형, 그럼 제가 앞장설게요.”
양민철이 쇠파이프를 치켜든 채 앞으로 나왔다.
“뭐? 네가 앞장선다고?”
“네. 길 아니까요.”
양민철이 사선 방향에 있던 안내 표지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다 봤어요. 빨리 가요.”
길을 잘 찾을 때부터 범상치 않더니만 이런 쪽으로 머리 하나는 엄청나게 뛰어난 듯했다.
“좋아. 그러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양민철이 선두에 서고 고천수가 두 번째, 장서연이 그 뒤를 따랐다.
그사이 햇살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주변은 몇 분 사이에 곳곳에 그림자가 졌다.
그르르.
어디선가 들리는 괴성도 점점 늘어났다. 셋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수목원을 벗어난다고 해도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각자 그 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르르르.
“민철아!”
앞에 무언가 나타난 걸 보고 고천수가 소리쳤다.
콰작!
양민철이 그 외침을 듣고 빠르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확실한 타격. 하지만 돌아온 건 빠른 반격이었다.
그라아아아악!
“물러서!”
고천수는 양민철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무언가 줄기 같은 게 양민철이 조금 전에 있던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줄기……?”
고천수는 그제야 눈앞에 나타난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냈다.
-엔티, 인가?
-어쩐지 소리만 들린다 했다.
-이놈 리치 기니까 조심해라.
엔티.
그런 이름을 가진 건 2m 정도의 나무 몬스터였다.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엔티를 보며 고천수는 탄식했다.
“아니, 시발. 식물 몬스터라니 장난하나?”
식물이 있는 곳이면 아무데서나 튀어나올 수 있어서 고천수가 뭔 게임을 하든 제일 혐오하는 부류였다.
“야야, 비켜!”
장서연이 빠르게 튀어나오며 엔티의 몸통을 쳐 버렸다.
그아아아아아!
엔티가 크게 비틀거렸다.
팍! 파악!
“바빠 죽겠는데 빨리 죽이고 가자고!”
팍!
하지만 엔티는 기어코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줄기를 휘둘러 장서연의 목을 노렸다.
“읏!”
장서연이 개머리판을 돌려 겨우 막아내며 뒤로 비틀거렸다.
“이, 이놈이. 이야아아아!”
“기다려요!”
고천수가 장서연을 막았다.
“그냥 두고 가요! 이 엔티라는 놈들, 어차피 느려요!”
엔티는 공격 속도 하나만 빠를 뿐이었다. 나머지 움직임은 느리다는 사실을 알아챈 고천수가 장서연과 양민철을 둘 다 끌어 잡았다.
“다들 다른 쪽으로 빨리 빠져나가면 돼! 민철아, 길 안내 서둘러! 뛰어갈 거니까!”
“아, 알았어요!”
지시를 받은 양민철이 엔티를 피해 먼저 달려 나갔다. 고천수와 장서연은 곧장 뒤를 따랐다.
도중에 엔티가 몇 번 더 나타나기는 했지만 다행히 양민철의 능력은 진짜였다.
양민철은 엔티를 피해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며 일행을 이끌었다. 이대로라면 금방 수목원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다.
그아아아아아.
4m는 되는 엔티가 양민철과 나머지 두 명을 떨어뜨려놓지 않았다면 말이다.
“형!”
갑자기 사이에 끼어든 엔티를 보며 양민철이 크게 소리쳤다.
“민철아, 옆!”
고천수는 그런 양민철에게 경고했다. 양민철의 옆으로 또 다른 엔티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양민철은 그걸 뒤늦게 발견하며 사색이 되었다.
“먼저 가! 뚫고 갈 테니까!”
혼자라면 오히려 어떻게든 피해 갈 수 있을 터였다. 고천수는 양민철에게 앞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형, 근데 길을…….”
양민철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밀려드는 엔티를 피해, 결국 걸음을 옮겼다.
“형 꼭 오세요!”
길이 막혔다.
양민철이 안내하던 길은 지금 엔티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왜 어그로가 안 끌리지?’
고천수는 자신의 주변으로도 다가오는 엔티들을 보며 숨을 삼켰다.
분명히 도발 당했는데 어그로 수치가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형님들! 이거 왜 어그로가 안 끌려요?!”
-널 노리고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그렇겠지.
그 말에 고천수는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에 있는 엔티 하나를 쳐 보았다.
그아아아아!
[어그로 1 - 10:00]
그제야 어그로가 끌렸다.
“뭐야, 이거.”
쳐야 어그로가 끌리는 부류였다.
눈도 귀도 없는 몬스터가 분명했다.
“장서연 씨! 진정하세요!”
근처의 엔티들에게 계속 K2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장서연을 붙잡으며 고천수가 소리쳤다.
“치지 마세요! 치면 그쪽으로 반응해요!”
“어? 근데 자꾸 다가오잖아!”
아니었다. 잘 보면 엔티들은 아무렇게나 움직이며 줄기를 내뻗고 있었다. 당장은 특정하게 누군가를 노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잘 보세요! 누굴 노리는 게 아니에요! 닿지만 않게 주의하세요!”
그러면 바로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다.
바로 말귀를 알아들은 장서연이 숨을 크게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죠? 그럼 우리는 이쪽으로 가요.”
다만 엔티들이 워낙 빽빽하게 서 있어서 양민철이 갔던 방향으로는 여전히 갈 수 없었다.
고천수는 장서연과 함께 다른 길을 택해서 걸음을 옮겼다.
“민철아, 꼭 살아 있어라……!”
***
“헉, 헉…….”
얼마나 지났을까, 홀로 떨어진 양민철은 마구 뛰어가다가 출입구를 발견하고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헉헉, 망할.”
뒤를 돌아보니 엔티들은 느릿느릿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앞은 뚫려 있었다. 혼자라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듯했다.
“형…….”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만 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혼자서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을 자신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머릿속으로 아까 전에 보았던 약도를 떠올렸다. 고천수도 또 다른 약도를 찾아 길을 확인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형이 길을 헤매면 안 되는데.’
고천수가 막혀 있던 길을 돌아서 온다면 어느 경로를 택했을지는 대략 가늠이 됐다. 양민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들어갈까?’
먼저 피해 있으라고는 했지만, 양민철은 고천수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다.
양민철이 맡은 역할은 길 안내였다.
고천수가 부탁한 일은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도와야 돼.’
고천수가 무사했던 자신을 보고 기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양민철도 그를 위해서 이 정도의 용기 정도는 내 보고 싶었다.
양민철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단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편의점 하나가 보였다.
양민철은 곧장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있는 게…….”
없었다.
남아 있는 거라고는 술 몇 병과 담배, 라이터 같은 게 전부였다.
“충분해.”
양민철은 술과 라이터를 챙겼다.
담배도 하나 챙길까 하다가 양민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끊은 지는 좀 됐다.
“기다려요, 형.”
고천수가 생각하는 것 마냥 순하기만 한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한때 일탈했었던 경험을 떠올려 그때의 객기를 지금의 용기로 삼았다.
쫘악.
소매를 찢어낸 양민철은 수목원으로 돌아가 근처에 있던 나무에 돌돌 싸매었다.
칙!
노련한 손짓에 의해 라이터에 불이 떠올랐다.
양민철은 그걸로 나무에 불을 붙였다.
“다 뒈졌어.”
괴물이고 뭐고 몸은 나무로 돼 있었다. 필시 불에는 면역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가 보자.”
양민철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엔티에게 횃불을 대 보았다.
그아아아아악!
엔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별거 아니었어!”
양민철은 환호를 지르며 고천수를 찾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형, 조금만 기다리세요! 구하러 갈게요!”
그악!
그아아아아!
양민철이 휘두르는 횃불에 놀란 엔티들이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양민철은 거기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어디 한번 도망가 봐!”
화륵.
흥이 오른 양민철은 엔티 하나의 몸에 아예 횃불을 콱 찔러 보기까지 했다.
그아아아아아아!
타올랐다.
마치 원래부터 장작이 될 것이었던 운명처럼, 엔티는 내성 없이 순식간에 불에 휩싸였다.
“어?”
생각보다 불길이 너무 컸다. 불타는 엔티가 갑자기 빠르게 속도를 내더니 양민철의 옆을 지나쳐 바위에 몸을 부딪쳤다.
콰앙!
상당한 폭발력이었다. 크게 튄 불똥을 보고 양민철이 마른침을 삼켰다.
“뭐야?”
그아아아아아!
놀라 멈춘 양민철의 곁으로 다가왔던 다른 엔티 하나가 비틀거리다가 횃불에 잎사귀가 닿아 버렸다.
“뭐, 뭐냐고!”
화르륵.
또 하나의 엔티가 그렇게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불타는 엔티는 여지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그 진로에는 양민철이 서 있었다.
“이런……!”
양민철은 빠르게 앞으로 몸을 던졌다.
콰앙!
불타는 엔티는 그대로 양민철이 방금 있던 곳을 지나쳐 다른 곳에 몸을 처박고 성대하게 터져 버렸다.
“허억. 헉.”
놀란 양민철이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어느새 옆에 모여 있던 엔티들이 양민철이 치켜 올린 횃불에 닿아 괴성을 질러 댔다.
그아아아아아!
“아.”
순식간에 불타는 엔티가 수 마리로 늘었다. 양민철은 캠프파이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타오르는 엔티들을 보며 탄식했다.
“망했…….”
엔티들이 돌진을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양민철은 사방으로 구르다가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혀어어엉!”
주변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엔티의 실루엣뿐이었다. 양민철은 마구 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불타는 엔티 몇 마리가 하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으아! 으아아아!”
그때였다.
촤악!
어디선가 물줄기가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