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레일 위 (3)
멀쩡히 잘 달리고 있는 기관차를 갑자기 넘겨라? 엿 같은 소리였다.
고천수는 검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를 벌써부터 추측할 수 있었다.
“형님들, 하나 물어볼게 있습니다.”
고천수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시청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의 진지한 모습에 시청자들이 곧장 궁금증을 표했다.
-뭔데?
-연기할 거냐? 표정이 너무.ㅋㅋㅋ
-보나마나 실없는 소리일 듯.
“정보창 열 때도 제가 ‘정보창’이라고 외치면 남들이 알아듣습니까?”
-거봐, 실없잖아.
고천수는 바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왜 실없는 소리입니까?”
이 좁은 공간에서 ‘정보창!’이라고 갑자기 중얼거리는 걸 누가 들으면 완전히 중2병 환자 같지 않겠는가.
“지금 상황 심각한데, 일행에게서 괜한 일로 신뢰감을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래. ㅋㅋㅋㅋ
-일행읰ㅋㅋ 신뢰감.ㅋㅋㅋ
-어이, 정보창. 열었다구?
아무도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않는 것을 보고 고천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보창.”
사실 이 정도야 누가 듣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고천수가 뱉은 명령어에 정보창이 빠르게 떠올랐다.
[상시 정보 :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정보 1 : 간이역에 있는 자들은 약탈을 일삼습니다. 웬만하면 간이역에는 정차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정보 2 : 간이역과 대전역 사이에는 소수의 인원이 지키는 또 다른 검문소가 존재합니다.]
역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 정보가 바뀌어 있었다.
‘간이역에 정차하지 말라고?’
그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내용으로.
-정보창 그냥 말해 버렸네.
-참을성 없기는.
-정보창도 우리한테 말할 때랑 마찬가지임. 시스템 호출은 다 그럴걸?
늦었지만 시청자들이 질문에 대한 답도 돌려줬다.
“참 감사하네요, 형님들. 그런 의미로 제가 하나 더 허용해 드릴게요.”
검지를 든 고천수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스포 가능합니다. 스포 부탁드려요.”
-천수야, 자제하자.
-스포하면 안 된다궄ㅋㅋ.
은근슬쩍 노려 봤지만 되지 않았다. 고천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니, 약한 스포는 되잖아, 약스포는.”
억지 부리지 말라며 채팅창이 웃음으로 가득 찼지만 고천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장서연이 몇 명 정도랑 정면에서 싸워도 이길 정도인지만 알려 주세요.”
대전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정보의 확인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현재 일행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정도는 파악해 두는 편이 좋았다.
-이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나?
누군가 이 말을 한 것을 기점으로, 시청자들은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누더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대략 5명?
그 말에 고천수는 순간 입을 벌렸다.
‘5명?’
정면에서 싸울 때 5명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말이 쉽지 웬만해서는 시도도 못 할 일이었다.
‘좋긴 한데 주의도 필요하겠네…….’
까불다가 오히려 이쪽이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혀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확인했다.
잘만 구슬려서 같은 팀원이라는 인식만 새겨 넣으면 될 듯했다.
“야.”
마침이라고 해야 할까, 앞만 보고 있던 장서연이 고천수에게 말했다.
“아주 많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말해 놓고는 왜 더 설명 안 하고 있어.”
대화가 어중간한 데서 끊겼던 게 짜증난 듯했다. 고천수는 그런 장서연을 보며 잠시 침음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 장서연 씨.”
“왜.”
“하나 물을 게 있습니다.”
대뜸 또 질문이 생기자 장서연이 한숨을 쉬었다.
“또 뭔데.”
“간이역, 그냥 지나치면 어떻게 됩니까.”
정보창을 통해 간이역에 위험한 인물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대로 간이역에 정차했다가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수도 있었다.
그 점을 고려해서 한 질문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장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냥…… 지나친다고? 왜?”
“안전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고천수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나름의 논리로 풀어놓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일단 저희는 기차를 넘길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가 고장 났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관차를 넘기고 검사를 받으라니, 딱 봐도 뒤가 구렸다.
“시장이 없다고 하니까 말을 바꾼 거에서부터 저쪽 태도가 심하게 의심됩니다.”
“어……, 그건 그렇네.”
“만약 우리를 알아서 처리하라고 간이역에 통보해 놓은 상태면 일이 심각해집니다.”
제 발로 잡혀 주는 멍청한 꼴이 될 수 있었다.
“대전역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바로 가야 합니다. 간이역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곳이고, 보는 눈도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도 다른 많은 시민들과 섞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장서연도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어.”
“게다가 장서연 씨. 지금 세계가 이렇게 되고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장서연도 격납고에 갇히듯이 생활하고 있지 않았던가.
“파견 부대가 가 있을 간이역이나 검문소 같은 곳들이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겠습니까?”
파견 부대가 독립 부대로서의 성격도 갖게 되는 건 꽤나 흔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이점이 있지만, 이런 망할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고여 있는 단체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만약에’라는 가정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죄송한데, 적어도 이 기관차는 남이 정해 주는 대로 그냥 멈추면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하니까.”
“그래, 그렇긴 하겠어.”
장서연은 한숨을 쉬더니 곧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이미 거기에 대한 답은 한 것 같은데요.”
“뭐? 답을 했다고?”
“예.”
질문 형식이긴 했다.
간이역, 그냥 지나치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으니까.
“아.”
장서연은 뒤늦게 알아챈 듯 탄식을 뱉었다.
“간이역, 그냥 지나치면 어떠냐고 했었지?”
“네. 그냥 지나치는 게 어떨까 합니다.”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괜히 내려서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를 적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장서연이 아무리 전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역할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지나친다라.”
장서연은 생각이 많아진 표정을 지었다.
그때, 양민철이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형, 저 물을 게 있어요.”
“뭔데.”
“형 말대로라면 간이역을 지나쳤을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한동안 길잡이를 했던 역할답게, 양민철은 예리한 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대전역에 연락을 넣거나 간이역하고 대전역 사이에 있는 또 다른 지점에서 막아 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었다. 폰은 터지지 않지만 7.5사단의 부대원들은 다른 통신 장비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간이역의 인원들 또한 그런 방식으로 통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냥 지나쳐 봤자 다음 구간 어딘가에서 막힐 수 있었다.
정보 2에 나온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장서연 씨.”
“어.”
“혹시 간이역하고 대전역 사이에, 열차를 막을 만한 구간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는 기관사답게 장서연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 속도로 따졌을 때, 간이역에서 13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공사 중인 분기선이 있어.”
“분기선이라면…….”
“누가 텅레일을 움직이면 기준선을 벗어나서 그 공사 중인 분기선으로 빠질 거야.”
딱 봐도 불안해 보이는 곳이었다.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기선으로 빠지면 어디로 가게 됩니까?”
“없어.”
장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로 가면 아무것도 없어. 레일이 다 없어서 멈추지 않으면 그대로 사고만 날 거야.”
최악이었다. 고천수는 잠시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나왔다, 천수 브레인 가동!
“형님, 조용히 해 보십쇼.”
시청자에게 괜히 불만을 토로하며 고천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아, 망할. 할 수 없네.’
일을 무를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장서연에게 요청했다.
“장서연 씨, 그렇다고 해도 역시 간이역은 그냥 지나가죠.”
“후, 진짜 괜찮은 건지.”
“판단력 하나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습니다.”
고천수가 빤히 쳐다보자 장서연은 이를 악물었다.
“아 씨, 모르겠다. 그래, 가자. 나도 대전까지는 가야겠어. 기껏 격납고에서 나왔더니 허허벌판인 간이역에 서라 마라 지랄이야.”
“좋습니다.”
장서연의 불같은 성격은 같은 목적을 가진 파티 형성에 한몫했다. 다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고천수는 역을 지나고서는 어떻게 할지를 설명했다.
“그럼 더 얘기를 나눌 게 있는데, 제 생각엔 그 분기선이 있다는 곳에 2차 검문소가 있을 것 같습니다.”
“2차…… 검문소?”
“텅레인인가 뭔가를 지금 원격으로 조종할 수 없다면요.”
“그렇긴 해. 수동이야.”
답은 정해졌다.
수동으로 텅레인을 옮기는 그 지점 근처에 2차 검문소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희가 간이역을 지나치면 그쪽에서 연락을 받고 분기선으로 기관차를 보내 버리겠군요.”
“하, 정말 또 검문소가 있다면 그것뿐이겠어?”
장서연은 한숨을 쉬었다.
“먼저 공격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간이역이야 검문하기로 하고 진입하는 것이니 거기에 있는 인원을 한 번 속일 수 있다고 해도, 2차 검문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기관차를 막기 위해 미리부터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이역을 지나치고 한 번 서긴 해야겠네요.”
2차 검문소를 지나기 전에 기관차를 세운 뒤에, 2차 검문소 안에 있는 인원들을 제압하고 통신망까지 부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뭔 생각을 하는지가 뻔히 보이는데. 그것까진 너무 무모한 거 아닌지.”
고천수의 말에 그렇게 반응하면서도 장서연은 딱히 그 계획을 실행하지 말자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장서연 자신도 지금 처지가 애매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리라. 생존 투쟁이 필요하면 피할 수 없었다.
“일단 죽이 되더라도 역시 대전에는 들어가는 게 낫겠죠. 뭐가 됐든 중간에 이도 저도 안 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고천수는 대략 내용을 정리하고 양민철을 돌아보았다. 그는 고천수를 마냥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부담스럽게.’
조용진까지 잃은 양민철은 고천수에게 더욱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게 귀찮으면서도 마냥 싫지는 않았다.
“누가 보면 네가 내 조수인 줄 알겠다.”
고천수가 한 마디 하자 양민철은 진지하게 답했다.
“조수…… 맞기는 하지 않을까요.”
“뭐, 그럴지도 모르긴 한데.”
고천수가 멋쩍은 표정을 짓자 시청자들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천수 이런 거 은근히 숙맥이라니까.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방구석 백수가 어디 가겠냐.
틀린 말은 아니어서 고천수에게는 딱히 별다른 자극도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계획이었다.
‘장서연도 특별히 거부감은 없는 것 같고.’
급하게 엮인 관계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잘 섞였다. 신체 능력만 좋지 장서연도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장서연도 지금 살 길을 생각하느라 머리 아프게 고민 중이리라.
‘그렇다면…….’
고천수는 일단 간이역을 지나칠 방법을 생각했다.
어차피 기관차를 그냥 멈추지 않고 지나가면 된다지만, 그랬다간 간이역에서 2차 검문소에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그나마 이거라도 하는 게 낫겠지.’
계획은 정했다. 이제 간이역만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얼마 안 남았어.”
장서연이 계속해서 정면을 주시하며 말했다.
고천수도 앞을 내다보면서 물었다.
“얼마나 남은 거죠?”
“대략 3분.”
그 말에 고천수는 기관실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양민철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형,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디 가긴.”
출입문을 열고 갈 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밖에 좀 나가려고.”
“네? 그냥 안에 있는 게 낫지 않아요? 어차피 지나간다면…….”
고천수는 나가기 전, 장서연에게 요청했다.
“장서연 씨, 혹시 간이역이랑 연락되면 계속 열차 고장 났다고 좀 해 주세요. 뭐라고 물어도 답변은 말고요. 진짜 고장 난 것처럼.”
“뭐?”
“알아들었죠?”
더 이상의 확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