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260화 (260/263)

출연할까요? (1)

“저보고 일만 하다가 늙으라는 거예요?”

“엥? 지금도 충분히 나이가 들었···. 악!”

그녀의 하얀 손이 내 옆구리를 꼬집고 있었다.

“전 분명히 안 한다고 했어요. 미국엔 안 갈 거예요. 관광이면 몰라도 일하러는 안 가요.”

“아니···. 길게 찍지도 않을 텐데···.”

“이제 그만해요. 나 피곤해요. 오늘 게임에서 너무 많이 죽었어요.”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은지 단호한 태도로 내 말을 잘라 버렸다.

‘들이는 노력 대비 버는 수준이 후덜덜한데 왜 마다하지? 요즘 유정 씨가 이상해졌어. 이런 가성비 최고인 일에···.’

나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언짢아하는 그녀를 그냥 가만 놔두기로 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이제 그만 들어가요.”

유정 씨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자고 갈 거예요?”

“아뇨. 나 피곤해요.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요.”

“그, 그래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어차피 차도 끌고 왔는데 제가 알아서 갈게요.”

유정 씨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인사를 한 뒤 마포 집으로 출발했다. 내가 그녀를 배웅하고 현관으로 들어오자 여동생 주리가 팔짱을 끼며 나를 쳐다보았다.

“언니 표정 왜 저래?”

“뭘···.”

“둘이 싸웠어? 표정이 딱 티가 나는데? 그리고 집에 왔으면 웬만하면 자고 가는 사람이 그냥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 아까 신나서 여기로 왔단 말이야.”

“싸우긴 뭘 싸워? 그런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 봐. 뭐라고 했길래 그래?”

“별말 안 했어. 그냥···.”

나는 주리에게 오늘 있었던 일과 아까 공원에서 했던 대화를 설명해 주었다.

“어휴···. 이 바보!”

“야! 어디 오빠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어쩌다 이렇게 둔탱이가 됐지? 맨날 글만 써서 연애 세포가 다 죽은 거야?”

“뭐 인마?”

“지금 사귄 지 며칠이나 됐다고 여자친구를 미국으로 보내려고 해?”

“아니 보내는 게 아니라···. 굉장한 일을 하러···.”

“아···. 됐어요. 언니가 블록버스터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오빠가 지금 그럴 때야? 언니랑 몇 년간 못 한 데이트도 하고 최대한 재미있게 보내야지.”

“걱정 안 해도 잘 지내고 있거든? 그런데 겨우 한두 달인데 이런 반응은 좀 의외네.”

“어우 정말! 유정이 언니가 미국 가면 오빠가 따라갈 거야?”

“아, 아니···. 못 가지. 나는 너무 바쁘잖아.”

“이거 봐. 그럼 유정이 언니는 안 바빠? 오빠 말대로 하면 언니는 드라마랑 영화 합쳐서 몇 개월 동안 연기만 해야 하는 거잖아!”

주리의 말을 들어 보니 뭔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참 애매했다.

아무래도 이런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겠지. 남자들이라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지 않을까?

주리는 혀를 차며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고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대자로 벌러덩 누웠다.

‘휴···. 안 되겠다. 분위기도 전환해 볼 겸 내일 맛집 탐방 좀 가야겠네. 오랜만에 파주 간장게장 집에 가 볼까? 그러면 좀 화가 좀 누그러들려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잠깐! 아무래도 이 기회를 살려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모든 걸 좋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 *

“안녕하십니까? 자주 뵙습니다. 대표님.”

마블링 스튜디오의 스티브 한이 J&J를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스티브.”

“회사가 의외로 엄청 크네요. 뭔가 콘텐츠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다운 그런 분위기군요. 작가 사무실까지 운영하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하하···. 저도 작가니까요.”

“그나저나 MOU도 맺었는데 보자고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네. 실은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요?”

“예. 나유정 씨가 검후(劍后) 역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네? 정말입니까?”

스티브는 그 말을 듣고 꽤 놀란 듯했다. 정말 파격적인 수준의 캐스팅 조건이었는데 그걸 마다하다니···.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

“으음···. 잘 이해가 안 가네요.”

“아마 곧 ‘나만 아는 세계멸망’ 시즌4도 촬영을 해야 하고, 거기다 미국에 가서 영화까지 출연하라고 하니 불만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스티브는 그래도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하기 싫은지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유정 씨가 연애 초기인데 일만 시킨다고 불만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긴 합니다.”

“그렇죠?”

역시 스티브도 나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큰일인데요. 사실 나유정 씨를 캐스팅하는 것도 제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거든요. 잘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나유정 씨가 꼭 필요한 이유가 있나요?”

“저희 보스가 유정 씨의 광팬입니다. 이미지가 완벽하다며 꼭 캐스팅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높은 곳의 지시라···.”

“그러지 마시고 이 대표님이 다시 잘 설득하셔서···.”

“씁···. 그게 저도 쉽지가 않네요.”

“으음···.”

스티브는 입장이 곤란한지 계속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검후는 중국 출신 캐릭터 아닙니까? 예측할 순 없지만 아무리 유정 씨의 이미지가 중국에서 좋다고 해도 코믹스의 중국 팬들은 출신 국적을 따져 가며 크게 반발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그런 리스크도 있긴 합니다만 배우의 싱크로율이 너무 뛰어나서 말이죠.”

“···그렇긴 합니다.”

나도 코믹스에 나오는 ‘검후’라는 캐릭터를 알고 있다. ‘나만의 세계’에서 칼을 휘둘렀던 그녀를 봤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캐스팅이랄까?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현재 상태로는 유정 씨를 설득하긴 쉽지 않지만 다른 아이디어가 있긴 합니다.”

“다른 아이디어요?”

스티브는 캐스팅이 무산될 것 같아 보이자 상당히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네. 다른 쪽으로 접근하면 될 것 같기도 하거든요.”

나는 바로 말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었다.

“어떻게요?”

“유정 씨가 제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게 미국으로 건너가 촬영을 하는 건데요. 그 대안으로 촬영 장소를 한국으로 바꾸는 겁니다.

“한국이요? 그렇다면 스토리가 이상하게 꼬일 텐데요?”

나는 의구심을 가진 스티브를 보고 살짝 미소를 띄웠다.

“그렇다면 검후라는 캐릭터를 빼면 됩니다. 대신에 유정 씨의 걸밴드인 ‘네미시스’를 넣는 겁니다.”

“네미시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귀환소녀’를 마블링 유니버스 세계관에 넣는다고 하셨으니 미리 맛보기로 등장시키는 겁니다.”

“그, 그렇다면 검후 캐릭터 대신 누구를 등장시키는데요?”

“마블링에 한국인 히어로가 있지 않습니까?”

“누구요?”

“루시드 파이어요.”

루시드 파이어.

최근 마블링 코믹스에 등장한 한국인 히어로로 해외에서 인기가 높은 걸그룹 멤버다.

미국에 공연하러 갔다가 특수 공연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을 갖추게 된 신규 캐릭터로 인기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마블링의 캐릭터에 대한 깊은 고뇌의 산물이었다.

강한 히어로의 모습만이 아닌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현대 여성을 보여 주며 팬들의 공감을 사는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실제로 음원까지 발매했을 정도고, 가능성을 눈치챈 그들이 SG 엔터테인먼트와 협력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미래 전략을 살짝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드라마를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루시드 파이어라···. 흐음···.”

“그 루시드 파이어 역할로 유정 씨를 넣는 겁니다. 네미시스가 실제 아이돌 그룹이니 가능한 거죠. 사고로 불의 능력을 얻고 한 번 더 각성하는 거예요. 홍염의 소드마스터랄까···.”

“소드마스터···.”

“아무래도 귀환소녀에서 유정 씨가 들었던 ‘식칼’은 빼야겠죠. 더 좋은 무기를 좀 얻는 거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 좀 해 봅시다.”

스티브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지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긴장을 풀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대표님 생각은 검후를 빼고 그 자리에 루시드 파이어를 넣고,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를 중국이 아니라 한국으로 바꾼다는 거죠?”

“네.”

“거기에 루시드 파이어는 유정 씨가 맡고, 그 루시드 파이어가 소속된 걸그룹은 네미시스인 거고···.”

“맞습니다.”

“아우라도 출연시키실 계획입니까?”

“마블링 시네마틱 무비에서는 아무래도 ‘루시드 파이어’에 집중해야 하니 그냥 옆에서 카메오 정도로만 출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카메오로 생각하시는군요.”

“사실 나중에 귀환소녀 시리즈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을 생각이니 미리 등장을 시켜 놓으면 마블링 쪽에서도 투자하면서 홍보하시기도 편할 테고요. 어떻게 보면 세계관의 확장이니까요.”

“음···.”

나는 귀환소녀 시즌 2를 찍은 뒤 그 후속으로 블록버스터 영화인 ‘귀환소녀 재앙의 날-퍼스트 임팩트’를 제작하려고 했다. 게이트에서 뛰쳐나온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능력자들의 활약을 보여 줄 예정이었다.

제작에 들어가기 전 미리 투자도 받고 마블링의 영화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으면 좋을 것 같았다.

“스케일은 크지만, 비용은 마블링 시네마틱 무비의 절반도 안 들어갈 겁니다.”

“상당히 끌리는 제안입니다만, 중국에서의 흥행을 생각하면···.”

“글쎄요. 제 생각은 중국 사람들도 고리타분한 무술 캐릭터보다는 그들이 사랑하는 배우가 케이팝 스타 히어로로 나오는 것을 더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애초에 검후 대신 나왔다는 소리는 없어야겠죠.”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이건 제가 혼자 결정하기 힘든 사항입니다.”

이런 큰 결정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해합니다.”

“서로 바쁘니 제가 바로 보스와 통화를 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회의실로 들어가 보니 스티브 한의 얼굴이 한결 평온해 보였다. 해결이 잘 된 걸까?

“보고는 잘 끝나셨습니까?”

“네. 보스가 더 좋아하시더군요. 케이팝의 글로벌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는 차라리 ‘루시드 파이어’가 나오는 게 시기적절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역시···.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유정 씨의 팬이기도 하고 참···. 여러모로 괜찮으신 분이신 거 같습니다.”

내가 그 말을 하자 스티브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 같았다.

“···대단하신 분이시죠.”

“후후···.”

그렇게 나는 마블링 스튜디오와 맺었던 계약을 변경할 수 있었다.

‘힘들다. 힘들어.’

* * *

나는 집에 있겠다는 유정 씨를 겨우 불러내서 파주로 드라이빙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유정 씨 좋아하는 간장게장이나 먹으러 갑시다.”

“어쩐 일로 먼저 가자고 해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유정 씨가 영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서 풀어 주려고요.”

“혹시 주리가 조언이라도 해 줬어요?”

“그런 거 아닙니다. 다 왔네요. 내리시죠.”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참 오랜만이네요. 몇 년 만이지? 한 3년?”

“시간이 참 빠르네요. 여기서 점심을 먹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 들어가시죠.”

우리는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나유정 씨! 그리고 작가님!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간장게장 집 사장님이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러게요. 자주 왔어야 하는데 말이죠.”

“어서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간장게장 맛있는 놈으로 내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우리는 항상 앉던 자리에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여긴 변한 게 없네요. 저기 걸린 우리 사진도 그렇고요.”

유정 씨가 가리킨 곳에는 우리가 처음 찍었던 사진이 아직까지 떡하니 걸려 있었다.

‘저 사진 때문에 내 정체가 들통났었는데···.’

뭐 어차피 곧 공개하려고 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열애설이니 하는 기사가 나서 애를 먹긴 했었다.

잠시 기다리니 아주머니가 음식을 가지고 오셔서 상에 세팅을 해 주었다.

“호호···. 내가 그때 두 사람이 이렇게 될지 알았어요.”

접시를 상에 올리시던 아주머니께서 미소를 짓고 계셨다.

“네?”

“두 분이 잘될지 알고 있었다고요.”

“아···. 뭐···. 결국은 그렇게 됐네요.”

“아이구. 내가 주책이죠? 오래 살고 사람들을 많이 보면 그냥 그런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유정 씨도 이 상황이 웃긴지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맛있게들 드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정신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식사를 한 후 어제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어제 마블링 관계자와 다시 만났는데요. 유정 씨 캐스팅에 대해 좀 더 좋은 쪽으로 재협상을 했습니다.”

“어떻게요?”

그녀는 게장을 손으로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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