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기차역 (3)
“형님들, 올라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습니다.”
숨을 고른 고천수는 위로 향하기 전 입을 열었다.
“제가 형님들에게 말 거는 동안, 제 모습이 외부에서 볼 때는 어느 정도로 보정되는 겁니까?”
고천수는 그가 어떤 움직임을 보여도 외부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혹은 음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소음을 내도 다른 이에게는 들리지 않는지 등의 사항이 궁금했다.
-음, 상황에 따라 다를걸? 근데 약한 정도만 됨.
-목소리는 안 내는데 네가 입은 움직이고 혼자 손짓으로 우리 말에 리액션 보이거나 하면 이상하잖아? 그 정도는 안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됨.
-딱 그 정도만 되니까 리액션이라고 우기면서 사일런트 걸 잡거나 하지 마. 골로 간다.
웬일로 시청자들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며 고천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형님들. 아무리 그래도 제가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말은. ㅋㅋㅋㅋㅋ
-야, 진짜 접촉하지 마. 행동 보정이라고 해 봤자 그냥 약한 눈속임일 뿐이라고.
-야야, 그냥 해 봐. 직접 실천해서 알아봐, 그냥. ㅋㅋㅋ
채팅창이 지저분해졌다.
고천수에게 약간 의외였던 점은,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이었다.
“형님들, 감동이네요. 제가 실수할까 봐 이렇게 챙겨 주시고.”
-이제부터 꿀잼 스팟인데 나가리 되면 짜증나잖아.
-네가 우리한테 말할 때 목소리 정도만 음 소거되는 거니까, 다른 뻘짓도 하지 마.
-이야, 천수 사랑받네.
잠깐이지만 열렬한 지지를 받아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고천수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시청자한테 말하는 동안 음이 소거되는 건 내 목소리뿐…….’
그렇다면 시청자와의 대화 중에 다른 신체로 소리를 내거나 하면 그냥 누군가에게 들킨다는 것이었다.
“형님들, 그거 하나만요.”
고천수는 몸을 풀며 물었다.
“몬스터도 제가 형님들한테 말할 때의 대화는 못 듣는 겁니까?”
-어.
그거면 됐다.
고천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야, 뭐하는 거야?
-위로 안 가?
“잠깐만요.”
위로 올라가긴 할 테지만 그 전에 획득해야 할 것이 있었다.
고천수는 계단을 끝까지 다 내려가 거의 넝마가 되어 버린 유영한의 사체 앞에 섰다.
“후우, 진짜 끔찍하게도 당했네.”
사일런트 걸의 악력은 좀비보다 훨씬 강한 듯했다. 위쪽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서 사일런트 걸이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면, 지금쯤 유영한의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디 보자…….”
고천수는 유영한의 옷을 뒤졌다. 같이 찢어졌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다면 챙겨야 했다.
“있다!”
지갑이었다.
좀 뜯어지긴 했지만 아직 내용물은 제법 성한 채로 남아 있었다. 고천수는 그 안에서 유영한의 명함을 찾아냈다.
-살아남을 구멍은 기가 막히게 챙겨 놓는구먼.
시청자의 격찬을 받으며 고천수가 다시 계단을 오르려고 할 때였다.
크아아아아…….
유영한이 괴성을 뱉어냈다.
“응?”
고천수는 흰자를 뒤집어 까며 몸을 일으키는 유영한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좀비……?”
유영한이 좀비가 되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씨, 더 짜증나게 됐네.’
감염력까지 있는 존재라니, 사일런트 걸이 더욱 두려워졌다.
크아아아아!
“좀!”
비틀비틀 일어나려는 좀비를 보며, 고천수는 빠르게 단검을 내질렀다.
콰악!
채 무언가를 사냥해 보기도 전에 좀비는 턱을 꿰뚫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후.”
고천수는 단검을 회수하고 한숨을 쉬었다. 놀라긴 했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계단에 다시 오르기 시작한 고천수는 유난히 긴장한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제발 없어라…….’
계단을 다 오른 고천수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천수의 눈에 띄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근데 막상 없으니 또 불안하네.’
분명 존재는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위협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고천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대합실과 매표소로 향하는 거대한 일직선 길 양쪽으로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들 숨어 있을 만하기에는 충분한디?
-조심해라. 뭐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겠다.
유리문이 깨진 상점들이 많았다. 시청자들의 말대로 뭐가 갑자기 튀어나올 만한 공간은 차고 넘쳤다.
조심해야만 했다.
‘아 씨, 얘네는 진짜 어디 간 거야.’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면 합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고천수는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콰당탕!
그때, 갑작스럽게 난 소리에 고천수가 고개를 돌렸다.
‘시바.’
자칫 잘못했으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고천수가 소리가 난 곳을 확인했다.
‘화장실 쪽에서 난 건가……?’
고천수는 천천히 화장실 근처로 다가갔다.
‘망할.’
하필이면 입구에서 화장실까지 이어지는 길이 구불구불해서 밖에서는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형님들, 이거 스킬 말입니다. 접촉한 대상이면 아무거나 되는 거겠죠?”
-안 알려줌.
-스스로 써서 알아봐.
“예, 형님들. 되는 거 알았고요.”
고천수는 곧장 스킬창을 열었다.
거기에는 보상으로 얻은 스킬이 존재하고 있었다.
* 새로운주인 님의 보상 스킬 : 접촉한 대상의 청각을 상실시킬 수 있는 1회용 스킬. 1분 제한.
옆에는 [사용]이라고 쓰인 초록색 버튼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천수는 귀에 손을 갖다 대고 화장실 입구 통로 안쪽에 기척이 있는지를 느껴 보려고 애썼다.
‘있다면 좀 있다고…….’
“으아아아아!”
안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그 비명은 고천수에게 매우 익숙한 소리였다.
‘양민철!’
안에 있는 게 확실해졌다. 사일런트 걸이 양민철을 포착했는지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도 이제 명확하게 밖으로 울려 퍼졌다.
“자, 잠깐만! 민철아, 올라가!”
조용진의 목소리까지 있었다. 둘은 사일런트 걸들을 피해 화장실 변기 칸 위로 올라가고 있는 듯했다.
“갑니다, 형님들.”
정해졌다.
고천수는 곧장 화장실을 무시하고 걸어갔다.
-야. ㅋㅋㅋㅋㅋ
-그냥 가는 거?
-미쳤네.
그럼 이 상황에서 뭘 어쩌라는 말인가.
“구하러 가기에는 손익이 맞질 않아요.”
지금까지 고마웠지만 아무런 이득도 없이 화장실에 진입하는 건 쓸데없이 위험만 사는 일이었다.
차라리 사일런트 걸들이 저기 몰려 있는 것에 감사하며 지나가는 게 나았다.
-진짜 그냥 감?
“네. 저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이미 결정했습니다.”
-이래도?
[띠링! 새로운주인 님이 보상 미션을 설정하였습니다.]
[새로운주인 님의 미션 - 양민철과 조용진을 화장실에서 꺼내 오기.]
[새로운주인 님의 보상 - 20젠.]
20젠.
어마어마한 액수에 고천수의 발걸음이 멈췄다.
“20……?”
-형, 이미 지갑 열었다.
‘새로운주인’이라는 닉네임이 또다시 미션을 걸었다.
‘이거…….’
앞서 미션을 통해 스킬 보상을 줬는데도 아무런 도전을 보이지 않는 것에 새로운주인은 짜증을 느끼는 듯했다.
-지금 나만큼 많이 걸 수 있는 애 별로 없을걸? 한도초과는 진짜 초과됐을 거고.
마음에 갈등이 일었지만, 그 말에 다른 시청자들이 반박하지 않는 걸 보고 고천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 또 손익을 맞춰 주고 난리야.’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주위에 있던 X사의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에 식사를?
-여윽시 뭐든 간에 식후경이지.
-ㅋㅋㅋㅋ 먹방 가자.
시청자들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이 고천수는 매장 좌석들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형님들, 저를 도대체 뭐로 보시는 겁니까.”
고천수가 도착한 곳은 감자를 튀기는 튀김기 앞이었다.
‘있네.’
튀김기 근처의 벽에는 적정한 튀김 시간을 지정해 둘 때 쓰는 작은 스톱워치들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보이십니까, 형님들.”
고천수는 그 스톱워치들을 떼어내 자신의 몸에 달았다.
“이른바 ‘자살워치’ 작전입니다.”
해괴한 네이밍 센스를 발휘하며 고천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나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안쪽에서는 계속해서 비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용히 좀 하고 있지.’
괜히 사일런트 걸을 자극하게 될 뿐이었다.
고천수는 타이머를 맞추고 빠른 속도로 화장실에 진입했다.
콰지직!
예상대로였다. 양민철과 조용진은 화장실 변기 칸에 올라가 있었고, 사일런트 걸은 화장실 문을 부수며 그들을 쫓고 있었다.
‘두 마리네.’
다만 고천수가 목격한 사일런트 걸이 다 여기에 있다는 점이 골치 아픈 사실로 작용할 뿐이었다.
“형……?”
“너……!”
양민철과 조용진이 고천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천수가 그런 그들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일 때였다.
삐비비빅!
그가 몸에 매달고 있는 스톱워치 하나에서 알람이 흘러나왔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그와 동시에 다른 스톱워치들에서도 알람이 쏟아져 나왔다.
콰득…….
사일런트 걸들은 문을 부수다 말고 고천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그로 2 - 10:00]
확실히 끌렸다.
고천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두 사일런트 걸은 언제 변기 칸의 문을 부수고 있었냐는 듯 곧장 고천수를 쫓았다.
-야, 뭐 해!
-빨리 청각 상실 스킬 써!
시청자들이 방향을 지정해 주었지만 고천수는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삐비비빅…….
일단 스톱워치 하나를 떼어내 계단 방향으로 낮게 던졌다.
‘아직이야!’
아직 고천수는 몇 개나 더 스톱워치를 매달고 있었다. 재빠르게 나머지도 떼어낸 고천수는 조금 전과 같은 방향으로 던져 버렸다.
끄윽.
고천수에게 달려오던 사일런트 걸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멈춰 섰다. 그러더니 스톱워치들의 소리를 따라 계단 쪽으로 달려 나갔다.
‘후우.’
한숨 돌린 고천수는 천천히 화장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아직 변기 칸의 벽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 양민철과 조용진이 있었다.
“어이구, 진짜.”
고천수는 혀를 차며 그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얼른 내려와. 조용히.”
그러자 양민철과 조용진이 민망한 얼굴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대체 뭐 하다가 여기까지 몰린 거야?”
고천수는 그들을 타박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나중에 따질게.”
지금은 이곳을 안전하게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더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가는 큰일 나게 생겼다.
고천수가 손짓하자 양민철과 목발을 잃은 조용진을 부축한 채 뒤를 따라나섰다.
앞장서서 걸은 고천수는 화장실 입구에 다다라서는 고개를 살짝 내밀고 먼저 밖을 살폈다.
삐비비빅!
아직도 스톱워치 몇 개가 살아 있었다. 스톱워치가 작아서인지 사일런트 걸들은 아직까지 스톱워치들을 잡아내지 못하고 도발만 당하고 있었다.
-그냥 스킬 썼으면 되는 거 아님?
-놔둬. ㅋㅋㅋㅋ 천수 스릴 즐긴다고 하잖아.
스릴 때문은 아니었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들, 그 스킬 너무 위험해요.”
한도초과가 줬던 보상처럼 완전한 게 아니었다.
스킬을 쓰려면 접촉을 해야 하는데 사일런트 걸들의 전투력은 결코 얕볼 수준이 아니었다.
공격력만 따지면 좀비들은 비교조차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접촉하려다가 괜히 붙잡히면 살점이 그대로 다 뜯겨 나갈 가능성이 있던 것이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애초에 보상을 걸었을 때도, 그 당시 상황을 바로 벗어날 수 있게 미션을 준 게 아니었다.
한도초과가 주었던 미션보다는 값싼 미션이었던 게 분명했다.
“고천수.”
조용진이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 목발이 부서졌어.”
그 말에 고천수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잘 좀 하지,’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좀비만 있었으면 모를까, 다른 강한 몬스터가 있는 상태에서 이곳을 함께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망할.’
아직 미션이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미션 완료가 뜰 때까지는 끌고 가야 했다.
-천수야, 좀만 더 데리고 가면 돼.
-나가서 바로 내던지고 가.
-그래, 코앞이잖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화장실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갑자기 조용진을 버리면, 양민철이 놀라서 왜 그러냐며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었다.
그게 고천수를 망설이게 했다. 게다가 기껏 구해 놓고 조용진을 바로 버리는 것도 고천수에게는 좀 꺼림칙한 일이었다.
“민철아, 부축 좀만 더 부탁한다. 말할 때 목소리 낮추는 거 잊지 말고.”
일단은 고천수가 부탁하자 양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진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셋은 스톱워치의 발악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화장실 입구를 벗어났다.
[미션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부여합니다.]
[정보는 채팅창의 $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떠오르는 미션 완료 창들. 다행히도 대합실까지 다다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기에, 고천수는 조용진을 거기까지는 데려갈 수 있었다.
“끅?”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조용진이 신음을 시작했다.
‘뭐야.’
고천수가 조용진을 노려보았다. 이 근처를 벗어날 때까지 큰 소리는 금물이었다. 그런데 조용진은 점점 신음을 더해 가고 있었다.
꾸깃.
고천수가 조용진의 어깨를 붙잡고 옷을 꽉 붙잡아 흔들었다.
“쉿.”
작게 경고를 주던 고천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용진의 눈동자가 탁해지고 있던 것이다.
‘이 새끼 설마……!’
양민철도 알아챈 듯 고천수를 보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