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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32화 (32/224)

032. 레일 위 (1)

“그래서, 장서연 씨는 원래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갖고 있는 무기는 서로가 동의한 간이 수납함에 넣어 둔 뒤, 고천수는 장서연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 나는 격납고.”

장서연은 쭉 뻗은 레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고천수는 그녀가 어떤 격납고를 언급한 것인지 바로 추측할 수 있었다.

“기관차 격납고 말입니까?”

“엉. 문을 닫아서 밀폐시킬 수 있기도 했고 안에 이것저것 있어서 도움이 됐거든.”

“그랬군요.”

기차가 있는데도 미리 떠나지 않았다는 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7.5사단이라고 했지.’

고천수는 장서연이 기관차를 정차하고 있었을 때 투덜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장서연 씨.”

“왜.”

“7.5사단이 약속된 시각에 시장을 데리고 대전으로 진입하면, 안전한 방공호에 넣어 주겠다고 한 겁니까?”

그 물음에 장서연이 고개를 돌려 고천수와 눈을 맞췄다.

“잘 알고 있네. 네가 아는 그대로야.”

“혹시 7.5사단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응?”

장서연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나야 잘 모르지. 그냥 군인들 아냐?”

“다른 건 모르십니까?”

“몰라.”

장서연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 녀석들, 진짜 알 수가 없어. 구해 줄 거면 그냥 구해 주지. 시장을 데려오라고 하고 말이야.”

“시장이 왜 필요한지는 얘기 안 했습니까?”

“행정력이 무너진다고 데려와야 한댔어. 각 지역에서 사람들을 구해 오는데, 군인만 있으면 안 된다면서.”

말이 좀 생략된 게 분명했지만, 고천수는 나름대로 어떤 논리인지 받아들였다.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은 질서 유지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국가 위기 사태에 군인들만으로 세력을 꾸리면 민간인들에게는 공포심만 깃들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장을 구하는 데 무리하게 힘을 쓴 듯한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장서연에게 더 물어 봤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였다.

고천수는 더 캐묻지 않고 고백하기로 했다.

“참고가 됐습니다, 장서연 씨.”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 참에 저도 하나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고천수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제 이름은 고천수입니다.”

“고천수?”

장서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 이제 와서 통성명이라도 하자는 거야? 서로 이름도 다 아는데.”

“정말 다 압니까?”

“아니, 뭐. 저기 고등학생은 아직 모르지만…… 아.”

장서연이 양민철의 교복 가슴팍에 있는 이름표를 확인하다가 몸을 멈칫했다.

이제야 알아챈 것이리라.

“야, 너…….”

장서연이 싸늘한 목소리를 내는 순간, 고천수가 빠르게 말을 던졌다.

“예, 저는 유영한이 아닙니다.”

“너!”

장서연이 바로 걸음을 옮겨 고천수의 멱살을 붙잡았다.

“유영한이 아니라고?”

“네.”

“그럼 뭐야!”

그야 이 기관차를 얻어 타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한 명의 시민일 뿐이었다.

“뭐냐고!”

-ㅋㅋㅋㅋ 겁나 열 받게 한 듯.

-왜 벌써 솔직하게 말함?

-야야, 인터뷰 언급해, 인터뷰.

“열차 승객이지 뭡니까.”

고천수는 장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무기가 든 수납함에 손을 뻗고 있던 양민철에게 시선을 향하며 고개를 저었다.

“민철아, 기다려.”

“이 자식들이! 역시 뒤통수를……!”

장서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천수는 항복을 선언하듯 장서연의 손목을 쳤다.

“자, 잠깐! 아직 할 말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너희 정체가 뭐야!”

“승객, 승객이라고!”

고천수가 장서연의 손목을 꽉 쥐어 밀어내며 소리쳤다.

“승객!”

장서연이 기가 막힌 듯 황당한 표정으로 물음표를 그렸다.

“승객?”

“그래, 승객.”

고천수는 이제 완전히 말을 놔 버렸다.

“이 열차에 타고 싶었던 승객이라고.”

“너, 지금…….”

장서연은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럼 안 돼?”

거짓으로 둘러대지 않았으면 시간을 더 지체했을 것은 자명했다. 잘못했으면 모두 몬스터에게 휩쓸렸을 터였다.

“우린 거기에서 벗어나야 했고, 너는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고 출발 시점을 놓칠 뻔했어.”

“아니, 새끼야. 그건…….”

“맞아, 아니야. 그것만 말해 봐.”

고천수는 장서연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장서연은 말문이 턱 막힌 듯 입만 뻥긋거리다가 곧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맞아.”

“그치? 맞지? ……응?”

잘 넘어갔다고 생각한 고천수는 순간 몸이 기우뚱하는 것을 느꼈다.

“어딜……!”

장서연이 고천수의 발목을 찬 것이었다. 고천수는 바로 균형을 잡으며 장서연의 손목을 꽉 틀어쥐었다.

“읏?”

“너만 힘 센 거 아냐.”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장서연을 보며 고천수가 말했다.

“나도 지금은 꽤…… 컥!”

장서연이 다시 한번 발목을 차서 고천수를 밀어 넘어뜨렸다.

“끅! 형……!”

기관실은 꽤 좁은 공간이었다. 하필 양민철 쪽으로 포개지듯이 넘어진 고천수가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칠 때였다.

꾸욱.

장서연이 고천수가 일어나지 못하게 몸으로 누르며 말했다.

“뭐, 승객? 이딴 승객도 있나?”

그녀는 꽤 화가 난 상태였다.

“속이고 타면 무임승차야, 알아? 아냐고!”

“속일 수밖에 없었잖아!”

고천수는 일부러 더 가감 없이 얘기했다.

“그때 안 속였으면 제대로 출발할 수 있었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었다고!”

“아니, 그랬어도 솔직히 얘기했었어야지! 너, 시장이 죽었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그건 진짜야!”

물론 가감이 없다고 해도 우길 부분은 우겨야 했다. 사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는 게 중요했다.

“내가 어떻게 그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야…….”

“내가 그 사람을 구해 주고 나서 받았던 거야!”

상식적인 절차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 번은 구해 낸 뒤 죽어 갈 때 얻은 것이었다.

“당연히 구해 낼 때 이런저런 얘기는 다 들었다고! 시장은 오다가 죽었어! 죽었지만, 다들 정보를 아니까 기차를 타러 온 것뿐이야!”

“뭐?”

“이미 시장은 죽었는데 거기서 시장을 솎아내서 찾아보려고 했으면 어떻게 됐겠어?”

플랫폼에 나타난 사람은 많았다. 이 기관차에 다 타기엔 애초에 어려웠을 터였다.

그렇다면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통제할 시장도 없는데, 이 기관차를 뺏어 타려고 다들 난리지 않았겠어? 우리만 탄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억지였지만 납득하지 못할 논리는 아니었다.

“아니……!”

실제로 장서연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맞지? 시장이 죽었으면 그렇잖아.”

“조용히 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장서연은 한 번 더 소리쳤다.

“그렇다고는 해도 날 속여서 탄 건 맞잖아!”

“인터뷰에서 당신이 말했잖아.”

“뭐?”

고천수가 갑작스럽게 인터뷰를 언급하자 장서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뜬금없이.”

“당신이 인터뷰에서 무임승차한 손님에 대한 질문에 답한 거. 잊었어?”

잊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장서연은 고천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왜…….”

“무임승차도 무임승차 나름이라며.”

인터뷰에서 장서연은 무임승차 승객 중에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른 이가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강한 모습치고는 상당히 관대한 면을 드러냈었다.

“우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랬던 거라고.”

고천수의 말에 장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천수를 꾹 누른 채로 계속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

장서연은 헛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을 뱉어내며 고천수의 어깨를 탁 쳤다.

“읏.”

“너, 말은 잘하네.”

-그다지 잘한 것 같진 않은데.

-거봐, 이 여자. 자기 인터뷰 했던 것만 얘기하면 꼼짝 못한다니깐. ㅋㅋㅋ

고천수가 채팅창을 무시하고 있으려니, 장서연은 곧 그를 놓아 주고 일어섰다.

“하긴 내 인터뷰를 읽어 봤을 정도면…….”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고천수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그 인터뷰는 <좋은 길> 시리즈에 나오는 거니까.’

해당 언론사에서 따뜻한 내용을 주로 올리는 지면에다가 올린 인터뷰였다. 평소 그곳에 잘 드나들지 않으면 읽기 어려웠다.

그 말인 즉, 이걸로도 장서연에게 약간의 신뢰를 줄 수는 있다는 얘기였다.

“뭐, 됐어.”

실제로도 통했다. 장서연은 다시 레일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뭐 어떻게 할 수 있지도 않고.”

“그러니까 말이야.”

고천수는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전까지 같이 잘 들어가자고.”

“어휴.”

장서연은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고쳐 썼다.

“이렇게 될 거면 아무도 안 태우고 그냥 출발하는 건데.”

“걱정 마. 후회는 안 할 거니까.”

7.5사단의 행보는 분명히 수상했다. 고천수는 장서연이 이대로 홀로 대전으로 들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장이 없더라도 기관사를 놓치진 않겠지.’

어떻게든 묶어 두려고 할 수 있었다. 고천수는 이참에 장서연을 이용해 7.5사단에 대해서 캐 볼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혀, 형. 좀 비켜 줄래요?”

아래에 있는 양민철이 신음을 내며 고천수를 밀어냈다.

“아! 미안.”

고천수는 깜짝 놀라며 바로 일어나 양민철을 도와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장서연이 혀를 찼다.

“내가 바보들을 태운 건 아닌지…….”

“걱정 말라니까.”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태워 준 값은 나중에 다 할 테니까.”

“퍽이나.”

장서연은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뱉었다.

“괜히 또 난리나 피우지 마. 기관차 사고 나면 그게 더 최악이니까.”

“뭐, 알았어.”

“그리고 너 자꾸 반말할래?”

손가락으로 고천수를 가리킨 장서연이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

“나, 27살이야. 너 그거보다 많아?”

“반말은 삼가도록 하죠.”

고천수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제가 그거보다 적거든요. 두 살 아래라.”

“…….”

“장서연 씨, 그럼 잘 부탁합니다.”

고천수는 양민철을 데리고 한구석에 앉았다.

“저희는 여기에서 얌전히 쉬고 있을 테니까.”

“제발 부탁한다.”

더 입씨름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장서연은 더 따지지 않고 주행에 집중했다.

‘됐나.’

고천수도 일이 이렇게 마무리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말해 놓아야 나중에 혹시 모르게 터질지 모를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지치기는 했던 것이다.

“형.”

그 와중에 양민철이 고천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기…….”

“응? 왜.”

고천수는 양민철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 시발!

그쪽을 함께 확인한 시청자들이 깜짝 놀라며 반응을 쏟아냈다.

-와, 언제 달라붙은 거냐.

-심장 떨어질 뻔했다.

-돌았다, 진짜.

고천수도 이 상황이 돌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기관차의 문 쪽에 서 있는 건…….

“왜. 뭔데…… 읍!”

고개를 돌리던 장서연의 입을 고천수가 틀어막았다. 장서연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치워 내려고 하자 고천수가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들어올렸다.

“쉿!”

그제야 장서연은 시선을 움직여 기관차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사일런트 걸이었으니까.

-야, 이거 어떡함?

-내릴 때 괜찮나?

사일런트 걸은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계속 고갯짓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기관차 자체가 소음 덩어리다 보니, 탑승하고서 오히려 감각을 잃어버린 듯했다.

‘제기랄. 언제부터 타 있던 거야.’

기관차의 끝을 붙잡고 있다가 올라온 게 아닐까 싶었다. 뭐가 됐든 고천수는 저 사일런트 걸을 처리해야 했다.

‘지금 처리해야 되나?’

기관차의 소음이 충분할 때 처리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뭘 어째야 한단 말인가.

사일런트 걸은 지나친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몸을 마구 뒤틀어 대고 있었다. 저런 상태의 사일런트 걸에게 잡혔다가는 사지가 찢기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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