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택시 기사 뽑아요
복도로 나간 고천수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뭐야.”
황당함에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복도에 조용진이 엎어져 있던 것이다.
“뭔 일이야.”
고천수가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조용진 하나밖에 없었다.
“야, 뭐냐고.”
“……끄응.”
고천수에게 어깨를 붙잡힌 조용진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너, 넘어졌어.”
“넘어졌다고?”
“어, 혼자…….”
한숨을 쉰 고천수는 조용진을 놓으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말아 줄래? 뭐라도 나타난 줄 알았네, 진짜.”
“미안. 근데 지하실로 가는 계단에서 자꾸 소리가 나길래. 알려주러…….”
“소리가 난다고?”
굉장히 수상쩍었다.
아니, 그냥 위험하다고 봐도 됐다. 지하실에서 뭐가 올라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천수는 조용진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여기 키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찾고 있어. 여차하면 바로 빠져나가야 하니까.”
-다리 삐꾸라 혼자 못 도망갈 거 알고. ㅋㅋㅋ
-오진다 진짜. 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의 반응은 무시하고 고천수는 다시 한번 조용진에게 말했다.
“키 꼭 찾아라. 안 그러면 진짜 위험하니까.”
“아, 알았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조용진을 놔두고 고천수는 의무실 쪽으로 향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의무실 바로 근처에 있었다.
“후.”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고천수는 잠시 계단 입구를 보고 있다가 의무실로 들어갔다.
조용진을 데려가려면 목발 정도는 필요했다. 저런 상태로는 진짜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귀찮게 하네, 진짜.”
여러 캐비닛을 뒤지고 다니던 고천수는 마침내 목발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일단 됐고.”
남은 건 양민철 쪽이었다.
안전을 확인하려면 이쪽에서 지하실로 내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잘못하면 벌집을 쑤시는 꼴이 될까 봐 고천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키를 찾을 때까진…….’
정보의 단서가 여기 있던 걸 보면 이 장소에도 시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을 망치게 될까 봐 고천수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양민철이 알아서 지하실을 빠져나와 주길 바랄 뿐이었다.
땡그랑.
지하실 계단 쪽에서 울림이 있었다.
고천수는 화들짝 놀라며 목발을 가지고 복도로 나갔다.
-야, 벌써 올라오는 건가?
-뭐가 올라와?
-지하실이면 이번에도 그놈이지 뭐.
시청자들의 반응이 수상쩍었다.
고천수는 고민하다가 다시 사무실로 뛰어갔다.
“조용진! 키 찾았어?”
“어……? 아, 아직.”
고천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조용진에게 다가가 목발을 쥐여 주었다.
“그럼 이거나 받고 다시 의무실 쪽으로 가 있어.”
“어, 어? 근데 거기 좀 무섭…….”
“거기 복도로 가서 뭐가 올라오면 소리만 쳐 줘도 되니까.”
그 말에 조용진은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너 나 버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뭐?”
“경고용으로만 쓰고 버리려는 거 아니냐고!”
조용진이 목발을 꽉 집고 치켜세웠다.
“그놈들이랑 똑같이……! 경계만 시키다가 죽게 하려고……!”
“하.”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고천수는 사무실의 서랍을 뒤지면서 말했다.
“누가 너 경계병 시켰냐?”
“그래! 괴물들이 몰려온다고 했는데……! 다들 지원은 안 보내고 내빼려고 했어! 날 놔두고!”
조용진은 당시 상황이 생각나는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도 날 살리려고 안 했어!”
“뭔 소리야.”
무슨 몬스터가 나타났던 건지 고천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경계병을 살리기 위해 뒤에서 지원을 보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넌 제 역할을 했고 그 사람들도 제 역할을 한 거겠지. 궤멸할 것 같아서. 너한테 피하라고는 아무도 말 안 했어?”
“피하라고는 했지만……!”
“그럼 맞네. 그땐 그게 최선이었던 거.”
하지만 조용진은 억울한 듯 표정을 구겼다.
“피할 수가 없었다고! 지원 없이 피할 수는 없었어!”
“근데 피했잖아.”
그러니까 여기 살아 있는 것이리라.
“나는 뭐 유령이라도 보고 있는 거냐, 용진아.”
“우, 운이 좋았던 거라고! 안 그랬으면 살 수 없었어!”
“그래?”
고천수는 서랍을 뒤지는 걸 멈추고 조용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잘도 떠드네, 자식이.”
“뭐, 뭐?”
“민철이 네가 내려 보냈지?”
그 말에 조용진이 순간 멈칫했다. 고천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떠듬떠듬 다시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소리야. 난 소리가 난다고 했을 뿐이야. 내려간 건 자발적으로…….”
“왜 안 말렸는데?”
본인은 그런 일을 겪어 놓고, 고등학생인 양민철을 혼자만 내려가게 놔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왜 안 말렸냐고. 오히려 확인 좀 해 보라고 한 거 아냐?”
“……나, 난.”
“운도 참 좋지.”
고천수는 뇌까리듯 말했다.
“확인 좀 해 달라고 하면 그대로 해 주는 어수룩한 고등학생도 있고 말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조용진은 괴로운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확인 좀 해 보자고 했던 것뿐이야! 아, 아래 별 거 없을 거야! 곧 올라올 거라고!”
“어, 그래.”
“크윽……!”
더 이상 조용진은 참지 못했다.
그는 목발을 짚고 걸음을 옮겼다.
“찾아올 거야! 찾아오면 되잖아!”
“…….”
“그거면 되는 거잖아!”
고천수는 조용진을 말리지 않았다. 가만히 조용진이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와, 자기한테 온 화살 그대로 돌려주는 거 보소. ㅋㅋㅋ
-그러게. 누가 우리 천수 괴롭히고 그랫!
-역관광이면 역시 우리 천수지.
“역관광이라뇨. 그냥 시험해 본 거죠.”
적어도 이쪽 말을 들을 정도의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확인해 본 것뿐이었다.
대충 검증은 끝났다.
조용진은 양심은 있었다.
“형님들, 키도 안 나오고 말이죠.”
아무리 찾아도 역시 키는 없었다. 택시 기사 지원서나 업무 보고서 같은, 지금으로서는 잡다한 서류만 보일 뿐이었다.
그에 더해서,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에 비해서 아직 지하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걸어서 여길 나가라는 신호일까요?”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키를 가진 누군가를 제가 만나야만 하는 걸까요.”
-ㅋㅋㅋㅋㅋ
-이제야 알았네.
-그래도 눈치는 좀 있고만, 천수!
“예, 단서를 주시니까요.”
이번에도 ‘그놈,’이라는 시청자의 표현은 명서 초등학교의 빌런들을 가리킬 때 나왔던 것이었다.
그걸로 약간 추측해 봤을 뿐이었다.
“사람까지 상대하고 가야 하는 건가.”
고천수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형님들이 엄청 재촉하지 않는 걸 보니까, 제 선에서 충분히 감당은 가능한가 보네요.”
-그건 천수가 판단할 일이지.
반응이 돌아온 순간, 어디선가 외침이 있었다.
“여기! 여기로 와봐!”
조용진의 목소리였다. 고천수는 곧장 사무실을 나가 복도를 달렸다.
문제의 장소는 지하실 계단 입구였다.
조용진이 복도에 서서 그 입구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올라왔어.”
조용진의 말대로 입구에는 양민철이 서 있었다.
“혀, 형…….”
그리고 그 뒤에서, 날카로운 식칼을 들고 있는 뚱뚱한 중년의 남자가 그를 붙들고 서 있었다.
“형 위험해요. 그냥 가세요.”
“하.”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몬스터보다 더 짜증나는 부류였다.
“그냥 가긴 뭘 그냥 가냐.”
키를 누가 가지고 있을지 뻔한 상황이었다. 고천수는 단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기요.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민철이 좀 놔주시겠습니까?”
“민철? 아아아아.”
남자는 살짝 풀어진 눈으로 중얼대듯 말했다.
“내 건물에 침입한 이 도둑놈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칼을 양민철에게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도둑놈을 그냥 놔주는 사람은 없잖아.”
“…….”
도둑놈이라,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만 남자는 그냥 제정신이 아닌 걸로 보였다.
“그리고 너희! 너희도 도둑놈이지! 손님들 콜 받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기어 들어와서 말이야! 기사는 부족하고 머리 아픈데!”
“저, 저거, 위험한 거 아냐?”
옆에서 조용진이 숨을 삼키듯 말했다.
“미친 것 같아. 진짜 찌르면 어떡해.”
“그러게 왜 애를 내려가게 놔둬.”
고천수의 말에 조용진이 죄책감에 휩싸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조용진을 고천수는 더 까댈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저 남자가 문제였다.
‘그 지역 유지네.’
뉴스에서 본 얼굴과 완전히 일치했다. 손님들 콜 받는다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왜 무전실이 그렇게 되어있는지도 알만했다. 지하실에 들어가 있던 건 본관용 발전기라도 조작한 것일 터.
고천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공격해서 주머니 뒤질까.’
하지만 그랬다간 양민철이 위험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키를 구해야 하는 게 고천수의 입장이긴 했지만, 다른 방안이 있으면 찾고 싶었다.
양민철이 눈앞에서 칼에 찔리는 모습을 보는 건 아무래도 끔찍한 일이 될 테니까.
“저기요, 사장님.”
그래서 고천수는 똑같이 제정신이 아닌 놈이 되어보기로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도둑놈이라니.”
고천수는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택시 기사 지원하러 왔는데.”
피난 흔적 사이에 있었던 여러 장의 택시 기사 모집 전단지들.
콜은 많은데 기사는 적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여기 제격인 사람이 있었다.
“콜이 많다고요? 저도 받게 해주세요. 운전 잘합니다.”
“뭐?”
“택시 기사 시켜주십셔.”
말도 안 되는 대화에 채팅창의 반응이 폭발했다.
-ㅋㅋㅋㅋ 아나, 미쳤나.
-갑자기 분위기 면접.
-진짜 이놈은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어있는 거야. ㅋㅋㅋ
“사장님! 얘기는 뉴스에서 많이 봤습니다! 면접 기회를 주시면!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흐, 음.”
남자는 잠시 턱에 손을 올리며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면접. 그러고 보니까 면접 봐야지. 기사 뽑아야 돼. 부족하거든. 많이 뽑아야 되는데. 부족해서. 부족.”
칼을 들고 있는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잘하면 양민철을 놓아 줄 듯했다.
“아.”
하지만 그건 고천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을까.
남자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지원서는?”
“지원서…… 말입니까?”
고천수의 반문에 남자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 지원서. 그게 있어야 보고 면접을 보잖아. 자네, 지원서가 있었던가? 있으면 보여 주겠나? 안 그러면 면접을 진행할 수 없어. 나 무척이나 바쁜데 말이야. 지원서가 없으면 어쩌지?”
그 모습을 보고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아, 썅.’
잘되나 싶더니 역시 쉽지 않았다.
‘생각해 봐, 고천수……. 지원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지원서만…….’
“아.”
고천수는 남자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지원서, 있죠. 그렇고말고요.”
“정말인가? 어디 있지? 보고 싶네만. 아무래도 기사가 부족해서. 빨리 충원해야 돼. 빨리.”
점점 더 상태가 이상해지는 남자를 보고 고천수가 조용진을 불렀다.
“야, 뭐 하나만 부탁하자.”
“뭐, 뭔데.”
“아까 우리 갔던 사무실 기억하지?”
그때 분명히 ‘택시 기사 지원서’라고 대문짝하게 박힌 서류를 발견했었다. 심지어 누군가 지원했던 내용까지 그대로 적혀 있는 것도 있었다.
“거기에 택시 기사 지원서 있거든. 가서 가져와.”
“아무거나?”
“이 친구가.”
고천수는 남자를 힐끔 쳐다본 뒤 조용진에게 속삭였다.
“제일 그럴 듯한 걸로.”
그 말에 조용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진은 그렇게 절뚝거리며 사무실로 출발했다. 고천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남자에게 말했다.
“사장님, 걱정 마십쇼. 지금 제 친구가 제 지원서를 가지러 갔습니다. 제가 사무실에 두고 왔었거든요.”
“그런가?”
남자는 다행히도 고천수의 말을 믿어 주었다.
“지원서가 있다니 다행이네. 잠깐 의심할 뻔했지 않은가.”
“아, 하하.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요새 세상이 워낙 험해서 조심하게 될 수밖에 없어. 내 건물에 막 들어오고 그러면 놀라지 않는가. 택시 기사를 지원하러 왔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남자는 기괴한 표정으로 감동을 드러냈다.
“이렇게 세상이 험난한 와중에도 기사를 지원하다니, 얼마나 건실한 청년인지 모르겠네. 빨리 지원서를 보여 주게나. 아, 설마 없는 건가?”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역시 남자는 맛이 완전히 가 버렸다. 고천수는 가급적 안전하게 양민철을 빼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면 물리적 충돌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고천수는 조용진을 기다리며 주변을 조금씩 둘러보았다.
남자를 효과적으로 상대할 물건이 있는지 찾는 것이었다.
‘빨리 와라, 용진아.’
그렇게 고천수가 떨리는 숨을 내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