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낯선 신호
“하…….”
고천수는 빛줄기를 보며 한숨을 흘렸다.
“대체 뭔데, 저건.”
계속 거슬렸지만 쉐도우를 상대하느라고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다만 굳이 확인을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생존자 아냐?
-딱 봐도 함정이구먼.
-나 같으면 안 감.
시청자들의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고천수는 일단 숨을 고르고 도로 표지판을 살펴봤다.
“명서 초등학교까지 거리가…….”
폰을 꺼낸 고천수는 지도 앱을 켰다.
데이터가 없어도 이미 깔려 있는 앱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3km네.”
확정할 수는 없지만 반경 3km라고 생각해 두면 안전할 듯했다.
“그럼 형님들, 전 불빛이 비추는 대로 가 볼게요.”
-엥? 왜.
-위험한 거 아님?
“저거 모스부호예요.”
물론 고천수가 모스부호를 배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 많은 관객이 들었던 영화 중에 저런 모스부호가 있었더랬다.
“SOS 구조 요청이죠.”
워낙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진 내용이었다.
-그게 함정일 수도 있는 거잖아.
한 시청자의 의견은 타당하고도 지당했다. 괜히 들어가서 위험을 살 필요는 없었다.
“형님들, 하나 물을 게 있습니다.”
쉐도우가 일반인들에게도 보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망할 녀석은 제 눈에만 보이는 겁니까?”
-그건 왜?
-쉐도우는 다른 사람 눈에도 보여.
-근데 어차피 너만 쫓아서 별 의미 없음.
아니, 의미는 충분했다.
“형님들은 저한테 엄청난 정보를 준 겁니다.”
저주긴 해도 이용할 구석은 이제 얼마든지 있었다.
“일단은 이것부터입니다.”
쉐도우에게 쫓기는 사람을 보고 불빛을 켠다?
어불성설이었다.
“모르고 불을 켰던 거라고 해도, 그 방향이 이쪽을 비추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 봤을 리가 없죠.”
그렇다면 쉐도우를 목격했을 터, 그런데도 멍청하게 불을 끄지 않은 걸 보면 상대는 함정을 설치할 만큼 영악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불빛과 이쪽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이쪽을 미리 공격하려고 했다면 언제든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총의 사정 거리까지만 가 보겠습니다.”
야밤에 이동하는 것은 위험했다.
근처에서 안전을 확보하고 머무르려면, 어차피 확인은 필수였다.
깜박, 깜박, 깜박.
고천수는 어떤 몬스터가 숨어 있을지 모를 어둠을 주의하면서, 불빛은 아슬아슬하게 피해 목적지로 천천히 접근했다.
‘바뀌었다.’
불빛이 더 이상 깜박이지 않았다. 그냥 켜진 채로 고정되었다.
고천수는 그 자리에 멈춰서 총을 꽉 쥐었다.
-온다.
시청자가 말한 대로 불빛은 갑자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손전등을 들고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뭐지?”
고천수는 뒤로 조금씩 물러나 엄폐물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다가오던 불빛은 당황한 듯 이곳저곳을 비춰 댔다.
‘바보인가.’
어설펐다.
고천수가 가만히 고개만 내밀고 쳐다보자니, 불빛은 다시 깜박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깜박, 깜박, 깜박.
속도가 급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다시 SOS 신호를 재현하고 있었다.
“흠.”
고천수는 손전등을 꺼내 한 번 엄폐물 밖으로 깜박인 뒤,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탁탁탁탁.
누군가가 급하게 지면을 밟더니 고천수가 방금 있던 곳에 나타났다.
“멈춰!”
고천수는 제2의 엄폐물에 숨은 채로 그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뭐야, 넌! 정체를 밝혀라!”
달빛에 비친 희미한 실루엣으로 봤을 때, 일단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건장한 체격도 아니었다.
등에는 가방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저, 저…….”
누군가는 양팔을 들더니 무릎까지 꿇었다.
“쏘지 마세요!”
“…….”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고천수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달칵.
그렇게 손전등을 켜서 누군가를 비춰보던 고천수는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우리 학교……?”
누군가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 교복이 바로 자신이 나온 남고의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뭐야.”
고천수의 손전등에 비춰진 누군가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키는 고천수보다 작고 체구도 왜소했다.
“겨, 경찰이신가요! 도와주세요!”
심지어 말하는 것까지 너무 허술했다. 고천수는 그 점이 도리어 의심이 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년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너밖에 없냐?”
“네네!”
“그럼 손전등 넘겨.”
고천수는 총을 까딱였다.
“안 들려? 손전등 넘기라고.”
“예? 손전등은 왜…….”
“총 맞을래?”
소년이 순간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고천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빨리 내놔.”
거친 태도에 놀란 건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ㅋㅋㅋㅋ 천수 생각보다 더 쓰레기네.
-근데 대뜸 도와줄 수도 없지 않음?
-그래도 기분이 쪼큼. ㅋㅋ
고천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손전등을 옆에 내려놓고 얼른 내놓으라고 손짓까지 했다.
결국 소년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손전등을 내던졌다.
탁.
그것을 야구공 받듯 잡아 낸 고천수가 한 번 더 총을 까딱였다.
“이번엔 가방.”
“예?”
“가방 내려놔.”
소년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고천수를 보며 하소연했다.
“여, 여긴 제 비상식량밖에 없어요.”
“내려놓으라고.”
“제발요. 차라리 그냥 돌아갈게요.”
제법 애달픈 부탁이었지만 고천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려놔.”
“하지만…….”
“내려놓으라고!”
윽박을 지르자 소년은 순간 몸을 떨었다. 그리고 빠르게 가방을 벗어나 내려놓았다.
“……됐죠? 저 가 볼게요. 이제 가진 거 없어요.”
소년의 얼굴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이럴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한 표정이었다. 고천수는 저런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져 가는 과정이었다.
“가긴 어딜 가. 가방 열어서 내용물 꺼내라.”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는 그냥 도움을 청하려고…….”
“긴말하게 하지 마라.”
고천수의 일갈에 소년은 어쩌지 못하고 가방을 열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안의 내용물을 확인시켜 주었다.
“참치, 라면……. 내가 가진 거랑 비슷하네.”
고천수는 가방을 탈탈 털어 내부를 보여 주는 소년을 보며 만족했다.
“좋아. 이번엔 옷이야.”
“네?”
소년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사색이 되었다.
“오, 옷까지 가져가시겠다는 건가요?”
“네가 위험한지 확인하려는 거야.”
애초에 고천수는 노상강도짓이나 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네가 그 교복만 입고 있지 않았어도 이런 귀찮은 일 안 했어.”
이 나라를 관통하는 3대 연이 무엇이었던가.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니던가.
“진짜 후배라면 네 요청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옷을 왜…….”
“쿨하게 좀 가자.”
어차피 동성끼리니 걸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머뭇거리는 소년을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이것까진 강제하지 않을게. 근데 알아 둬라. 네가 여기서 멈추면 도움 같은 건 없다.”
무장 상태를 확인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이걸 확인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건너갈 수가 없었다.
“……이것까지 확인하면 도와주실 거예요?”
“보고.”
짧게 대답하는 고천수를 보며 소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부 의사는 아니었다. 소년은 곧 옷을 여미는 단추를 풀었다.
탈의, 그리고 다시 착의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고천수는 그제야 미소를 띠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네, 아무것도…….”
“말이 되냐?”
고천수는 인상을 썼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게.”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고천수였다.
허영웅에게는 인사조차 제대로 못하고 나왔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 많았는데, 이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일행이 있는 거네.”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이 소년은 유인책일 확률이 높았다.
-소름이네.
-역시 천수.
-나 지금 물개박수 침.
고천수는 소년이 던진 손전등만 챙겨서 걸음을 옮겼다.
“이건 내가 가져간다.”
그러면서 재빠르게 시청자들에게도 부탁했다.
“형님들, 저 뒤돌았을 때 저 녀석 표정 좀 봐 주세요.”
인간의 본성은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오게 돼 있었다.
“……당신이 뭘 알아!”
일단 고천수의 귀에 닿은 건 원망의 목소리였다.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거기까지는 그냥 들어줄 만한 레퍼토리였다. 떠나가는 고천수를 붙잡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친구들이! 친구들이 대신 죽었단 말이야!”
우뚝.
고천수가 멈춰 섰다.
“내가 겁쟁이라서! 나서다가 대신 죽었다고요! 대신……!”
소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울먹이는 듯했다.
고천수는 뒤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형님들, 부탁드린 건은?”
-ㅋㅋㅋ 뭐, 맡겨 놨나.
-뻔뻔함 지린다.
-그냥 두고 가지 그래?
그러기엔 아까웠다.
소년이 반대편에서 왔기 때문에, 고천수가 앞으로 갈 길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말했지 않은가. 후배의 요청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고.
고천수도 학연은 소중했다.
“이 정도 정보도 안 주실 거면 젠 좀 주세요. 무슨 방송을 공짜로 보십니까.”
-와, 존나.ㅋㅋㅋ
-아니, 갸놈아. 지금 대답하려니까. 그래, 저 놈 표정 순수하다.
-진짜 개억울한 것 같음. ㅇㅇ
팩트 폭격을 당한 시청자들 중 몇이 급하게 정보를 풀었다. 쪼잔하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아니, 젠을 마음대로 못 쏘나.’
고천수는 그런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청자들의 말 대로인지 소년은 이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일을 저지를 거였다면 진즉에 행동을 보였어야 했다.
“하.”
고천수는 결국 감화된 척, 천천히 뒤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그거 진짜야?”
“……?”
“친구들이 널 구해 주다가 죽었다는 거.”
설마 돌아설 줄은 몰랐는지 잠시 어버버거리던 소년이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맞아요! 전 다른 사람들 덕분에 살았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붙어먹겠다?”
고천수의 물음에 움찔한 소년은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건…….”
“뭐,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어?”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이미 시청자들의 도움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자신의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다행히 선량한 것 같네.’
양심이 있다면 편하게 뒤따라오겠다는 말은 못 할 터였다. 충분히 상부상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좋아.”
고천수는 소년에게 다가가 손전등을 켰다.
불빛 때문에 소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은…… 양민철?”
교복 가슴팍의 이름표로 소년의 이름을 확인한 고천수가 말했다.
“같이 가자.”
“네? 정말요?”
“그럼 가짜겠냐.”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했다. 연이 닿은 게 행운이었다.
“단, 내가 가는 대로 가야 해.”
“……어디로 가시는데요?”
고천수는 소년, 양민철이 온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아니, 제가 그쪽에서 왔는데요?”
“넌 원래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
반문하자 양민철은 고천수가 왔던 쪽을 가리켰다.
“명서 초등학교요.”
“명서 초등학교?”
“거기로 모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거든요.”
목적지로 설정한 곳 자체는 의심할 것 없이 순수했다.
“거기는 가지 마.”
고천수는 바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자 양민철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요? 거기로 가라고 들었는데요.”
“거긴 끝장났어.”
-이 새끼, 또 시작하네.ㅋㅋㅋ
-얘한테는 사실 고천수가 빌런 아님?
시청자들의 반응은 상관도 않고 고천수가 말을 이었다.
“난 이쪽으로 가서 도시를 벗어날 생각이야.”
“도시를…… 벗어나요?”
“그래. 물론 그 전에 일단 안전한 곳을 찾아야지.”
새롭게 안정을 취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럼 대체 어디로…….”
“마침 떠오른 장소가 있어.”
사실 명서 초등학교를 떠나기 전 몇 군데 후보지를 물색해 놓았다.
그중에서 지금 상황에서도 안전할 만한 장소를 추려 보자면 한 곳을 꼽을 수 있었다.
“잠깐만.”
고천수는 어리둥절해하는 양민철을 데리고 일단 차로 향했다.
부서진 차를 보고 마른침을 삼키는 양민철을 두고, 차 안에서 필요한 물건이 담긴 배낭을 꺼내서 멘 고천수가 뒤늦게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디로 갈 건지 알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