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레일 위 (4)
‘이젠 내가 받은 보상들을 한번 볼까.’
바로 바깥에 나가 기관차의 난간을 붙잡은 고천수는 다음 수순에 들어갔다.
“스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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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ill
* 어그로(10분) : 자신을 노리는 몬스터가 많을수록 강해집니다. 마릿수마다 본래의 자신을 기준으로 신체 능력이 10% 추가 상승. 발동하고 나서 종료 시점까지 마릿수는 누적으로 계산됩니다.
* 기록 누적 : 종료된 최고 어그로 기록에서 해당 상승분의 10%는 기본 신체 능력으로 합산됩니다. 즉, 본래의 자신이 강화되며, 이 수치는 기록이 바뀔 때마다 경신 적용됩니다.
* 새로운주인 님의 보상 : 접촉한 대상의 시야를 10분 동안 훔쳐보기 스킬 1회. 발동 시점은 자유로움. [사용]
* 한도초과 님의 보상 : 1분 동안 성량 7배 증가 스킬 1회. 발동 시점은 자유로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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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창에는 고천수가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 스킬과 시청자들에게 받은 스킬이 한 번에 떠올랐다.
두 종류의 스킬은 스킬명으로 그 성격을 구분할 수 있었다.
보상으로 받은 스킬은 스킬명이 아예 ‘누구누구의 보상’이라고 되어 있었다.
‘돈 준 거 잊지 말라는 거 같다니깐.’
일전에 보상 스킬을 활성화하며 이미 본 적이 있었지만 아직 적응이 되지는 않았다.
고천수는 시청자들이 준 스킬들에 시선을 가져갔다.
[사용].
크롤러 때처럼 바로 발동되는 게 아니면 이렇게 스킬 옆에는 그 버튼이 달려 있었다. 눌러서 활성화하면 되는 것이었다.
“간이역까지 얼마 안 남았네요, 형님들.”
고천수는 한도초과가 준 스킬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침 저한테 딱 필요한 스킬이 있어서 놀랐습니다.”
-뭐가?
-한도초과가 준 스킬?
-그게 왜?
“보면 압니다.”
그것보다 고천수는 궁금한 게 있었다.
“혹시 한도초과 님이 앞날을 예상하고 이런 스킬을 주신 거라면 그야말로 소름일 수밖에 없네요.”
-아니, 뭔데.
-무슨 대단한 곳에다가 써먹으려고. ㅋㅋㅋ
-그냥 띄워주기 하는 거 아냐?
“띄워주기라뇨. 형님들이 어디 저한테 헛돈 쓰시겠습니까?”
고천수는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새로운주인 님도 다 미래를 내다보고 보상을 걸었던 거겠죠. 그럼 더 싼 값으로 절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고천수의 행동을 전부 예측해서 보상을 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고천수는 주먹을 꽉 쥐며 짐짓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들하고 같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아니, 그니까 뭐냐고! 스킬 어디에다가 쓸 거냐고!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거고, 두 번째는…….
-난리 났네. ㅋㅋㅋㅋ
-그래서 두 번째는 뭐야.
채팅창은 혼란이었다. 그럼에도 한도초과와 새로운주인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당혹스럽겠지.’
고천수는 기관차 뒤편을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렸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 것처럼, 스킬이란 건 가지고 있으면 어디든 써먹을 만한 곳이 있었다.
즉, 한도초과가 이 상황을 예측해서 스킬을 줬을 가능성은 낮았다. 고천수가 끼워 맞추기를 잘한 것이었다.
‘뭐, 확실해.’
어디다 쓸 건지 말을 안 하니까 조용히 있는 걸로 봐서는 이 짐작이 틀리지는 않은 듯했다. 고천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놀려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미리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놓으면 한도초과나 새로운주인이나, 혹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시청자들이나 모두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고천수는 시청자들이 가급적 효용성이 있는 보상을 내걸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저번처럼 서로의 감정싸움에 보상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질 테니까.
“형님들, 그럼 준비 좀 하겠습니다.”
물론 말이 낭비지 무슨 스킬을 주든 고천수는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고천수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상의를 벗어재꼈다.
“후.”
여기저기 잔근육이 드러나는 상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뭐 하는 거?
-옷 갈아입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천수 몸은 은근히 좋네.
-진짜 백수였던 거 맞는지?
“방구석에 있다고 자기 관리 안 하는 거 아닙니다.”
사는 데 의욕은 없었지만 고천수는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렇게 죽기에는 억울하다고 여겼을지 모른다고, 고천수는 생각했다. 발악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제 얘기는 차차 해 드릴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고천수가 멋들어진 대사를 뱉을 때였다.
착.
고천수의 등에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으악!”
갑작스러운 감촉에 놀란 고천수가 몸을 흠칫했다. 그러자 같이 놀라며 뒷걸음질 친 이가 있었다.
“헉…….”
양민철이었다. 그가 내밀었던 팔을 급하게 안쪽으로 굽히는 걸 보고 고천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너였어?”
“네. 저, 전데요.”
양민철은 접은 팔을 들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잖아. 왜 만지고 난리야.”
-ㅋㅋㅋㅋ 천수 표정 봐라.
-난 이 재미로 천수 봄.
-쫄보 쉨ㅋㅋㅋ
기껏 무게 다 잡아 놨더니 허사로 만들었다. 고천수가 게슴츠레하게 쳐다보자 양민철이 허둥대며 설명했다.
“나, 나왔더니 형이 옷 벗고 가만히 서있더라고요. 기관실 쪽을 등지고 있으니까 얼굴이 안 보여서…… 뭔 일 난 줄 알고.”
“하. 아니야, 괜찮아. 근데 넌 어떻게 조용히 나온 거야? 간 떨어질 뻔했네.”
“형이 문을 완전히 안 닫고 나가서. 열 때 소리가 안 났나 봐요.”
그 말에 고천수는 기관실 문을 바라봤다가 기관차의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철아, 그럼 할 말은 다 한 거지?”
“예?”
“다 말했으면 들어가.”
“아. 자, 잠깐만요.”
양민철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기관사님이 말했는데, 지금 통신은 연결이 제대로 안 된대요. 자기 말이 전해진지도 잘 모르겠대요. 저, 그 말 하려고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더 시간이 없었다. 고천수는 바로 상의를 한손에 꽉 움켜쥐었다.
“형?”
“민철아, 알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라.”
고천수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계획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계획이요?”
그게 무슨 계획인지 양민철은 전혀 추측도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 못 믿냐? 시간 없다. 넌 들어가 있어.”
“으음…….”
“빨리!”
고천수의 외침에 밀린 양민철은 결국 기관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천수가 기관실 창문 너머를 보니, 양민철이 방금 운전석에서 일어난 것 같은 장서연의 시야를 막느라 애쓰고 있었다.
밖이 소란스러워 나오려고 했나 본데, 양민철 선에서 잘 처리된 모습이었다.
“자, 그럼.”
간이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덧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고천수는 한도초과의 보상 스킬을 바로 활성화시켰다.
성량 7배.
평소라면 쓸 일이 없겠지만, 열차를 멈추지도 않고 간이역을 지나는 고천수에게는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덜컹덜컹.
기관차가 간이역의 지척까지 다가섰다. 고천수는 플랫폼을 내다봤다. 거기에는 군복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7.5사단?’
그곳의 인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플랫폼의 누군가가 급하게 깃발을 흔들어 대는 것을 보고, 이 기관차를 세우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천수는 바로 숨을 끌어 모았다.
“스읍!”
[성량 7배 - 00:54]
스킬 사용에는 아직 시간이 넉넉했다.
그렇다는 건, 이 기관차의 소음을 뚫고 말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열차 고장!”
고천수는 지체할 것 없이 크게 외쳤다.
“열차 고장!”
다른 말은 없었다. 고천수는 양팔을 휘저으며 그렇게 소리쳤다.
“열차 고장 났어!”
순간, 플랫폼에 있던 군인들의 시선이 고천수에게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 다들 눈만 크게 뜬 표정들이었다.
덜컹덜컹.
그것조차 순식간이었다. 기관차는 어느새 플랫폼을 지나 간이역을 통과해 버렸다.
군인들의 모습이 멀어졌다. 하지만 군인들은 제자리에 굳은 채, 아무도 뒤를 따라오거나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똑똑히 들었겠지.”
열차 고장이라고 말이다.
“하아.”
그 소리를 들으면 뭘 어쩌겠는가. 사고가 꼬여 버리는 게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은 전달받지 못했을 테니까.
게다가 그렇게 외치는 놈이 옷까지 벗고 있으니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고천수는 그거면 충분했다.
“지나갔다…….”
간이역에 있는 인원들에게 잠깐이라도 반응할 틈도 주지 않았다. 황당해서 몸이 굳은 거였든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군인들 표정 봤냐?
-성량 좋은 미친놈을 보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묘사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동의하는 바였다. 이내 고천수는 옷을 다시 챙겨 입고 기관실 안으로 향했다.
“야, 너!”
들어가자마자 장서연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옷은 왜 벗고 있었어?”
“봤나 보군요.”
“봤나 보군요. 이게 아니잖아!”
장서연은 길게 탄식을 뱉었다.
“아니, 대체 목소리는 어떻게 그렇게 큰 건지. 기차 화통 삶아먹은 줄 알았어.”
“언제 적 표현을 쓰십니까.”
장서연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천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제가 어그로 좀 끌어 놔서 다들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도 못했을 겁니다.”
“그게 자랑이야?”
“그럼 자랑이죠.”
2차 검문소의 대응 수립을 조금이라도 늦춘다면 그걸로 족했다. 적어도 그쪽에서는 말없이 기관차가 지나간 것보다는 긴급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 터였다.
“웬 또라이가 열차 고장 났다고 하면서 그쪽으로 갔다고 할 테니까요.”
예로부터 상대방에게 일부러 자신을 멍청해 보이도록 노출하는 것은 대표적인 기만 전술 중 하나였다.
“그 우스갯소리에 2차 검문소가 조금이라도 방심하게 된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되긴 뭐가 돼!”
장서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못 멈추는 열차라고 생각해서 이미 분기선으로 바꿔 놨을 수도 있다고!”
“상관없습니다.”
2차 검문소를 정상적으로 통과할 방법이 없다면 어차피 이 기관차는 분기선으로 향하게 됐을 것이었다.
“못 멈추는 열차가 그쪽으로 갔다고 한 게 핵심입니다.”
당연히 그쪽 인원들도 못 멈추는 열차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대비나 할 게 확실했다.
“저희는 미리 기관차를 멈추고 우회해서 검문소를 제압할 예정입니다. 좀 불리하면 텅레인만 어떻게 고정해 보죠, 뭐.”
“너…….”
장서연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그럴 생각이야? 예상하긴 했지만 무모해.”
“장서연 씨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달리 다른 방법도 없었다. 간이역을 통과한 순간 이미 정체도 모르는 놈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상황이 된 것이었다.
“7.5사단. 아군이라고 볼 근거가 아예 없습니다.”
“넌 있고?”
장서연이 농담처럼 물었다. 그러자 고천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지역 거주민이긴 했잖습니까.”
“아이고. 엄청 믿음직스럽네.”
“뭐, 농담이고. 정황을 보고 판단하세요.”
고천수는 적어도 장서연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사일런트 걸도 직접 나서서 죽여 줬으니, 말뿐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장서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장서연은 고천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 발목 붙잡기만 해 봐.”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천수는 미소를 지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끼리, 잘 뭉쳐 보죠.”
기관차는 그사이에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간이역을 지난 지 얼마쯤 되었을까, 기관차가 터널 하나를 지나갔다.
크아아아!
기관차가 어두운 길을 나아가는 와중에 끼어드는 잡음이 있었다.
‘좀비?’
고천수는 밖을 내다봤지만, 어두워서 뭐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미묘하게 구분되는 소리로만 따지면 좀비가 맞았다. 단지 터널 안이라서 더 크게 울렸을 뿐이었다.
“역시 네 말이 맞나 봐. 여기 길 관리도 안 되는 것 같고. 간이역도 멀쩡할 리가 없겠어.”
장서연이 덤덤하게 얘기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 몬스터가 있다는 건 간이역과 대전역 사이의 레일이 잘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사실 관리란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기에 고천수는 더더욱 대전에 입성하기 전에 발이 묶일 수는 없었다.
‘대전에 들어가면 그놈들부터 캐내야겠어.’
여태까지는 적응하는 데 급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고천수는 대전에서 7.5사단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볼 예정이었다.
‘앞으로 생존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겠지.’
어차피 맞붙을 놈들이라면 정보는 확실히 알아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시장이 뭐라고 했더라?’
기관차에 타지 못한 정찬국은 부리나케 뛰어오며 암호랍시고 뭐라 지껄였더랬다. 고천수는 골똘히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분명 세 글자의 단어였다.
“야.”
고천수가 그 단어를 분명히 떠올릴 때쯤, 장서연이 기관차에 브레이크를 걸며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멈추자.”
그곳은 레일 분기점과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