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연할까요? (2)>
유정 씨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털을 깎아서 만든 것처럼 말이다.
‘와···. 렌즈도 아닌데 눈동자가 반짝거리네.’
“재협상이 어떻게 됐냐구요.”
“아···. 유정 씨가 미국으로 넘어갈 생각이 없다고 그대로 이야기를 했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정 씨를 캐스팅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더군요.”
“왜 그렇게 저에게 집착하는 거죠?”
“알고 보니 마블링 스튜디오의 CEO가 유정 씨의 광팬이더군요. 그리고 솔직히 칼잡이···. 아니 칼을 쓰는 동양인 여성 캐릭터에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게 저라고요?”
“당연하죠. 온리 원! 아시아가 사랑하는 배우를 넘어 월드 스타 아닙니까!”
오랜만에 내 아부 스킬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유정 씨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오르며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월드 스타라···.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아요.”
“물론 제 마음속에서···.”
“뭐래.”
“어쨌거나 그래서 제가 강하게 나갔죠. 어이! 스티브. 당장 로케이션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협상은 없다. 한국에서 찍을 게 아니면 우린 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이죠.”
“정말 그렇게 했다고요?”
그녀는 누구보다 날 잘 아는 사람이다. 설마 내가 그렇게 강하게 나갔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도 이제 사소한 거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습니다. 조건이 안 맞으면 까짓거 안 하면 되죠.”
“흐음···.”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안 하면 마블링과 추진하는 전체 프로젝트에 영향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녀도 회사의 주주다. 미래의 성장 동력에 대해 살짝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유정 씨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고, 한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는 거죠.”
이른바 나유정 퍼스트 전략이었다.
“뭔가 수상한데요? 이준형 씨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제 저도 뭐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돈이면 돈, 여자 친구면 여자 친구! 아시겠어요?”
“오늘따라 아재처럼 왜 그래요? 뭔가 괜찮게 해결을 해 놓고 뻥을 잔뜩 치는 것 같은데···.”
“컥컥···.”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다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귀신···.’
“소, 속고만 사셨어요? 진짜 그런 마음입니다. 이제 전 세상 부러울 게 없어요. 당신이 가면 그게 길이요. 말을 하면 법입니다. 나유정 퍼스트!”
뭔가 말해 놓고도 애절함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남자들의 숙명?
“뭐, 의심스럽긴 하지만 알겠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찍으면 되는 거예요? 마블링 시네마틱 무비가 이상해져서 망하는 건 아니고요?”
“절대 그런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정 씨는 검후로 출연하지 않을 거니까요.”
“에? 그럼 뭐로 출연해요?”
“바로 ‘루시드 파이어’라는 캐릭터입니다. 최근 등장한 한국 출신 영웅으로 직업이 케이팝 아이돌입니다.”
“네? 정말요?”
“그렇습니다. 실제로 있는 캐릭터입니다. 네미시스 전체가 출연할 예정이며 물론 주로 유정 씨가 등장할 겁니다. 불을 다루는 홍염의 소드마스터로요.”
나는 네미시스와 신규 캐릭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줬다.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면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미국에 갈 필요가 없으며 네미시스가 영화에 출연하고 추가로 아우라까지 카메오로 나온다.
거기다 디플러스에서 귀환소녀 IP를 세계관에 융합시키고 팍팍 밀어 줄 예정이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그래도 제가 근 반년은 일만 해야 하는 건 변함 없잖아요.”
“그, 그렇죠. 나세멸이 한 3개월···. 영화는 약 2개월···.”
솔직히 말해서 6개월은 걸릴 것 같은데 팍팍 줄여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한국에서 촬영한다고 한다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여자 친구를 일만 시킬 거냐고요!”
‘으음···. 유정 씨가 너무 강하게 나오는구나. 그간 맺힌 게 많은 모양이군. 하긴 내가 끌어도 너무 끌었지.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윽···. 이건 너무 진부한 생각이야.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일에 미쳐가지고···.’
나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쓰읍···.”
“왜요. 더 할 말 있나요? 이준형 씨?”
“그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특단의 조치를 마련했습니다.”
탕!
내가 테이블을 내려치자 접시에 있던 간장게장 국물이 튀어 올랐다.
“특단의 조치요?”
유정 씨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네. 나유정 퍼스트의 일환입니다.”
“그게 뭔데요?”
“일단 유정 씨 매니저를 교체할 예정입니다.”
“제 매니저를요? 지금 잘하고 있는데요?”
“더 유능한 매니저를 채용할 겁니다.”
“네? 그게 누군데요?”
“이준형 매니저라고···. 6개월 동안 나유정 전담 매니저로 채용할 생각입니다. 능력치가 최상이라고 합니다.”
“풋···.”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정 씨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트렸다.
“본업은 어쩌고요?”
“본업은 이제 알아서 잘 돌아간다고 합니다. 인재들을 아주 잘 배치를 해 놨다고 하네요.”
“흠. 그렇군요. 뭐 더 없나요? 살짝 부족한 것 같은데요?”
“유정 씨는 참 욕심이 많으신 분이군요. 이러니 대배우 반열에 올랐겠지요.”
다시 한번 내 아부 스킬이 빛을 발했다.
“그래서 추가 옵션은요?”
“1일 1 맛집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그러다 살찌면요?”
“운동으로 관리하면 되죠.”
“같이 하실 의향은?”
“커헉···. 으음···. 이, 있습니다.”
“좋았어요. 이 매니저, 오랜만이네요.”
“버, 벌써 발동인가요?”
“왜요? 겨우 설득해 놓으시고 밥상 엎으시게요?”
“그럴 리가요.”
“솔직히 이 매니저는 운동을 좀 해야 해요. 몇 번을 말해도 듣질 않으니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합니다. 할게요.”
“좋은 피지컬을 가지고 맨날 앉아서 왜 그러냐고요.”
그녀가 나를 강하게 타박하고 있었다.
“그거야 제가 글을 쓰느라 바빠서···.”
“제가 인간 개조를 해 드리죠.”
매니저 이야기를 꺼냈다가 졸지에 인간 개조까지 당하게 생겼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니, 수습은 내가 해야지 뭐.
나라고 유정 씨와 하는 알콩달콩 데이트가 싫은 게 아니다. 그냥 계속 일에 미쳐 있었으니 뭔가를 하지 않으면 그게 좀 불안한 거다.
‘하긴···. 나도 좀 여유를 가져야 해.’
“아마 준형 씨도 그걸 느끼고 있을 거예요. 글도 좀 머리를 식혀야 잘 나오는 거 아니에요? 무슨 글 쓰는 기계도 아니고···.”
“그렇긴 합니다. 요즘 쓰는 글은 좀 시원치가 않더라고요.”
“거 봐요. 이제 매니저 생활 하면서 머리 좀 식히세요.”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정 씨. 기분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뭔지 모르겠지만 기시감이 느껴지네요.”
“참 재미있네요. 우리 이야기를 드라마로 찍고 있는데 당사자들이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어요.”
“그건···.”
할 말은 많지만 지금 말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분위기다.
“마저 드세요. 근처에 경관 좋은 카페 많잖아요. 우리 거기로 커피 마시러 가요.”
‘음···. 이제 진짜 코가 꿰였구만. 매니저 노릇을 하려면 본부장들 다 모아 놓고 업무 분장을 다시 해야겠는데?’
아무래도 자리를 많이 비울 테니 본부장들이 주도하는 체제로 가야 할 듯싶었다.
“어서 가요. 이 매니저.”
“예.”
* * *
데이트를 마치고 유정 씨를 집에 데려다준 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사무실에 도착했다.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대충 던져 놓고 창가로 걸어가 밖을 쳐다보았다.
‘자업자득이지 뭐···. 누굴 탓하리오.’
“하아···.”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유정 씨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냥 내가 이럴 때 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한 것일 뿐···.
밖의 퇴근길은 오늘도 복잡했다.
‘그래도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끝까지 안 한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6개월간은 꼼짝없이 매니저 노릇을 해야 되겠네.’
나는 지금껏 해 왔던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드라마 두 개를 연달아 히트시키고 소설로 큰돈을 벌었다. 유정 씨와 함께 회사를 창업하고 작가들을 모으고 영화를 찍어 회사를 재무적으로 안정시켰다. 거기에 아이돌을 제작하고 넷플릭 오리지널 시리즈까지···.
거기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블링 유니버스에 IP를 통합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은 드라마 세 개를 동시 제작하는 상황이었다.
최근 모 신문의 기사에서 J&J에 대해 평가한 기사를 봤다. 참 마음에 쏙 드는 기사라 스크랩을 해서 시간 날 때마다 보는 게 습관이 됐다.
그래서 지금도 창밖을 내다보며 그 기사를 떠올렸다.
‘현금이 풍부하고 부채가 전혀 없는 탄탄한 재무 구조에 강력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유! 드라마 제작 능력은 최상위권! 거기다 인기 아이돌은 덤인 우량 기업.’
기자는 신생 기업치곤 전례가 없는 성과라며 대표인 나를 극찬하고 있었다.
1) 배우 매니지먼트 A
-인기 배우를 보유하고 있는 알짜배기 사업이다. 배우와 회사 간 잡음이 전혀 들려오고 있지 않는 게 신기할 뿐.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인 나유정의 소속사다.
2) 영화/드라마 제작 A+
-글로벌 히트작인 ‘나만 아는 세계멸망’ 시리즈, 소속사 아이돌을 등장시켜 크게 성공한 영화 ‘프로듀서님 저 회귀했어요’와 드라마 ‘귀환소녀’, 그리고 최근 추가로 작품 두 개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다. 규모에서는 업계 톱은 아니지만 높은 제작 능력만큼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3) 콘텐츠 사업 A
-작가 친화적 집단인 J&J 스토리를 운영 중이다. 웹소설, 웹툰, 드라마, 영화 작가 등 계속 공격적으로 작가진을 모으고 그 콘텐츠를 바탕으로 OSMU를 시도하고 있다.
-J&J의 이준형 대표조차 작가로, 이런 면에 높은 신뢰를 얻어 작가들이 믿고 계약하는 업체다. 필자는 앞으로 이 사업이 J&J의 핵심 성장 동력이라고 평가한다.
-미튜브의 자체 콘텐츠도 인기다. 자사 아이돌에게 공정한 이익 분배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아이돌과 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4)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A+
-걸그룹 1팀, 보이그룹 2팀을 모두 성공시켜 짧은 시간 4대 기획사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연기력이 출중한 인재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는 것이 강점.
-최고의 프로듀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아이돌 지망생들의 최선호 PICK이 되고 있다. 탄탄한 재무 구조로 인해 정산이 업계에서 가장 빠른 업체로 평가받고 있다. 자체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어 아이돌 활동과 더불어 안정적인 연기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획사로 유명하다.
‘와···. 진짜 뭐가 많긴 많구나.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흐뭇하게 기사를 곱씹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방문을 슬쩍 여는 것 같았다.
“어?”
몸을 돌려 문 쪽을 보니 케이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뭐냐? 들어오려면 들어오든지···.”
“아까 없길래 오늘 출근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불이 켜져 있길래. 왜 저녁이 다 돼서 출근했어?”
케이는 문을 닫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어슬렁거리며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그냥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
“왜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그래? 유정 씨한테 혼났어?”
“혼나긴 인마! 내가 혼내면 모를까!”
“웃기시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이게 어디서 회사 대표한테 까불어?”
“형. 그거 알아요?”
“뭐 인마.”
“지금 이렇게 된 게 누구 덕인지 잊었어요?”
“내 덕이지. 내 탓이요. 넌 그것도 모르냐?”
“아니! 잘 생각해 봐. 형이 어쩌다 이런 길을 걸어온 걸까?”
그는 내 얼굴을 보고 웃고 있었다. 가벼운 농담 같은 말이다. 자기의 정확한 감평에 탈탈 털리고 절필을 한 뒤 매니저로 경험을 쌓으며 작가로 대성하게 됐다는 레퍼토리였다.
“뭐···. 너도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
“어라? 난 이런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확실히 오늘 이상해.”
“후후···.”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케이의 신랄한 감평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건 아니다. 팩트를 따지자면 내가 웹소설 작가를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본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매니저를 선택한 건 그냥 우연이었다.
“인생이란 게 참 우연의 연속인 거 같다.”
“이 형이 오늘 왜 이러지?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멀쩡해 인마.”
“그러지 말고 나랑 오늘 한잔 어때?”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케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까?”
“콜!”
나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케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연습실을 지나가는데 병춘이의 신곡이 들려왔다.
“연습하나 보네. 소윤 씨하고 하영이랑 다솜이 전부 다 있나? 같이 밥 먹고 술이나 한잔할까?”
“그, 그럴까?”
탁!
나는 손으로 케이의 뒤통수를 살짝 때렸다.
“아! 뭐야!”
“안 돼, 인마. 하영이는 절대 안 된다. 넘보지 마라. 연습하는데 얼쩡거리지 말고 얼른 내려가자.”
“치···. 완전 내로남불이라니까?”
“하하···.”
나는 케이의 등을 떠밀어 엘리베이터로 밀어 넣었다. 오늘은 이 녀석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해 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