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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8화 (18/224)

018. 배신의 대가 (2)

“고천수 씨, 그건 뭡니까?”

허영웅은 고천수의 손에 들린 페트병과 잔 두 개를 보면서 물음표를 띄웠다.

“아, 이거요?”

상황에 맞지 않는 물건들이건만, 고천수는 오히려 태연하게 답했다.

“최후의 한 잔이라고 합니다.”

“최후의 한 잔…… 이요?”

허영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왜…….”

“두고 보면 압니다.”

고천수는 잔들을 이서준과 진경호에게 각각 내밀었다.

“자, 하나씩 드세요.”

“…….”

이서준은 명백히 경계하는 눈초리로 고천수를 쳐다보았다.

손이 부서져 있는 진경호는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 한 명은 잔을 들 수가 없을 테니까, 다른 사람이 대신 먹여 주도록 하죠.”

고천수는 이젠 잔 두 개를 다 이서준에게 내밀었다.

“이서준 씨, 드세요.”

“무, 무슨 생각이야.”

“들어.”

고천수는 싸늘한 눈으로 이서준을 노려보았다.

“곧 너희가 목마를 거라서 허락해 주는 자비야.”

“목이 마를 거라고……?”

“그래. 그러니까 받아. 빡치게 하지 말고.”

고천수의 거친 말투에 이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도 고천수를 향한 의중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이서준은 더 이상 거부할 힘이 없었다.

달그락.

잔 두 개를 받아들고 어설프게 내밀자, 고천수가 페트병에 있던 음료로 안을 채웠다.

“다음은, 알지?”

고개를 까딱하는 고천수를 보며 이서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괜스레 옆에 있는 허영웅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서준을 도와주지 않았다.

꿀꺽.

어쩔 수 없이 입에 가져가 조금 마셨다.

그다음에는 시킨 대로 진경호에게도 잔을 내밀었다.

진경호는 거부감을 표했으나, 고천수에게 한 대 얻어맞은 끝에 결국 한 모금을 넘겼다.

“다는 못 마셨네.”

고천수는 불만족을 표시하면서도 비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뭐, 됐어. 그 정도면.”

“고천수 씨,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허영웅의 물음에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죠. 다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고천수는 또다시 차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로프?”

“저게 뭐야.”

“뭘 하려는 거지?”

경찰들이 고천수가 손에 든 로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천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로프를 이서준과 진경호에게 묶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인상을 찌푸리는 이서준을 보며 고천수는 친절하게 말했다.

“묶어서 데려가려고. 추방 장소까지.”

“뭐?!”

“그럼 얌전히 모셔다 줄 줄 알았나?”

고천수는 둘에게 묶은 줄을 차의 후미에 연결했다.

“자, 다 됐네요. 갑시다.”

“고천수 씨, 이래도 되겠습니까?”

허영웅이 걱정을 표했지만 고천수는 어깨만 으쓱했다.

“안 될 거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합리적인 추방 방식인데요.”

“그래도 이러면…….”

“걱정 마세요. 처형이랑은 엄연히 다르니까. 이렇게 해서 죽으면 자연사죠.”

-ㅋㅋㅋㅋ 자연사.

-하긴 뭐, 직접 죽인 건 아니잖아?

-인정.

더 이상 징징대는 소리나 들어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들뜨고 있는 시청자들을 보며 차에 먼저 타서 소리쳤다.

“안 갑니까? 얼른 가시죠!”

***

명서 초등학교에서 출발한 지프차는 도로를 시원스레 달렸다.

“고천수 씨, 지금 속도가…….”

“왜요. 더 올릴까요?”

허영웅은 고천수의 답변에 혀를 찼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거 정말 추방 맞습니까?”

“조건은 다 만족했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고천수는 액셀을 더 밟으면서 말했다.

“잘 들어두세요, 허영웅 씨. 질서는 준법정신으로만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감정을 절제하고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만이 통솔력을 이어 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아니었다.

“가식적인 형식으로나마 경찰들의 질서 의식은 다들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사실 모두가 바랐던 진짜 결말을 실현할 때입니다.”

눈앞에서 실행해서 시민들의 공포감을 유발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으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어! 살려 줘!”

명서 초등학교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죄인들에게 마땅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미친 새끼야!”

지프차의 뒤에 매달려 달리고 있는 이서준과 진경호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차 멈춰! 멈추라고!”

“살려 줘어어어!”

그들 주변에는 어느새 몇 마리의 좀비가 따라붙고 있었다.

이서준과 진경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언제 좀비들이 그들을 물어 버릴지 몰랐다.

“멈추긴 뭘 멈춰.”

거기에 더해 고천수는 계속해서 차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시속 25km가 넘은 채로 달리고 있는 죄인들은 이제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

-허영웅, 완전히 넋이 나갔는데?

-너무 큰 충격을 준 거 아니냐.ㅋㅋㅋㅋ

-고천수 이놈 진짜 무섭네.

시청자들의 호평에 고천수는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로 무서우면 어떻게 합니까, 형님들. 인제 시작인데.”

시속 26km.

이제 보통 사람이 뛸 수 있는 평균 시속은 넘어서기 시작했다.

27, 28, 29…….

“끄아아아악!”

이서준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광기를 뱉었다.

“죽는다고! 이러면 죽는다고, 이 새끼야!”

허영웅이 침묵하는 가운데, 고천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화답했다.

“뭐?! 죽을 것 같다고?! 근데 아직 죽지 마! 추방 장소까지 다 안 왔단 말이야!”

사실 애초에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백미러를 보는 고천수의 눈에, 절망에 가득 차 버린 이서준의 얼굴이 담겼다.

콱, 지익.

힘을 잃은 진경호가 발을 끌기 시작했다. 넘어질 때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띠링! 고문관 님이 1젠 후원! - 너무 좋아.]

“형님, 감사합니다. 근데 이제부터입니다.”

넘어져서 차에 질질 끌리는 건 고천수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건 좀 잔인하니까.

크아아아.

진경호가 숙였던 고개를 다시 치켜들었다.

눈에 초점을 잃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어……?”

같이 달리고 있던 이서준이 멍하게 탄식을 뱉었다.

크아아아.

“끄아악! 끄아아악!”

진경호가 곧장 이서준에게 달려들어 팔을 물어뜯었다.

이서준은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대다가 진경호와 함께 넘어졌다.

“타임오버.”

고천수의 중얼거림에 그제야 뒤를 돌아본 허영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천수 씨, 이건…….”

“그냥 입으로 먹어도 변하긴 하네요. 둘이 비슷하게 마신 줄 알았는데, 진경호가 더 빨리 변했네.”

고천수가 페트병에 담은 음료.

그것은 명서 초등학교로 돌아가는 도중에 고천수가 좀비를 잡아 채혈해 놓은, 더러운 피를 섞은 것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좀비의 울음소리만 차량의 후미를 때리고 있던 것이다.

“허영웅 씨.”

“예?”

“아무래도 추방 도중에 둘 다 불상사를 당한 것 같죠?”

그렇게 묻는 고천수를 보며 허영웅이 악마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한테 부탁할 때부터 대충은 예상하셨을 거잖아요?”

남이 쉽게 해 줄 수 없는 일을 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데려다 줄 사람이 남지 않았으니까 속도 좀 높일게요.”

고천수는 계기판을 보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요동치는 엔진음과 함께 차가 시원스럽게 쏘아져 나갔다.

뒤를 쫓아오는 좀비들의 소리도 점차 멀어졌다.

커브를 한 번 돌고 나서부터는, 줄에 매달려있던 둘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시속 100km를 넘게 달리고 있는 차와 탑승자들뿐이었다.

“…….”

가만히 있던 허영웅이 조심스레 고천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허영웅의 눈에는, 웬 미친놈 하나가 담겨있었다.

***

“아, 오늘은 아침부터 고생했네요.”

명서 초등학교로 돌아오고, 넋이 나간 허영웅을 경찰들에게 돌려보낸 고천수는 다시 숙직실에 몸을 뉘였다.

“그 차 좋긴 한 것 같아요. 나갈 때 달라고 해야지. 안 주면 훔치고.”

중얼대는 고천수를 보며 시청자들이 반응했다.

-허영웅, 멘탈 부서진 거 아니냐?

-이서준하고 진경호 이런 식으로 보낸 건 네가 첨이야.

-제로백까지 15분은 걸린 듯.

감상은 그만하면 됐다.

고천수는 가지고 있는 젠을 확인했다.

‘8젠.’

이서준과 진경호를 보내면서 조금 더 젠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는 획득량이 적었다.

‘몬스터랑 한 판 해야 하나.’

가급적 젠이 많이 필요했다.

앞으로 뭐가 나타날지 모르니 보급함에서 좋은 물건들을 더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흠.”

현재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보급품인 손전등을 들고 고천수는 신음했다.

아직까지도 이걸 어디에다 쓰는 건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아마 위험이 닥치고 나서야 활용법을 확실히 터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

딸깍.

시청자들을 상대로 듣고 싶은 게 있어서, 고천수는 일단 손전등을 한 번 켰다.

딸깍.

그리고 다시 Turn off. 이후로 켰다 끄기를 몇 번 반복했다.

-야, 뒈지고 싶지 않으면 그만 써.

그때, 시청자 중 한 명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힐난했다.

“예? 뭐, 이거 건전지 갈아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고천수는 이 물건이 건전지를 갈 수 없는 물건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아 씨, 그럼 아깝게 낭비했네.’

확인하고 싶은 내용은 맞았는데 좀 머저리 같은 짓을 해 버렸다 싶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나한테 알려 주기는 하려나?’

현재 시청자들이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 호감도가 고천수는 궁금했다.

알람만 제대로 해 줘도 위기를 벗어나는 것은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청자들을 믿을 수는 없었기에 고천수는 잠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차로?

-안 쉬고 벌써 감?

차로 가는 고천수를 보며 시청자들이 의문을 뱉었다.

‘벌써 갈 생각은 없지.’

이곳은 현재 안전이 확보된 장소였다.

다른 곳으로 가면 편하게 쉴 수도 없으니 여기서 피로를 회복해야 했다.

다만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차로 거점을 옮기려는 것뿐이었다.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르니까.

“고천수 씨, 설마 떠나시려는 겁니까?”

경찰 한 명이 고천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고천수는 더 이상 차를 가지고 못 나가게 하려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아뇨. 왜 물으시죠?”

“아, 다른 게 아니고 떠나실 거면 차 안에 필요한 것 좀 채워 드리려고요.”

경찰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고천수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답했다.

“그러셨군요. 미리 좀 채워 놔 주시면 좋죠.”

“알겠습니다. 차는 저희가 정식으로 드리는 거로 할 테니까, 떠나실 때는 인사 정도는 해 주십쇼.”

그렇게 멀어져 가는 경찰을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술술 풀리는 게 더 불안한데.”

해 준 게 있으니 경찰들이 좋게 좋게 반응해 주는 거야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 그로서는 계속해서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어.

-너라면 언제 닥쳐도 피하긴 피할걸.

-전조현상 있다니깐, 기억 못하냐.

신경을 거슬렀는지 시청자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역시 중요 내용에 대한 엠바고를 풀지는 않아도 시청자들은 어느 정도 플레이어에 이입해 있었다.

‘뭐, 그럼 괜찮으려나.’

확실히 정보를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래서는 편히 쉬지도 못하니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고천수는 차 안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그럼 형님들 말만 믿고 좀 여유를 찾을 테니까요.”

이 시점으로부터 고천수의 휴식 시간이 시작됐다.

안정을 되찾은 명서 초등학교에는 별다른 위기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를 짜서 다들 식료품을 구하러 나갔고, 방비도 철저했다.

자리로 돌아온 경찰서장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인품이 탁월했다. 순수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산전수전 다 겪은 허영웅도 제법 보좌관 역할을 잘해 냈다.

그렇게 한 이틀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조금만 더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또다시 차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고천수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

차 안으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천수는 에어컨을 쳐다봤다.

“뭐야.”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은 아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린 고천수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춰 섰다.

“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도, 그의 가슴에서 나는 것도 아니었다.

“전조!?”

고천수는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보았다. 차 뒤에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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