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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8화 (28/224)

028. 기차역 (2)

고천수가 다가가는 동안에도 남자는 좀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으아악! 시발, 누, 누가 좀…….”

“도와드릴까요?”

그 한 마디에 남자가 고천수에게 시선을 향했다.

“뭐……?”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남자는 다시 좀비와의 사투를 시작했다.

“도, 도와줘! 제발 도와줘!”

“존댓말 안 쓰시네. 쩝.”

“도와주세요! 빨리!”

처세 전환이 빨랐다. 고천수는 미소를 짓고는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럼 가만히 계세요. 찔릴 수도 있으니깐.”

“가, 가만히 있기가…….”

남자가 어려운 일이라는 듯 당황해 하는 목소리를 내뱉었지만 괜찮았다.

이미 고천수는 좀비의 뒷목을 뚫어 버린 뒤였다.

털썩.

쓰러지는 좀비를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살기 힘드네요. 그렇죠?”

“아, 아…….”

남자는 뒷걸음질 치다가 긴장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살았다…….”

“잊으신 게 있는 것 같은데.”

고천수가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감사 인사.”

“아, 앗!”

남자는 놀라며 고천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 고맙습니다. 잘못하면 죽을 뻔했어요.”

-이놈, 고천수 칼 보고 무서워서 고맙다고 하는 거 아냐? ㅋㅋㅋㅋ

-ㅋㅋㅋㅋ 그러게.

-아니, 근데 조용진은 반말해도 봐줬으면서.

“형님들, 용진이는 불쌍한 애잖아요.”

현역으로 끌려갔을 텐데 이런 거지같은 세상이 되었다.

조용진의 사정을 알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똑같이 생각할 터였다. 현역병인 상태에서 조용진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말이다.

“자, 그럼.”

고천수는 남자에게 단검을 들이밀면서 물었다.

“누구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자, 잠깐. 칼은 치우고…….”

“이 편이 서로 편할 것 같아서요.”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것 없었다.

고천수는 속전속결을 좋아했다.

“혼자서 차를 끌고 와서 시장 욕을 하고 있는 게,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 아니에요.”

“그, 그건…….”

“아, 그리고 혹시 이 주변에서 사람들 못 봤어요?”

조용진과 양민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천수는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예? 왜 아무것도 대답을 안 해요.”

“하, 하나씩만 물어야 대답을 하지.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 못 봤어.”

“그럼 먼저 질문한 거라도 대답해요.”

시장을 욕한 걸 보니 적어도 시청 직원임이 분명했다.

“시장이랑 같이 왔어요? 시장은 어디 있죠?”

“……그 개자식.”

시장 얘기를 하자 남자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날 버렸어.”

“버려요?”

“기차역 괜찮은지 보고 오라면서 보낸 거긴 하지만…….”

남자는 울분을 토해 냈다.

“이런 데서 어떻게 혼자 살아남아! 내가 다른 길도 찾아보자고 하니까 괜히 반기 든다고 뭐라고 하더라니까!”

“반기라.”

“아니, 이 정도도 반기면 반기 아닌 게 어디 있어! 시장 완전히 맛탱이 가 버렸다고!”

그의 외침에 고천수는 위아래로 손짓했다.

“알겠어요. 대충 뭔지는 알겠는데, 그럼 시장은 이쪽으로 와요?”

“……뭐, 오긴 올 거야.”

남자는 자기가 타고 온 검은 차를 가리켰다.

“이런 차가 몇 개는 있어. 시장을 지키는 인원이 꽤 많아.”

“다 부하직원들입니까?”

“그건 아냐.”

남자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잘 모르는 놈들도 있었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시장을 지키는 것만큼은 확실해.”

“음.”

고천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하 직원도 아닌데 시장을 지킨다라.’

감이 오는 부분이 좀 있었다.

‘뭐, 좋아.’

정체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기차가 설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 시장은 어떤 쪽의 요인으로 추측됐다.

다른 길을 찾아볼 것도 없이 여기로 진로를 확실히 잡은 걸 보면, 시장은 이곳으로 기차가 온다는 정보를 확실히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일어나세요.”

“응?”

“일어나시라고요.”

고천수는 단검을 까딱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남자가 워낙 난동을 피워 댄 통에 다른 몬스터가 몰려올 수도 있었다.

서둘러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아, 알았어.”

남자는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난 유영한이라고 해. 잘 부탁할게.”

-엑스트라 A. 자기소개하다.

-유영한의 이름, 이 가슴에 새겨졌다.

-몇 분 안에 죽을까?

험한 말을 하는 시청자들을 무시하고 고천수도 통성명을 했다.

“전 황천수라고 합니다.”

-황천수. ㅋㅋㅋㅋㅋ

-미친 새끼. 황천길도 아니고. ㅋㅋㅋ

“아, 아. 황천수.”

뭔가 기분이 이상한 듯했지만 남자, 유영한은 굳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럼 같이 내부로 들어가 보죠. 그게 우리 둘 목적일 테니까요.”

고천수는 유영한을 데리고 이동을 시작했다.

일단 시작은 계단이었다.

“아, 망할.”

에스컬레이터는 멈춰있었기에 상층에 있는 대합실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들이 다 없어져가지고.”

표 같은 건 끊을 필요가 없으니 원래라면 1층 옆의 높다란 담벼락 어딘가에 있는 샛길을 찾아 기차 플랫폼으로 갈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조용진과 양민철을 찾아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누구 찾는다고……. 동료인가요?”

“네.”

웃기는 놈들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서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제 와서 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물론 위험해지면 또 다르지만.’

뭐가 됐든 간에 고천수는 대합실로 가기는 해야 했다. 샛길도 있을지 몰랐지만, 사실 존재가 불확실했다. 길을 헤매다가 몬스터를 맞닥뜨리면 더 위험했다.

게다가 표는 아니더라도 기차에 탈 수 있는 확실한 조건 같은 게 역사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 통과하며 확인해야 했다.

“어……?”

계단을 오르던 와중에 유영한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기.”

“음?”

고천수는 유영한이 내민 손가락을 따라 위를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뭐지?”

작은 소녀의 실루엣이 있었다.

고천수는 곧장 발걸음을 멈췄다.

“어린 아이?”

그렇게 고천수가 중얼거릴 때였다. 유영한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야…… 읍!”

“아니, 미치셨나.”

고천수는 그 입을 막으며 낮게 윽박질렀다.

“부르긴 왜 불러요. 죽고 싶어요?”

이런 외딴 데 작은 소녀가 있다니. 딱 봐도 이상하고 기묘한 일이지 않은가.

-설마.

-야, 저거 그거냐?

-천수 얘는 운이 있다가도 없는 것 같아.

시청자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뭔데요, 형님들. 무서운 거예요? 그럼 빨리 절대 확률인지 뭔지 무적 미션 보상 걸어 주세요! 빨리!”

-아니, 돌았냐. ㅋㅋㅋㅋ

-보상을 상황에 맞게 절묘하게 걸면 존나 비싸.

-한도초과가 쓴 건 100젠짜리였다고.

생각보다 훨씬 비싼 거였다.

‘100젠?’

하지만 1젠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고천수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액수였다.

-1젠이 우리한텐 너 백수일 때 만 원 정도의 가치랑 비슷함.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에 고천수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반응했다.

“네에? 그렇게 엄청난 가치였어요?”

백수한테 1만원은 단순한 초록색 종이가 아니었다.

몸에 지니고만 다녀도 든든한 부적 같은 것이었다.

“뭐, 어쨌든…….”

고천수는 위의 작은 소녀에게 박은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저거,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네요.”

저렇게 생긴 몬스터가 더 무서운 법이었다.

고천수는 긴장한 표정으로 유영한에게 말했다.

“손 떼 줄 테니 조용히 해요. 저거 사람 아닌 것 같으니까.”

유영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천수는 천천히 그런 그에게 손을 뗐다.

“후.”

모아 뒀던 숨을 몰아쉰 유영한이 고천수에게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해? 돌아서 갈까?”

“잠깐 기다려 봐도 되고요.”

아래서 유영한이 소란을 떨었는데도 저 작은 소녀는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방금까지는 다른 곳에 있다가 이쪽으로 오게 된 걸 수도 있으니, 기다리면 또 그냥 사라질 수도 있었다.

땡그랑!

위쪽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작은 소녀는 온몸을 뒤틀면서 소리를 쫓아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 아아.”

그걸 본 유영한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아, 안 되겠어.”

“뭘 안 돼요.”

“저기로는 못 갈 것 같아.”

조금 전에 봤던 작은 소녀가 딱 봐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영한은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다.

“나, 난 차로 돌아갈래.”

“여기까지 와 놓고요?”

“난 갈 거야.”

유영한은 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고천수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솔직히 저렇게 겁을 먹었다면 데려가는 것도 어려웠다.

“악……!”

하지만 그냥 조용히 내려갔으면 되는데, 유영한은 걸음을 서두르다가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컥?”

넘어져서 계단을 구르고 내려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또 하나의 작은 소녀였다.

“어?”

고천수가 그걸 보며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새롭게 나타난 작은 소녀는 유영한을 붙잡고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끄아악! 끄아아아악!”

작은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는 힘이었다. 살갗이 찢겨 나가던 유영한은 고천수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사,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비명이 너무 커서 주변에 있는 몬스터를 죄다 모을 기세였다. 고천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왜 내려가서……!”

무작정 살려달라고 한다고 이번에도 구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천수는 작은 소녀가 이쪽도 쳐다볼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맞네. 사일런트 걸.

그때, 고천수는 시청자의 채팅을 확인했다.

-맹인인데 소리 듣고 움직이는 그거?

고천수는 그 말을 보고 안도했다.

시력이 없다니 이쪽을 확인할 일도 없다는 뜻 아닌가.

땡땡그랑!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또다시 위쪽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이젠 조용해진 유영한을 뜯고 있던 아래쪽의 사일런트 걸이 고천수가 있는 계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개망할…….’

그 소리를 확실히 들었다는 듯, 사일런트 걸이 갑자기 계단 쪽을 걸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천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댈 수밖에 없었다.

[띠링! 새로운주인 님이 보상 미션을 설정하였습니다.]

[새로운주인 님의 미션 - 눈앞의 사일런트 걸이 곁을 지나쳐갈 때까지 가만히 있기.]

[새로운주인 님의 보상 - 접촉한 대상의 청각을 상실시킬 수 있는 1회용 스킬. 1분 제한.]

미션이 들어왔다.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시청자들은 한도초과를 밀어내려고 나타난 존재라며 키득거리기만 했다.

‘후…….’

하지만 당사자인 고천수는 미칠 노릇이었다.

‘미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가오는 사일런트 걸의 모습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보지 못한다는 두 눈은 긴 머리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뜻언뜻 입술을 이죽거릴 때마다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이빨은 날카로우면서도 핏자국까지 묻어 있어 섬뜩했다.

보통의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더 다가오기 전에 옆의 에스컬레이터로 몸을 빠르게 피신하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큭.’

사일런트 걸의 청각을 없앨 수 있는 스킬이라면 지금 쓰고 싶었다.

하지만…….

터벅터벅.

이제 코앞까지 다다른 사일런트 걸을 보면서 고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늦었다.

-야, 천수 표정 봐라.

-꼬마한테 이렇게 쫄면 되겠냐. ㅋㅋㅋㅋ

-방금 사일런트 걸이 천수 쳐다보지 않았음?

마지막 말에 고천수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 와중에 사일런트는 고천수의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꿀, 꺽.

마른침이 고천수의 목으로 넘어갔다.

‘들렸나?’

들렸다면 옆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몸을 날려야 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나눠 놓은 낮은 벽이, 아주 잠깐은 고천수를 보호해 줄 것이었다.

‘들렸냐고……!’

이제 손만 살짝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터벅.

사일런트 걸이 고천수의 옆을 한 뼘 차이로 지나쳐 갔다.

하아, 라고 한숨조차 쉬지 못했다.

아직도 사일런트 걸은 지척에 있었다.

고천수는 눈만 돌려서 그녀의 뒤를 시선으로 쫓았다.

[미션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부여합니다.]

[정보는 스킬창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억겁 같던 시간이 지났다.

고천수는 사일런트 걸이 완전히 올라가서 시야에서 모습을 지워 버리고 나서야 숨을 뱉어 낼 수 있었다.

“후, 후우.”

누구처럼 주저앉을 뻔했다.

고천수는 희생당한 유영한의 잔해가 남은 곳을 돌아보았다.

“젠장.”

고천수가 가야 할 길은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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