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배수로 (1)
“형, 진심인가요?”
양민철은 고천수가 데려간 곳 앞에 서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자자고요?”
양민철이 가리킨 곳은 어떤 건물이 아니었다. 움푹 파인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왜? 좋지 않아?”
고천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물이 안 흘렀는지 안에 말라 있기도 하고, 아무도 관심 안 가질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렇기는 한데…….”
“주위는 어두운데 피로까지 너무 쌓였어. 여기는 외곽이라 별 거 없어 보이니까, 괜한 모험하지 말고 좀 쉬자.”
앞에 있는 건 작은 배수로.
사람 한 명이 약간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우리는 여기 콘크리트 천장이 있는 배수로로 기어 들어가서 자면 돼.”
천장의 길이는 눈대중으로 보기에 대략 4미터.
둘 중 2미터가 넘는 장신은 없기 때문에 딱 들어가서 누우면 알맞을 것이었다.
“일단 검사부터 해야겠지?”
고천수는 손전등으로 배수로 안쪽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네.”
“안전한 건가요?”
“그래, 안전해. 이제 출입구부터 막아 볼까?”
여유롭게 답한 고천수가 길가에 있는 커다란 돌덩이를 들고 낑낑대자니, 양민철이 다가와 도왔다.
“이, 이걸로 입구 막는 건가요?”
“어엉.”
겨우 돌덩이를 가져다 놓은 고천수는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겁나게 무겁다. 네가 좀 해라. 젊잖아.”
“…….”
양민철은 고천수를 빤히 쳐다보더니, 살짝 한숨만 쉬고 돌덩이들을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고천수는 그런 양민철을 향해 소리쳤다.
“아! 한쪽 입구는 아직 막으면 안 돼! 그 앞에 쌓아 놓기만 해!”
-양민철 표정 굳는 거 봤냐.
-ㅋㅋㅋㅋ 살려준 은혜도 잊을 듯.
-근데 진짜 저기서 잘 거냐?
당연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고천수에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디 보자.”
고천수는 아직 막지 않은 입구로 가서 머리부터 천천히 몸을 안쪽에 들여 놓았다.
“내가 먼저 들어가도 되지?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고생스러우니까 내가 배려해 주는 거야.”
“아, 감사합니다.”
돌을 나른 노동의 대가는 그 배려로 되었는지, 양민철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실없기는…….”
작게 중얼거린 고천수는 끝이 날카롭게 꺾인 굵은 나무 막대기 하나를 손에 쥔 채,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야, 이거 꼭 관 같은데.’
누워서 쉴 수는 있지만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이 약간 좁았다. 이래서야 그냥 죽은 듯이 잘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너무 피곤했다. 몸을 거꾸로 해서 따라 들어온 양민철이 돌덩이로 입구 쪽을 막는 것을 본 뒤에, 고천수는 바로 눈을 감았다.
잠은 금방 들었다.
침대에서 잤던 때보다 더 빨리 말이다.
***
“끄응.”
아침.
이런 세상에서도 지저귀는 새소리에 다시 눈을 뜬 고천수에게 느껴진 건, 감당하기 힘든 격통이었다.
“아, 시바. 역시 맨바닥에서 자는 건 이래서…….”
크아아아아.
근처에서 들린 괴성에 고천수는 입을 다물었다.
‘좀비인가.’
기척으로는 한 마리로 추정됐다. 조용히만 하고 있으면 알아서 지나갈 것이었다.
“으음…… 형, 일어났어요?”
다만 타이밍 안 좋게 양민철이 일어나 버렸다.
탁.
발을 부딪쳐 신호를 줬지만 불행히도 양민철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 일어났네요! 저도 일어났…….”
크아아아아!
그나마 양민철이 상황을 알아채고 곧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좀비가 기척을 눈치 챈 뒤였다.
철퍼덕.
좀비는 배수로 안쪽에 넘어지며 떨어진 뒤, 다시 반쯤 일어나 양민철 쪽으로 향했다.
크아아!
길을 가로막은 돌덩이들을 밀어내며 괴성을 지르는 걸 들은 양민철이 발로 고천수에게 신호를 줬다.
‘아유.’
고천수는 소리 없이 발버둥을 치는 양민철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일 꼬였네. 잠깐만 기다려라.’
그래도 고천수는 양민철이 저 살겠다고 밑으로 무작정 비명을 지르며 내려오지는 않는 게 기특했다.
혹시 이런 일이 있을 때 발로 머리까지 찰까 봐 이렇게 자리를 잡은 거였는데, 양민철은 자기만 생각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탁탁.
발로 신호를 주며 고천수는 손전등으로 양민철을 비췄다.
시선을 마주친 양민철에게 고천수가 속삭이듯 말했다.
“소리 내. 크게.”
“네? 아! 아아아아!”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양민철이 좀비의 시선을 끌었다.
고천수는 바로 자신의 머리맡에 놓인 돌덩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겁나게 무겁네, 진짜.’
돌덩이들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소리가 울렸다.
다만 반대편에서 양민철이 계속 좀비를 도발하고 있는지라, 이쪽으로 좀비가 올 일은 없었다.
“후.”
나무 막대기를 먼저 밖으로 휘적거린 뒤, 고개를 살짝 내밀어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짜 이게 무슨 고생인지.”
바깥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고천수는 굳은 몸을 스트레칭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좀비 한 마리가 여전히 양민철의 머리맡 배수로 입구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얘는 내가 탈출한 거 모르나?’
양민철이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애 좀 그만 괴롭혀라!”
결국 고천수가 윽박을 지르자 좀비가 고개를 돌리며 완전히 일어났다.
[어그로 1 - 09:57]
또다시 스킬의 시간이 흐르는 걸 보며 고천수는 적당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너희 좀비는 잠잘 때 예의도 없냐?”
휙!
고천수가 신경질적으로 던진 돌멩이가 그대로 좀비의 머리에 직격했다.
크아아악!
화난 좀비가 배수로를 빠져나왔다. 고천수는 오히려 손짓을 해 좀비를 더욱 도발했다.
“응, 들어와, 들어와.”
완전히 그에게 유도당한 좀비가 마침내 달려와 손을 뻗었다.
배수로 옆에 서 있던 그는 잽싸게 물러서며 그 공격을 피해 냈다.
콰당!
불쌍한 좀비는 그대로 또 배수로에 몸을 처박았다.
“어휴, 아크로바틱하네.”
고천수는 커다란 돌덩이를 들고, 넘어져 있는 좀비의 머리에 떨어뜨렸다.
콰직.
더 볼 것도 없이 좀비는 곧장 비명횡사했다.
[띠링! 한도초과 님이 1젠 후원! - 방금 건 좀 위험했다.]
한도초과의 후원을 보며 고천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한도초과 님 감사합니다. 항상 챙겨 주시네요.”
위험했던 건 사실이었다. 뾰족한 나무 막대기를 무기로 챙겨 두고 있었지만, 양쪽으로 다 좀비가 몰려들었다면 꽤나 곤란했을 것이었다.
“민철아, 괜찮냐.”
하지만 어제 야밤엔 이 장소가 최선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아침 운동 좀 했다고 생각해라.”
머리맡의 돌덩이들을 치워 주자 양민철이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혀, 형. 좀비는요?”
“내가 박살 냈지.”
기어 나온 양민철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살았네요.”
“그래, 솔직히 간 떨어질 뻔했지.”
운이 조금 안 좋았다.
“그래도 형 덕분에 살았어요. 진짜 식겁했거든요.”
“너도 꽤나 대담하던데. 시키는 대로 좀비도 잘 유인해 줬고 말이야.”
진심이었다. 양민철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게 봐 주시면 감사하고요. 앞으로 좀 더 잘해 볼게요…….”
“그럼 좋지.”
고천수는 다시금 몸을 풀면서 말했다.
“너도 좀 뻐근할 텐데 얼른 몸 풀어.”
근육이 경직되거나 뭉친 상태로 이동하는 것만큼 안 좋은 일도 없었다.
어떤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도망칠 준비는 되어 있어야 했다.
“네가 소리 질러서 여기 있기는 뭐하니까 일단 이동하고 끼니를 때우자.”
“알겠어요.”
“가자.”
걷기 시작하면서 고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가 깨끗했다. 공기가 살짝 찬 것을 느끼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 뜬 지 얼마 안 됐나.’
어두울 때 조금 전의 사달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형, 많이 배고프죠?”
“그래, 격하게 움직였더니.”
양민철이 민망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계속 도움만 받네요.”
“내가 너 살려준 것만 알면 됐지.”
“제가 대신 제대로 된 부엌만 찾으면 따뜻한 요리 해 드릴게요.”
“하.”
고천수가 헛웃음을 뱉자 양민철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거로는 안 되려나요.”
“누가 안 된대냐. 그냥 씁쓸한 기억이 하나 떠올라서 그래.”
“씁쓸한…… 기억이요?”
“응. 정민규라고 있었거든. 너는 그 사람처럼은 되지 말아라.”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듯 양민철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고천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날이 밝았으니 이동에만 주력할 뿐이었다.
“자.”
고천수는 양민철에게 비스킷과 작은 캔 음료를 전했다. 다 명서 초등학교에서 받아 온 것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은 목적지 가서나 먹을 테니까 지금은 이걸로 때워.”
“안 멈추고 계속 가나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어딘가에서 괴성들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다. 괜히 멈추지 않고 가는 게 상책으로 보였다.
“일단 길 안내부터 해 줘.”
고천수도 택시 회사로 가는 방향은 알지만, 어떤 길이 안전한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세상이 이렇게 된 후에 이쪽 길을 걸어온 양민철이 알려줘야만 하는 것이었다.
“저기 지금 괴성 들리는 곳 있죠.”
양민철이 근처의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사족보행으로 다니는 거대한 인간 형태의 괴물을 만났었어요.”
-크롤러다.
시청자들이 곧장 이름을 알려줬다.
-빡세겠는데.
-걸리지 않게 주의해라.
-한 번쯤 쫓겨도 재미있을 텐뎅…….
재미는 무슨.
고천수는 헛웃음을 한 번 내뱉고는 나머지 위험 사항에 대해서도 양민철에게 전해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택시 회사로 가는 길에서 위협이 되는 것은 대부분 좀비로, 고천수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는 사항은 없었다.
“으아아아악!”
한참을 걸어가던 어느 순간, 눈앞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지나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살려줘!”
택시 회사까지는 이제 대략 40분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조용히 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고천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민철아, 숨어.”
양민철은 지시가 있자마자 근처 건물 잔해에 숨었다. 고천수 역시 그런 그의 옆에 몸을 숨기고 밖을 조심스레 내다봤다.
쿵! 쿵!
“아, 시발. 또 빅 헤드냐.”
상대하기도 까다로운 놈을 또 마주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빅 헤드의 관심이 그쪽을 향해 있었다.
“형, 어떻게 할까요?”
양민철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고천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쩌긴 뭘 어째. 우회해서 피해야지.”
“그럼 저 사람은…….”
“민철아.”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저 사람 역할 맡고 싶은 거면 말리지 않을게.”
“아니에요. 가, 가요.”
그래도 말귀는 알아들어서 다행이었다.
고천수가 길을 우회해서 가려고 하자 양민철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형, 잠깐만요!”
“왜.”
“그쪽 길에도 괴물 하나가 있었어요.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말에 고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양민철이 서둘러 설명했다.
“그게, 차례대로 얘기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미리 말하면 헷갈리실까 봐…….”
“뭐였는데.”
고천수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였는지 빨리 알려줘.”
“개구리였어요.”
그 말에 고천수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양민철은 이번에는 확실히 제 역할을 하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뒷모습만 봐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덩치는 엄청 컸어요.”
“진짜냐.”
“네.”
고천수는 살짝 신음을 흘렸다.
‘근처에 헬 프로그도 있다고?’
그야말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좀만 더 가면 되는데 일이 꼬일 대로 꼬여 버렸다.
“민철아, 하나 일러 둘 테니까 기억해 둬라.”
“네.”
“그 녀석은 헬 프로그다.”
미친 듯이 긴 혓바닥을 꼬챙이처럼 사용하는 몬스터였다.
“절대 헬 프로그 정면에 서지 마라. 절대.”
“그거 이름이 헬 프로그인가요? 근데 정면에 서면 어떻게 되기에…….”
“말했잖아. 혀를 꼬챙이처럼 쓴다고. 그냥 바로 꼬치가 되어 버리겠지.”
하지만 아직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헬 프로그가 여기서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었다.
“일단 가 보자.”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고천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아니, 기다려 봐.”
골목을 돌자마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더랬다.
-방금 전에 헬 프로그 본 거지?
-시박, 운명의 만남 오지네. ㅋㅋㅋ
-여기 좀 돌파하기 힘들겠는데?
“형, 왜 그래요?”
“헬 프로그가 여기에 있어.”
“아.”
양민철은 떨리는 한숨을 뱉어 냈다.
“그럼 어쩌죠?”
“글쎄.”
헬 프로그가 한 마리뿐이라면 또 다른 우회 길을 찾으면 되긴 했다.
“일단 이쪽으로 가 보…….”
꾸우우우.
지척에서 빅 헤드의 괴성이 들렸다.
“어?”
꾸우.
사람 하나를 입에 물고 있는 빅 헤드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