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1화 (11/224)

011. 후원자

“바지요? 웬 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허영웅이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엔 제가 챙겨 온 무전기들이랑…….”

“아뇨, 허리 사이즈요.”

“네? 사이즈요?”

“네, 그거.”

아직 순경밖에 안 되었으니 체형이 급격하게 바뀌었을 리도 없었다. 바지가 안 맞는 건 말이 안 됐다.

“뭘 해명하면 되나요?”

“안 맞잖아요. 누구 거 뺏어 입은 거예요.”

“예?!”

허영웅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뺏어 입다뇨.”

“아,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고천수가 다시 오토바이를 출발시키려고 하자 허영웅이 대뜸 바지를 풀어 내렸다.

“여, 여기 보세요! 제 신분증!”

그는 허벅지에 동여 메고 있던 신분증을 풀어 내 흔들었다.

“제 신분을 의심하는 거죠? 이거 보면 되잖아요!”

“아, 씨.”

고천수는 오토바이를 멈추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갈 길도 바쁜데 못 볼 꼴 보네.”

“자요! 확인해 보세요!”

허영웅은 달려와 고천수의 면전에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고천수는 그에게서 신분증을 받아서 살펴보았다.

‘진짜네.’

위조한 흔적은 없어 보였다. 시간상 이 정도의 정교한 위조는 할 수 없을 테니 진짜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그럼 바지는 왜 그 모양이에요.”

“출근했을 때 입고 있던 바지가 찢어졌거든요. 다른 사람 거 여유분 빌려 입어서 그런 거예요. 바지 또 찢어질까 봐 신분증은 이렇게 보관했고요.”

설명에 막힘은 없었다. 고천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데려가.

-뭔 솔? 짐짝 들고 갈 필요는 없지.

-고기 방패 하나쯤은 필요하잖아.

데려갈지 고민이 됐지만 채팅창의 의견을 들으니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다.

“알겠습니다. 데려갈게요.”

미끼로 쓸 만한 인간이 하나 있으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채팅창의 의견을 들으면 헛소리만 내뱉는 게 아니었다.

-탁월한 선택임.

-진짜임? 난 좀 헷갈리는데…….

-초보 시청자 존나 많네, 이 방.

시청자 중에서도 분명 고인물이 섞여 있었다.

몬스터와는 다르게 인물에 대해서는 스포를 피하려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귀 기울이면 충분히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허영웅, 넌 진짠가 보네.’

고천수는 오토바이의 뒷자리로 이동하며 허영웅에게 운전석을 가리켰다.

“허 순경님, 오토바이 운전 좀 하실 수 있습니까?”

“운전이요?”

“못 하시면 두고 갈 겁니다.”

그러자 허영웅이 부리나케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하죠! 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는 대로 가 주세요.”

직접 운전하는 게 좋겠지만, 아무래도 등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근데 이쪽은 명서 초등학교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고천수가 가야 하는 곳을 가리키자 허영웅이 바로 토를 달았다. 고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거기에서 나온 길입니다.”

“명서 초등학교에서요? 왜요? 무슨 일 있나요?”

“급하니까 일단은 좀 달리면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부드럽지만 뼈 있는 반문에 허영웅이 당황하며 스로틀을 당겼다.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허 순경님, 운전 실력은 썩 나쁘지 않네요.”

“그래서,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허영웅의 음색이 조금 달라졌다.

‘경찰들이 거기 있다고 들어서 그런가.’

고천수는 장난하지 않고 진지하게 답변을 해 줬다.

“좀비들이 나타났거든요. 지금 거기 장난 아닙니다.”

“예?! 좀비들이 거기에…….”

“문제는 거기서 사람들을 통제해야 될 경찰서장님도, 실종돼 버렸다는 거죠.”

그 말에 오토바이가 잠시 흔들렸다.

“허 순경님, 이해는 하지만 사고는 안 나게 부탁드립니다.”

“아, 죄송해요. 그 얘기, 좀 더 자세히 해 주실 수 있나요?”

순경에게 말해 봐야 뭔 이득이 될까. 하지만 목적지도 안 듣고 달리고 있는 이 착실한 인간을 보니, 고천수는 굳이 숨길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경찰관들이랑 같이 순찰 나갔다가 실종된 것 같던데요.”

“괴물한테 당한 건가요……?”

“그렇진 않을 걸요.”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고천수는 그걸 허영웅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저희가 지금 가는 곳이 바로 그 경찰서장님이 없어진 장소입니다.”

“네? 정말요?”

“네. 정말이니까 진정하세요.”

경찰서장이라고 해도 남일 뿐이었다. 세계가 이렇게 된 마당에 뭘 그렇게 놀라나 싶었지만, 고천수가 다음에 들은 답변은 굉장히 외의의 것이었다.

“아, 죄송해요. 그분, 제 친척이니까 아무래도 엄청 신경 쓸 수밖에 없어서요.”

“친척? 경찰서장님이 친척이라고요?”

“네, 제 큰아버지예요.”

움찔.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큰아버지라고?’

설마 그런 연관성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일단 시야가 트인 게 중요했다.

모아 두고 있던 퍼즐 조각이 빠르게 맞춰졌다.

‘아아.’

순간 판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깨달았다. 고천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제야 알겠네!”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천수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기요. 고새 다 왔네요.”

어차피 할 일은 똑같이 정해져 있었다.

***

장소에 도착하니 주변은 컨테이너 박스로 가득했다.

“여기서 실종되신 거예요?”

허영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고천수는 대답하지 않고 똑같이 주위부터 살폈다.

‘일반 컨테이너 박스들이 아닌데?’

대부분 창문과 현관문이 달려 있었다.

컨테이너 하우스였던 것이다.

‘잠깐 머물렀던 건가…….’

사람들이 있던 흔적이 있었다. 진지 같은 것으로 활용하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저기, 고천수 씨?”

오토바이를 멈추기 전에야 통성명을 나눴던 허영웅이 고천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여기서 실종되신 거 맞나요?”

“……아마 그럴 거예요.”

어디서 실종됐는지를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 부근인 것만은 확실했다.

“허 순경님은 경찰서장님의 흔적이 있나 좀 찾아봐 주세요. 저보다 잘 알 테니.”

“고천수 씨는요?”

“저는 저 나름대로 찾을 게 있습니다.”

허영웅은 의문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곧 걸음을 뗐다.

“알겠어요. 위험하니 혼자 너무 멀리 가지는 마세요.”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남은 고천수는 다시 눈에 불을 켜고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몬스터냐.’

경찰서장이 함정에 당했다면 역시 몬스터에게 몰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근처가 엉망이 된 것을 보니 다들 급하게 이곳을 떠난 게 분명했다. 뭔가에 쫓겼다는 얘기였다.

-왤케 땅바닥만 보고 다님?

-동전 주우려고?

아니었다. 보고 있는 것은 발자국이었다.

“사람들 발자국만 가득하네요.”

비틀린 보폭을 가진 발자국이 많았다.

“일단은 좀비인 것 같고.”

좀비에게 물렸다면 수색대를 보내 변이한 경찰서장을 발견하고 사살할 수 있었다.

민간인 몇을 수색대에 포함시키는 건, 경찰서장을 죽여야만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남기기 위함일 터.

“하지만 안 물렸어도 물렸다고 보게 할 만한 방법이…….”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런가.”

공포인가.

명서 초등학교 내부에 그런 상황이 발생한 이후니, 경찰서장에게 눈에 띄는 부상만 있어도 충분히 몰아세울 수 있었다.

거기 있는 빌런들은 그냥 미친 광견이 아니었다. 꽤나 치밀했던 것이다.

“형님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수색을 계속하던 고천수가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보급함은 왜 더 안 나오는 겁니까?”

컨테이너 박스들을 보다 보니 그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처음 보급함이 나타난 이후로, 똑같은 걸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득 뇌리를 스친 것이다.

-보급함?

-너 보급함 먹기 싫은 거 아니었어?

굉장히 뜬금없는 답변에 고천수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예? 먹기 싫다니, 피망 싫어하는 꼬맹이도 아니고. 뭔 말입니까?”

-너야말로 뭔 말이냐. 보급함은 유료 콘텐츠잖아. 푼돈이라도 있어야 보임.

-그래, 체험판으로 준 1젠 기억 안 나? 그걸로 한 번 보고 열었음서.

-ㅋㅋㅋ 난 알고 있었는뒈~. 보급함 찾아보라고 눈치도 줬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때, 한 채팅이 올라왔다.

-우리 채팅창 누르고 아래로 내려 봐.

급하게 시키는 대로 해보니 ‘$’ 표시가 눈에 보였다. 누르자 ‘Cash Chat - Off’라는 상태 메시지가 떠올랐다.

“뭐야, 이거. 설마…….”

고천수는 Off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Off가 즉각 On으로 바뀌었다.

[띠링! 온리원 님이 1젠 후원! - 정식 지갑 오픈 축하해.]

[띠링! 한도초과 님이 1젠 후원! - 아, 난 안 연다에 걸었는데.]

[띠링! 니목에혓바닥 님이 1젠 후원! - 낼름.]

순식간에 3개의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

고천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대차게 머리를 쥐어 잡았다.

“아, 형님들!!”

허영웅이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랑곳 않고, 고천수는 그저 길게 울분을 토로했다.

“이런 걸 숨기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방송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이 후원 시스템이었다.

그것도 보급함이 나타나게 하려면 이걸로 최소한의 금액을 모아야 한다니 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보급함마다 열 수 있는 가격도 다를 것이 아닌가.

“안 그래도 설명도 못 듣고 플레이 시작했드만!”

-ㅋㅋㅋㅋㅋㅋㅋㅋ

-밥상 있었으면 엎었다, 이 새끼.

-얼굴 참 못났다ㅋㅋㅋㅋ

분노하는 얼굴을 보고도 존재들은 상황을 즐기기나 할 따름이었다.

열불이 나긴 했지만 고천수는 애써 입술을 비틀려 웃었다.

“예, 형님들. 사나이 고천수. 고작 이거 가지고 삐지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캐시 챗(Cash Chat)을 올리는 걸 보고도 약이 안 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온리원이 꾸준히 자기를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과 함께 한 가지 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고정 팬, 이거 중요하다고.’

익명 채팅만으로는 거물급 팬을 생성하고 관리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후원과 동시에 닉네임이 나타난다면 상황은 달랐다.

“후.”

한숨과 함께 고천수는 평온을 되찾았다.

“저 뒤끝 없습니다. 다들 아시죠?”

-앞끝인 듯.

-눈에 진심 다 보이거든.ㅋㅋㅋㅋㅋ

뭐라고 하든 더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온리원 님, 한도초과 님, 니목에혓바닥 님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천수 씨!”

순간 다가온 허영웅 때문에 고천수가 크게 움찔거렸다.

그 때문에 고천수의 채팅창이 ‘ㅋㅋㅋㅋ’으로 도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허영웅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뭐, 뭐가요?”

“빨리 합류하러 안 오시기에…….”

“아니, 뭐.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원래 뭉그적뭉그적하는 편이니까.”

얼토당토않은 설명에 허영웅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그렸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무튼 고천수 씨! 찾았습니다.”

“예? 뭘요? 경찰서장님을?!”

“아뇨. 그건 아니고…….”

허영웅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경찰서장님 물건을 찾았어요. 저기서요.”

망설일 것 없었다. 고천수는 그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곧장 그곳으로 가 보았다.

“한바탕 했었나 본데.”

땅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본 고천수는 다시 허영웅에게 물었다.

“물건들 찾은 곳 더 있습니까?”

“네, 이쪽으로 가면 더 있어요.”

고천수는 그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많은 물건들이 떨어져 있었다.

‘쫓아오라는 건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단서임에는 틀림없었다.

‘뭐야, 이거.’

어느 순간 물건들이 사라졌다. 두 개의 길이 있는 갈림길 앞에서였다.

고천수가 가만히 서 있자 허영웅이 먼저 나서서 설명했다.

“여기까지였어요. 더 이상 없었습니다.”

“흐음…….”

하필 양쪽이 다 수풀길이라 발자국을 살피기 어려웠다.

수풀이 누워 있는 흔적은 두 길 다 비슷했다.

“허 순경님, 감으로 잡히는 데 없습니까?”

이럴 때는 친척 찬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허영웅은 여전히 어수룩한 얼굴로 난감한 표정만 그렸다.

“글쎄요. 어디로 가셨을지는 모르겠어요. 둘이 나눠서 찾아볼까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갈림길에서 그딴 소리를 하면 불안하기 마련이었다.

‘루트 선택 같잖아.’

약간의 찝찝함이 있었기에 고민하던 고천수는 순간 미소를 그렸다.

“고천수 씨?”

“잠시만요.”

바닥에 쭈그려 앉은 고천수는 채팅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형님들. A or B. 갈림길 생존 미션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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