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기차역 (4)
그제야 고천수는 조용진의 발목을 다시 살폈다. 부러진 게 아니라 뭔가에 뜯긴 상처가 있었다.
“하…….”
고천수는 주먹을 꽉 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혀, 형…….”
양민철이 긴장한 기색으로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고천수는 조용진의 얼굴을 붙잡고 시선을 마주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알고 있냐? 네 상태.”
“아. 아.”
조용진은 순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나, 이상해졌어?”
“어.”
그냥 이상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고천수는 사일런트 걸에게 당한 유영한이 감염되는 현상을 확인했었다.
이제 조용진이 어떻게 변할지는 뻔했다.
“끄, 끄응.”
조용진은 침을 흘리며 온몸을 비틀어 대기 시작했다. 양민철이 숨이 멎은 듯한 얼굴로, 그런 조용진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고천수는 조용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하다, 조용진.”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 기대서 여기까지 왔다. 특별하게 슬픔을 많이 느끼는 성격은 아니지만, 고천수는 씁쓸함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탁.
고천수는 양민철의 손을 조용진에게서 치웠다. 그리고 주저앉는 조용진을 그냥 내버려둔 채 양민철만 끌고 갔다.
“혀, 형?”
고천수의 매몰찬 행동에 양민철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고천수는 고개만 저었다.
“어쩔 수 없어. 내버려둬.”
그렇다고 변하기 전의 조용진을 미리 죽이지도 못했다. 고천수는 양민철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표소부터 빠르게 살펴봤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역무원도 없고, 그 밖의 단서도 없었다.
‘시장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하나?’
굳이 단서를 찾아내자고 한다면 역시 유영한이 죽기 전에 얘기했던 시장밖에 없었다.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다만 시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원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 마주쳐서 과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서로 적대하게 된다면, 쪽수로는 이쪽이 패배할 확률이 높았다.
“일단 여기서 내려가자.”
고천수가 양민철에게 말했다.
아직 멀지 않은 곳에 사일런트 걸들이 있었다. 여기서 머무를 수도 없으니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끄으으윽.”
홀로 남은 조용진의 신음이 더욱 커졌다.
고천수는 대합실에 홀로 남아 있는 조용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조용진이 떨리는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천수는 거기로 시선을 돌렸다가 입을 벌렸다.
“어……?”
조용진의 손은 벽에 걸려 있는 한 전광판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럴 수가……!’
시간이 나와 있었다. 바로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이.
‘작동…… 한다고?’
다른 전광판들은 기능이 정지해 있었다. 오직 조용진이 가리키고 있는 전광판만 지금 작동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켜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분 남았잖아.’
전광판에 뜬 현재 시간으로는 도착까지 고작 1분이 남았다. 그마저도 저게 맞을 때의 얘기였다.
실은 더 조금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용진.’
양민철을 데리고 내려가기 전, 고천수는 그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조용진은 변해 가면서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적어도 자신의 상관들을 원망했듯이 고천수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화장실에서 구해 냈던 것이 주효했을 터였다. 고천수는 떨리는 숨을 가라앉혔다.
‘기억해 둘게.’
자신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기억에 남기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반드시 조용진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있으리라.
“형…….”
“서두르자.”
차라리 화장실에서 꺼내 오지 않았으면 이만한 동요도 없었을까. 고천수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양민철을 끌고 플랫폼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은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플랫폼에 내려서기까지는 아무 몬스터도 만나지 않았다.
“민철아, 잘 들어.”
하지만 고천수는 이게 또 하나의 시험이 될 것을 알았다.
“너도 죽기 싫으면 말이야.”
***
곧 있으면 기차가 들어온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이랬다.
“기차가 잡것들을 몰고 올 거야.”
기차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와서 멈추는 동안 몬스터들이 소리에 이끌려 달려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알겠어?”
고천수의 말에 양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들은 듯했지만 고천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라나.’
플랫폼은 사방이 뚫려 있어서 몬스터의 공격에 취약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시야도 넓어서 뭐가 다가오는지 정도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띵동띵동띵동.
“어?”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 우리 역을 통과하는 열차입니다.
스피커에서 갑자기 굉음과도 같은 알림이 흘러나왔다.
“이런 씨…….”
고천수는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스피커의 알림은 플랫폼에서만 있었다. 몬스터들이 들었다면, 충분히 이곳으로 달려올 만했다.
크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괴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형……!”
양민철의 외침에 고천수도 식은땀을 흘렸다.
‘어디로 피해야 하는 거야, 이거.’
그런 고천수의 눈에 보인 건, 플랫폼 기둥 옆에 세워져 있던 네모난 박스 형태의 거대한 카트였다. 고천수는 빠르게 외쳤다.
“저기로 가! 빨리!”
역을 보수할 때 단단한 자재를 옮기기 위한 용도인지, 카트는 사방이 철판으로 둘러져 있었다. 성인 두 명이 들어가도 일단 몸을 숨길 수는 있을 것으로 보였다.
“빨리빨리!”
양민철이 복창하듯 외치며 카트 안으로 들어갔다. 고천수도 그의 뒤를 따라 카트에 타고 옆에 있던 덮개를 위에 씌웠다.
크아아아아아.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는 작게 몰아쉬었다.
-근데 이렇게 있으면 갇히는 거 아님?
-응, 아님.
-어떻게?
고천수도 그 정도의 계산은 다 하고 있었다.
‘역을 통과하는 열차라고 했어.’
기차가 정말 서지 않는다면 이 역을 그대로 통과할 것이었다. 바로 이 역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절망적일 테지만, 그래도 탈출할 기회는 엿볼 수 있었다.
쿠궁쿠궁.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왔다……!”
고천수의 외침과 동시에 갑자기 밖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빠앙!
기차의 경적 소리였다.
고천수는 덮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밖을 내다봤다. KTX 열차 한 대가 다소 속도를 낮춘 채로 역을 통과해 지나가고 있었다.
‘저건……!’
KTX 꽁무니를 쫓아 크롤러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빠앙!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을 지나가면서도 경적을 계속 울리는 KTX를 쫓아 곳곳에 있던 몬스터들이 뛰쳐 나가고 있었다.
빠앙……!
역에 있던 몬스터들은 거의 다 KTX를 쫓아 나가 버렸다.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KTX는 정상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았다. 경적 소리도 크게 울리지 않았던가.
게다가…….
‘저건 상행선인데.’
여기서 대전으로 가려면 하행선을 타야만 했다. 그런데도 KTX는 위로 올라가고 있던 것이다. 마치 지금부터 하행선으로 내려갈 다른 열차를 위해 미끼가 되어 주듯이.
덜컹덜컹.
그때, 조용한 울림으로 천천히 플랫폼 쪽에 나타나는 열차가 하나 있었다.
“형, 기관차가……!”
함께 밖을 내다보고 있던 양민철이 외쳤다.
그랬다. 기관차 한 대가 플랫폼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뭐야, 저거. 언제 나타난 거야.
-이 도시 근처에 격납고 있음. 거기서 온 거. ㅇㅇ
-미친. KTX를 미끼로 쓰고 무궁화호 기관차 꺼내왔네. ㅋㅋㅋㅋ
네모지게 생긴 무궁화호 기관차가 플랫폼에 조용히 멈춰 섰다. 고천수는 아직 덮개를 열고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잠시 동태를 살피며 숨을 죽일 뿐이었다.
“형?”
양민철이 고천수를 닦달했다. 하지만 고천수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고작 일반 시민 태우자고 왔을 리는 없잖아.’
정황상 시장을 기다리는 기관차였다. 안에 어떤 놈이 타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늦은 건가……?’
아직 시장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도착하지도 않았으니 그쪽과 격돌하게 될 필요도 없었다.
“넌 여기 있어.”
그렇다는 얘기는 기관차에 있는 이만 제압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고천수는 조심스럽게 덮개를 치웠다.
“형, 혼자 가려고요?”
“걱정 마. 두고 안 가니까.”
그렇게 카트 바깥으로 나간 고천수는 조용한 걸음으로 기관차에 접근했다. 옆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자, 누군가 한 명 창문에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아니네.’
포니테일 머리를 한 키가 큰 여자가 제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덜컹.
그때였다. 안에 있던 여자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왔다.
“아, 썅.”
고천수는 서둘러 몸을 쭈그리고 기관차 밑에 몸을 숨겼다.
‘못 봤겠지……?’
그렇게 고천수가 숨을 고를 때였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여자는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정찬국 시장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잖아.”
-빙고.
-시장 데리러 온 거 맞네.
-자, 천수야. 빨리 타자.
고천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다행히 여자가 자신을 발견하지는 못한 듯했다.
‘한 명이다.’
동료가 없는 게 분명했다. 특별한 무기만 들고 있지 않다면, 이쪽이 전투에서는 더 유리했다.
고천수는 카트가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향했다.
‘지금 민철이랑 같이 바로 올라가도 되려나.’
파스스.
재 같은 게 고천수의 눈앞으로 흩날릴 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 7.5사단인지 뭔지 진짜 엿 같네. 이 새끼들 설마 비상 채널로 그냥 장난 무전한 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방공호에 넣어준다기에 기껏 격납고에서 나왔더니만…….”
여자는 카트에 있는 양민철도 알아채지 못하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걸 양민철도 알았는지 고개를 살짝 내밀고 고천수를 향해 신호를 주었다.
일단 검지를 들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저 여자 한 명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공격하자는 듯 주먹을 쥐었다. 꽤나 단순한 의미 전달이었다.
하지만 단순해서 좋았다. 고천수는 양민철이 적에게서 특별한 무기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알고,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파스스.
제복을 입은 여자는 불붙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손을 살짝 털 때, 거기서 담뱃재가 흩날렸다.
“엥?”
여자는 기관차 밑에서 기어 나온 고천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
고천수는 대꾸 없이 여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그보다 살짝 위로 보였다.
20대 후반쯤의 여성 기관사. 고천수는 그녀를 더 면밀히 살펴보고는, 이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장서연.’
이 지역에서 처음 뽑힌 여성 기관사로 이름을 올렸던 사람이다. 당연히 지역지에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뭐냐고, 너희들.”
그리고 인터뷰했던 내용도, 저렇게 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더랬다. 그래서 고천수는 스쳐가듯 본 인터뷰였음에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담배를 꺼내 들거나 욕지거리를 내뱉지는 않았지만.
‘일단…….’
고천수는 당장 장서연과 쓸데없는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장서연은 정찬국을 태우러 온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그 점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형!”
그때였다. 양민철이 카트 안에서 주웠는지 쇠파이프 하나를 들고 달려왔다. 고천수는 바로 뒤돌아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잠깐!”
그러면서 장서연은 안 보이게 눈짓했다.
“잠깐 기다려. 다른 편이 아니야.”
“으, 음.”
고천수가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본 양민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너희…….”
하지만 장서연이 이쪽에 경계를 드러내는 일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이 기관차, 뺏으러 온 거냐?”
그렇게 말한 장서연은 순간 코웃음과 함께 담뱃재를 털었다.
“아서라. 내가 괜히 여기 혼자 있겠냐.”
장서연은 격투기를 본격적으로 배운 기관사로도 유명했다. 역에 나타난 범인을 직접 잡은 적도 있어 경찰 표창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그게 무서워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고.’
고천수는 유영한에게서 습득했던 명함을 꺼내들었다. 이쪽이 남자 둘이라도 싸우는 데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기관차를 직접 운전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를 터였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었다.
“이거.”
고천수는 장서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일단 받아 주세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응?”
장서연이 명함을 받아 들더니 눈썹을 움찔거렸다.
“유영한? 뭐야, 시청 사람이야?”
“네. 그리고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고천수는 의외라는 듯 놀라던 장서연에게 바로 말했다.
“시장은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