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33화 (33/224)

033. 레일 위 (2)

방법은 하나였다.

일단 기다리기로 작정한 고천수가 장서연에게 말했다.

“장서연 씨, 계속 운행해 주세요.”

동시에 고천수는 장서연의 입에서 손을 치워 주었다. 그러고는 계속 조용히 하기는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번 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장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 가만히 기관차나 운전하고 있어도 되냐는 표정이었다.

“운행.”

고천수는 손으로 운전석을 가리켰다. 장서연은 기관실 문을 힐끔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 운전석에 앉아 전면을 살폈다.

“형, 저는…….”

양민철이 나서려고 하자 고천수는 손을 내저었다.

“가만히 있어.”

안 그래도 기관실은 좁았다. 넓은 공간에 있을 때처럼 함께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마 끝까지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 것?

-기차 멈추면 성가셔질 텐데.

-그렇다고 쉽게 잡을 방법이 있나?

시청자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고천수는 침음하며 기관실 출입문 창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뭐가 됐든 고천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다.

‘이대로 목적지까지 매달고 가느냐 아니면 여기서 해치우느냐.’

매달고 가면 당장은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대전이 외부 요인이 진입하는 것에 대한 방비가 되어 있는 도시라면 위험했다. 이걸 달고 있는 것부터가 위험 요소로 간주돼 대전에 입성하기도 전에 검문소에서 공격당할 수 있었다.

‘아, 시발.’

오랜만에 머릿속이 꼬였다. 고천수는 마냥 기관실 문만 쳐다보았다. 그러고 있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묘안이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도 않았다.

“아.”

하지만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사일런트 걸이 갑자기 움직임을 보였다. 손을 뻗었다가 앞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안 사일런트 걸이 뒤돌아섰다. 그걸로 멈추지 않고 몇 걸음 움직이기까지 했다.

출입문에서 살짝 멀어진 것이었다.

-미션 걸어도 되냐.

이 와중에 시청자가 또 가만히 있질 않았다.

[띠링! 새로운주인 님이 보상 미션을 설정하였습니다.]

[새로운주인 님의 미션 - 5분 내에 사일런트 걸 죽이기.]

[새로운주인 님의 보상 - 접촉한 대상의 시야를 10분 동안 훔쳐보기 스킬 1회. 발동 시점은 자유로움.]

‘또 시작인가, 이 새끼.’

새로운주인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시청자는 플레이어를 다소 가혹하게 내모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보상은 좀 끌렸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건 아니었다. 새로운주인은 또 보상 미션 설정에 젠을 덜 들이기 위해 현재에 맞는 보상은 걸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어쩌다가 20젠 미션도 걸기도 했었지만, 그건 고천수가 자기 뜻대로 하지 않아서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이리라.

결국, 고천수는 이번엔 넘겨야겠다고 판단했다.

“형님, 5분 내에는 좀 빠른데요. 잘못하면 저 죽을 수도 있어요.”

-너한테 그 정도는 가능한 거 아냐?

-ㅋㅋㅋ 새로운주인 말하는 거 보게. 겁나 하드하네.

-한도초과 어디 갔냐. 고천수 뺏기겠다.

애초에 누구한테 빼앗길 대상도 아니었다.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띠링! 한도초과 님이 보상 미션을 설정하였습니다.]

[한도초과 님의 미션 - 1시간 내에 사일런트 걸 죽이기.]

[한도초과 님의 보상 - 1분 동안 성량 7배 증가 스킬 1회. 발동 시점은 자유로움.]

사라졌던 한도초과가 미션을 갖고 돌아왔다.

“어라, 형님. 오셨습니까?”

-새로운주인인지 뭔지 꺼져라.

한도초과는 고천수에게 대답하지 않고 새로운주인을 공격했다. 자신이 계속 비교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 듯했다.

그러자 딱 봐도 새로운주인인 존재가 대꾸했다.

-뭐야, 너. 꺼지긴 뭘 꺼져. 돈 떨어졌는지 미션 보상 거지 같이 걸어 놓고.

-지금 그게 중요하냐? 네가 시킨 대로 하면 고천수 존나 위험함.

-하, 참나. ㅋㅋㅋ

새로운주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어떻게 미션을 걸든 뭔 상관이야. 한도초과, 너나 좀 가만히 있어.

-여물어.

한도초과는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고천수 살리느라고 내가 얼마나 쓴 줄 알아?

둘의 대화는 곧장 격해지고 있었다. 고천수는 멋쩍은 표정으로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뭔 경우인가 싶었다.

물론 생소하지는 않았다. 고천수가 다른 사람의 방송을 볼 때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서로가 스트리머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키우려고 하다가 마찰을 빚는 경우였다.

유료 시청자들끼리 이런 모습을 보이면 난감한 건 스트리머였다. 한쪽 편을 들기 곤란해질 때가 많았던 것이다.

‘당연히 나로서는 한도초과 쪽을 따르고 싶지만…….’

무리한 요구를 해도 새로운주인이 도움을 줬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거물급 시청자기도 하고.

‘어쩐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둘 사이에 불똥이 튀고 있기는 해도 내건 미션은 서로 같았다.

덜컹…….

고천수는 매우 조심스럽게 기관실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일순간 채팅창은 조용해지고, 장서연과 양민철도 놀라서 고천수를 돌아보았다.

그런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고천수는 앞을 바라보았다.

‘역시.’

살짝 출입문을 여는 소리는 레일 위를 달리고 있는 기차 소리에 쉽게 묻혔다. 사일런트 걸은 뭔가를 약간 감지한 듯 고개를 꺾긴 했지만 고천수를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할 일은 무엇인가.

고천수는 대담하게 사일런트 걸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야, 시바! 무리하지 마!

닉네임은 적혀 있지 않지만 한도초과가 분명했다. 고천수는 웃음을 흘릴 뻔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고천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죽으려고 환장했냐’는 말부터 ‘상남자다, 반하겠다’는 식의 말까지 다양하게 채팅창을 뒤덮었다.

고천수는 사일런트 걸 바로 앞에 섰다.

‘후.’

겁나게 떨렸다. 하지만 사일런트 걸을 해치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절반은 끝났다.

고천수는 사일런트 걸을 바라보았다.

정면에서 보는 사일런트 걸은 역시 너무 무섭게 생겼다. 얼굴이 잔뜩 짓이겨져 있었다.

‘제발 작별 좀 하자.’

고천수는 그러면서 스킬창을 켰다.

거기에는 총 1분 제한으로 접촉 대상을 청각 상실 상태로 만드는 스킬이 존재했다.

[사용]

버튼을 눌러 스킬을 활성화한 고천수는 지긋지긋한 사일런트 걸의 한쪽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탁.

난간 방향을 향하고 있던 그 어깨에 고천수의 손이 닿았다. 곧장 사일런트 걸이 흠칫하며 반응하는 순간, 고천수는 뒤로 우당탕탕 빠르게 물러섰다.

쿠당탕!

사람의 촉감을 느낀 사일런트 걸이 곧장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팔을 높이 뻗었다. 청각을 상실했기에 고천수가 요란하게 물러선 것도 알지 못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으나, 결과는 그리 우습지 않았다.

덜컹!

사일런트 걸이 팔을 내밀고 달려든 쪽은 난간이었다.

옆에 적이 있다고 판단한 사일런트 걸은 발광을 하다가 순식간에 그 난간을 넘어가 버렸다.

“어이구.”

고천수가 탄식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사일런트 걸은 난간 밖으로 떨어졌다.

“조심 좀 하지.”

그러면서 난간 밖을 내려다보던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사일런트 걸이 손가락 몇 개로 기관차 사다리 쪽에 매달려 있었다.

“으아아!”

고천수는 그 길로 기관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수납함을 열어젖혔다.

“야! 뭐 하는 거야!”

놀라며 말리려는 장서연을 보며 고천수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장서연 씨 해치려는 거 아니니까 좀 있어 봐요!”

단검을 찾아든 고천수가 그대로 사일런트 걸이 떨어진 난간으로 향했다.

사일런트 걸은 바닥에 몸이 갈려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도 사다리를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오지 마!”

고천수는 위로 팔을 뻗는 사일런트 걸에게 마구 난도질을 시전했다.

“오지 말라고!”

사일런트 걸은 고천수의 공격을 인식하고는 더욱 빠르게 기관차를 기어 올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고천수는 발길과 난도질, 할 수 있는 공격을 총 동원해서 사일런트 걸을 공격했다.

“으아아아!”

순간순간 손목과 발목을 붙잡힐 뻔하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이미 도발이란 도발은 다 해 버렸다. 이대로 살아나게 해 준다면 올라와서 어떤 깽판을 칠지 알 수 없었다.

촤악! 촥!

다행히도 세상은 전투에서는 위에 있는 놈이 더 유리하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고천수는 사일런트 걸의 손가락과 손목, 얼굴까지 공격한 끝에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맞이했다.

스륵.

사일런트 걸이 사다리를 놓쳤다. 그리고 차가운 레일 바닥에 떨어져 몇 번을 계속해서 세차게 몸을 굴렀다.

함께 같은 기관차를 탔던 관성이 있었지만 사일런트 걸은 금세 저 뒤로 멀어졌다. 고천수는 여전히 단검을 든 채로 떨리는 한숨을 뱉어냈다.

“으아아아! 시바!”

아니, 한숨과 함께 비명을 외치며 난간 한구석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천수야, 매번 넌 왜 이러냐. ㅋㅋㅋ

-잘하는 것 같아도 뭔가 허당 같은 면이 있어.

-은근 중독됨. 츄릅.

대답하기에도 지쳤다. 고천수가 숨을 고르고 있자니 알림이 떠올랐다.

[미션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부여합니다.]

[정보는 스킬창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사일런트 걸의 숨은 확실히 끊어진 듯했다.

[미션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부여합니다.]

[정보는 스킬창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심지어 같은 알림이 한 번 더 이어지자 고천수는 멍한 얼굴로 채팅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됐죠, 형님들? 5분 내에 끝내서 두 미션 다 만족했습니다.”

둘이 싸우건 어쨌건 사일런트 걸을 빠르고 확실히 해치웠다. 고천수는 누구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그점에 감명을 받은 건지 아니면 넋이 나간 건지는 몰라도 한도초과와 새로운주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힘들어.”

고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관실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양민철이 가장 먼저 물었다.

“형, 괜찮아요?”

“뭐가.”

“소리 지르면서 그거 휘둘러 댔잖아요.”

양민철이 고천수가 들고 있는 단검을 가리켰다. 고천수는 단검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양민철에게 건넸다.

“그래, 이거 잘 썼으니까 도로 집어넣어라.”

“형, 그 녀석은 확실히 해치운 거죠?”

양민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천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양민철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단검을 수납함에 집어넣었다.

“너…….”

장서연이 고천수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생각보다 대단하네?”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게 뭡니까.”

“그렇게 가서 확확 쳐낼 줄은 몰랐어. 물론 비명은 좀 질렀지만 말이야.”

고천수는 기관실 문을 닫고 한쪽 구석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기관차 운행만 아니면 그쪽한테 시켰을 텐데 말이죠.”

“나한테?”

“솔직히 저보다 더 잘 싸울 거 아닙니까.”

보정이 있긴 하지만 고천수는 아직 제대로 된 실력을 뽐낼 때는 아니었다.

실제로 고천수는 무술 경험이 있는 장서연에게 제압당하고 말았지 않은가.

“뭘 내가 더 잘 싸워.”

장서연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그런 녀석들하고는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고만.”

“그렇습니까.”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경험의 문제였다. 곧 해결될 수 있었다.

“같이 가게 된다면 제가 잘 지도해 드리겠습니다.”

“엄청나게 믿음직스럽네.”

장서연은 영혼 없는 말투로 대답하다가, 이내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근데 너 그거 아냐? 너 나간 동안 타이밍 좋게 무전 왔다.”

“무전?”

고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장서연이 헛웃음을 뱉었다.

“네가 계속 비명 지르는 바람에 뭔 일 있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뭐라고 답했습니까? 7.5사단이랑 무전한 겁니까?”

“어.”

장서연은 정면 창밖을 가리켰다.

“가다 보면 간이역에 검문소를 하나 설치했대. 우리는 거기에 내려서 뭐 어디 이상은 없는지 확인 받으라는데?”

“간이역……?”

갑자기 고천수는 엄청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장에 대해서는 안 물어봤습니까?”

“처음엔 시장 데리고 대전역까지 안전하게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런데?”

“시장이 없다고 하니까 그럼 막, 공격받았던 거 아니냐면서 간이역에서 우리 상태 확인 받으라고 했어. 기관차도 정비사한테 잠깐 넘기고.”

그 말에 고천수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하.”

“왜? 뭔가 잘못된 건가?”

천진하게 묻는 장서연을 보며 고천수는 탄식하듯 답했다.

“아주 많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