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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4화 (24/224)

024. 단서의 목소리가 들려

“민철아, 주변에 뭐 달려드는지 망 좀 봐 줘.”

“네, 형.”

양민철을 근처에 세워 두고 고천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레토나에 접근했다.

“한 명뿐인가……?”

일단 창으로 보이는 건 운전사 한 명뿐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려 봤지만 운전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좀비된 거 아니냐?

-깨어나면 찌를 준비해야 할 듯.

-근데 나무 막대기 어디 감?

그건 빅 헤드한테서 도망치다가 떨어뜨려 버렸다.

고천수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오래잖아 운전사가 살짝 눈을 뜨고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사람이네요.”

팍!

고천수는 레토나의 창문을 뜯어냈다.

‘역시 똑같네.’

군용 레토나는 창문이 비닐로 되어 있었다. 문의 잠금까지 풀어낸 고천수는 운전사의 상태부터 살폈다.

‘이름은 조용진. 계급은 일병.’

“총은 없나?”

그러면서 레토나 안을 살폈지만,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 K2 정도는 들고 나왔어야지. 진짜 짜증나게 하네.”

“너, 넌 뭐야…….”

살짝 정신을 차린 운전수, 조용진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며 말했다.

“나, 난 아무것도 없어. 그냥 가.”

“아무것도 없긴.”

고천수는 발로 조용진의 손목을 찼다.

“으악!”

조용진이 놓친 단검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고천수는 그것을 주워 들고 씨익 미소를 그렸다.

“여기 가져갈 거 있고만.”

“……끄, 으응.”

그러자 조용진은 겁먹은 표정으로 호소했다.

“가, 가지고 싶으면 가져. 대신 건들지 말아 줘.”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정해.”

고천수는 조용진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너 탈영병이잖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세계에서 일병이 혼자 레토나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정상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고천수는 레토나에 올라 조작을 시도했다.

“아나, 정말.”

하지만 불행히도 기능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차도 다 부숴먹었네.”

고천수는 다시 차에서 내려서 단검을 조용진에게 들이밀었다.

“너 뭐 하다 나온 놈이야. 배신 때리고 혼자 도망쳐 나온 거냐?”

“아냐. 아니야.”

조용진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다 죽어서……! 나라도 도망친 거야! 진짜야!”

“격하게 반응해서 더 의심스러운데.”

“형.”

그새 양민철이 다가와 고천수에게 말했다.

“그 사람, 군인인가요?”

“그래, 딱 봐도 군인…….”

아니, 그건 알 수 없었다. 고천수는 조용진의 옷깃을 붙잡았다.

“뭐,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봐.”

조용진의 상의를 풀어헤친 고천수는 그의 목덜미에서 군번줄을 발견했다.

그 군번줄에 달린 인식표를 붙잡아 자신만 보면서 고천수는 조용진에게 물었다.

“군번.”

“뭐?”

“군번 대 보라고. 외웠나 보게.”

남의 옷을 빼앗아 입은 놈이 군번줄까지 달고 있을 리는 없지만, 고천수는 뭐든 확실히 하고자 했다.

“2…….”

그렇게 포문을 연 조용진은 작은 목소리로 군번을 전부 읊었다.

고천수는 그게 인식표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군번줄을 놔 주었다.

“맞네. 조금 의심이 가시긴 한다 야.”

“형, 우리 이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옆에서 양민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계속 밖에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렇긴 해.”

고천수는 레토나의 보닛 위에 올라섰다.

“민철아, 대문 타고 넘어가자. 여기 올라서면 위에 홈이 잘 잡힌다.”

“형, 이 사람은요?”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데?”

고천수의 말에 양민철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도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저, 저기!”

그러자 조용진이 손을 들고 고천수에게 외쳤다.

“데려가 줘! 나 다리뼈에 금이 간 것 같아! 이렇게 혼자서는……!”

“언제는 그냥 건들지 말아 달라며.”

“그건 네가 날 해칠까 봐 그런 거야!”

고천수는 조용진의 다리에 시선을 가져갔다. 피로 얼룩져 있는 걸 보니 어디 세게 부딪힌 것 같기는 했다.

-아, 천수 인성 나오나요. ㅋㅋ

-두고 가자.

-구할 수 있어도 안 구하는 게 천수지.

“형님, 방금 말은 좀 심했네요.”

고천수는 시청자들에게 대꾸하며 점프해 대문을 붙잡았다.

“끄응.”

신음을 토해 내며 대문을 넘어간 고천수는 옆의 경비실에서 대문을 여는 버튼을 찾아냈다.

툭.

하지만 전기가 끊겨 있어 대문은 자동으로 열리지 않았다.

“후. 가지가지 하네.”

생각해 보니 야밤에 불빛도 보이지 않았던 터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이제 다 전기가 나가 버린 게 분명했다.

덜컹.

결국 수동으로 돌리고 대문을 잡고 횡으로 잡아당겼다.

슬라이딩 방식의 대문이 천천히 움직였다.

“양민철! 그쪽에서도 좀 옆으로 당겨 봐!”

무게가 상당했기에 양민철의 손을 빌렸다.

드르르륵.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나간 고천수는 레토나로 이동해 기어를 중립에 두고 핸들을 똑바로 바꿨다.

“읏차.”

밖으로 나와 손으로 밀자 레토나는 살짝 언덕이었던 이곳에서 뒤로 밀려서 내려갔다.

“형, 뭐 하는 거예요……?”

“누가 또 타고 넘어올까 봐.”

그러고 고천수는 조용진을 가리켰다.

“좀 맡겨도 되겠지?”

“네?”

“혼자서는 못 걷는 것 같으니까 데려와 줘. 버리고 싶지 않다면.”

“아, 네!”

일을 시키는 건데도 양민철은 기쁜 표정으로 조용진에게 달려갔다.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실없기는.”

아직 고등학생이라 세상의 쓴맛을 못 봤는지 너무 긍정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듯했다.

‘아니, 그건 아닌가.’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도 긍정적이면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심성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고천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문 안쪽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양민철은 조용진을 부축해서 그 뒤를 따랐다.

***

“와, 형. 여기 엄청나네요.”

안에 들어선 양민철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어느 도시를 가든 여기 택시 회사만큼 잘되어 있는 곳은 드물 것이었다.

“그치? 뭐, 평소엔 대부분 택시 회사에 별 관심 없어서 몰랐을 테지만.”

여기 택시 회사는 자수성가한 이 지역의 유지가 만든 것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택시 기사를 했었다는 게 이유였다.

아버지가 생각났기에 이렇게 택시 회사를 으리으리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형은 진짜 별 걸 다 알고 있네요.”

“그거 칭찬 맞겠지?”

차들이 늘어선 곳을 걸으면서 고천수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뭐. 나 진짜 별 거 다 알고 있긴 하지.”

방구석 백과사전.

고천수는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게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면 의외로 정보를 많이 모으게 되기도 했다.

할 게 인터넷 망령 짓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고천수는 잡학과 뉴스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기에, 이런 세계에서도 꽤나 도움이 된다는 것이랄까.

“차가…….”

운전수여서인지, 조용진은 남아 있는 택시들을 보며 반색하고 있었다. 고천수도 그와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총 4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키를 찾아볼 만했다.

‘근데 문은 왜 닫혀 있던 거지?’

이곳에서 차가 빠져나갔다면 문은 열려 있어야 했다.

고천수는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주의할 필요가 있겠네.”

“네? 형 뭐가요?”

“안에 누가 있을 수도 있어.”

눈앞에 있는 본관은 2층짜리 건물이었다. 아주 크지는 않아도 누가 숨어 있기에 작은 크기도 아니었다.

덜컹.

본관의 문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고천수는 주변을 살펴본 뒤에 손짓했다. 양민철이 조용진을 데리고 천천히 진입했다.

“아무도…… 없네.”

조용진의 중얼거림대로 안은 누군가 피난한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택시 기사 모집을 위해 쓰는 전단지도 지금은 아무 의미 없이 바닥에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사장이 문 잠그고 갔나 보네.

-근데 왜 여길 버리고 가지?

-그러게. 나 같으면 여기 짱박힐 듯.

고천수도 시청자들의 의견에 공감했다. 담이 높은 만큼 웬만한 몬스터는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빅 헤드 같은 것 때문에 담이 있다고 안심할 수도 없지만…….’

명서 초등학교에 있는 경찰들처럼 화력이나 결집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이런 담벼락도 소용없을 수도 있었다.

“형, 저기……!”

양민철이 가리킨 곳에 의무실이라고 되어 있는 곳이 있었다.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서 부목이라도 해 줄 수 있는지 보고 와. 나는 할 일이 있으니깐.”

“형.”

양민철이 고천수의 팔을 붙잡았다.

“저랑은 계속 가는 거겠죠?”

“뭐, 아마도.”

모호한 대답만 하고 고천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민철이는 여기 머무르게 하는 게 나으려나.’

담을 무력화시킬 몬스터가 있긴 해도, 아직 담은 건재하고 안에 자판기나 식당 같은 시설이 있었다.

양민철에게 거점으로 삼으라고 하기에는 나쁜 장소가 아닐 수 있었다. 별일만 없다면 고천수도 하루 이틀 정도는 여기 머무를 예정이었다.

“형님들, 저 여기 민철이 두고 가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벌써부터 두고 갈 생각부터 하는 것?

-양민철 길은 잘 익히던데.

-근데 넘 착해서 위험함.

고천수는 신음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차차 정해야 할 듯했다.

뚜벅뚜벅.

2층에 올라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고천수는 마침내 예정했던 장소에 이르렀다.

“있네.”

문고리를 잡으려니 안쪽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고천수는 문을 열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여기는 막혔…….』

『다들 어디에…….』

『피난처.』

온갖 잡다한 소리가 다 섞여있었다.

고천수는 이게 이 문 안쪽의 사람에게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기에는 여러 테이블과 함께 무전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제주도는 안전하다고 하던데…….』

『……기차가 지나다니는 걸 봤…….』

『이 도시에서 나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돼! 다들 듣고 있어?』

다수의 통신이 고천수의 귓속으로 쑤셔져 들어오고 있었다.

“뭐야, 이건.”

고천수가 기기를 작동할 필요도 없었다. 수십 km 안에 있는 기사들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통신 대화가 이곳을 떠돌고 있었다.

『7.5사단이 제주도로 가라고 했대!』

『서둘러! 이 도시에서 빠져나가!』

『기차를 타고 일단 대전으로…….』

엄청난 양의 정보에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원래 이런 건가?’

기기들이 전부 작동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대화가 전부 밖으로 들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전기가 들어와 있잖아.’

위에 형광등에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고천수는 긴장하다가 순간 중얼거렸다.

“정보창.”

[상시 정보 :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정보 1 : 기차역으로 이동하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보가…… 활성화됐어?”

무전으로 전해 들은 내용이 단초가 되어 개방된 것인지 새로운 정보가 나타나 있었다.

-와, 드디어 기차역이여.

-본격 스토리 기대된당.

-천수 고생길이 환하구먼. 따흐흑.

“뭡니까, 형님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무슨 분기점이라도 되는 겁니까?”

답은 없었다. 고천수는 일단 잠시 가만히 서서 무전의 내용을 더 들어보았다.

하지만 특별한 내용은 더 없었다.

직접 마이크를 붙잡고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어째서인지 이쪽에서는 불가능했다.

“전화는…… 여전히 안 되고.”

이건 통신사가 문제라는 설정인지 폰은 계속 먹통이었다.

어쨌든 지금 신경 쓸 건 이게 아니었다.

지표가 될 만한 내용은 얻었고, 이 건물에 왜 전기가 들어와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민철아.”

1층으로 내려간 고천수는 곧장 의무실로 향했다.

“양민철……?”

하지만 찾아봐도 양민철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민철이는 어디 갔어.”

부목을 하고 홀로 침대에 앉아 있는 조용진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지하실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하니까 확인하러 내려갔어. 나는 기다리고 있고.”

“이런 망할!”

이런 때에 소리가 난다고 혼자 내려가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고천수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조용진이 자기를 혼자 두지 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실로 간 고천수는 급하게 택시 키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 거냐……!”

빨리 여기서 나가야 했다.

누군가 여기에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분주히 손을 움직일 때였다.

“으아악!”

비명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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