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259화 (259/263)

최종 협상 (2)

또다시 회의실에 침묵이 찾아왔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아낌없이 보여 주는 모습에 살짝 감동하고 말았다.

“J&J는 당연히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강한 신뢰감이 깃들어 있었다.

‘잠깐! 왜 이렇게 띄워 주지?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하는데···.’

이 정도로 굽히고 나오는 걸 보면 디플러스의 상황이 상당히 급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넷플릭이 너무 빠른 속도로 아시아 시장을 장악해 버렸으니까.

잘 생각해 보면 드라마 공급 계약이 급한 것도 디플러스 쪽이었다. 두 번째로 마블링 유니버스에 귀환소녀 IP를 넣는다는 것도 시리즈의 가능성과 새로운 피를 수혈한다는 의미이지 선심을 쓰듯 베푸는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유정 씨에 대한 캐스팅 또한 예전부터 시도했었던 것으로 결국 새로울 게 없었다.

‘뭐야. 고마워해야 할 게 없잖아?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갑인데···.’

“스티브?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그 세 가지 제안은 디플러스 쪽에서 저희 쪽으로 당연히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부탁이요?”

“그런 당연한 거 말고 더 파격적인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주식 맞교환 이런 거 말고요.”

스티브 한은 내 말을 듣고 살짝 움찔하는 것 같더니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식 같은 건 필요 없으시군요? 하하···. 그거 말고 당연히 준비한 게 있습니다. 저희가 전략적 파트너 계약을 하는 의미로 귀환소녀 시즌1 방영권을 50억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사도록 하겠습니다.”

‘50억? 이, 이건 대단한데?’

귀환소녀는 대외적으로 제작비가 약 50억 원 정도가 들어갔다고 알려졌지만, 그것보다 훨씬 적은 제작비인 40억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추리물 같은 요소에 장소가 거의 학교로 국한돼 있고 카메오인 유정 씨를 제외하고는 몸값이 비싸지 않은 신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CG 처리를 제외하면 돈이 많이 들어간 작품은 아니었다.

원래 방영권, 그러니까 드라마 라이선스 유통은 제작비의 50~70% 선에서 정해지는데 이미 TVM 측과 PPL 때려 박기로 제작비 대부분을 회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50억 원이라고? 거의 100%를 초과하는 수익률을 거둔 것이다.

‘넷플릭도 이 정도는 주지 않을 텐데···.’

물론 이 금액이 디플러스 쪽에는 별것 아닌 껌값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디플러스가 왜 이렇게 후하게 콘텐츠값을 매겼는지 궁금해졌다.

물어봐야 말은 안 하겠지만 아마도 급한 마음이 클 것이다. 통신사들과 협상은 지지부진하고 경쟁사인 넷플릭은 한국의 콘텐츠를 거의 쓸어 담듯 차지하고 있는 형국 아니던가?

더불어 중국 OTT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대작 드라마를 엄청난 가격으로 아예 하이재킹 하다시피 빼가 버린 사례도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 귀환소녀의 IP는 아시아 마블링 유니버스의 신성장 동력으로 작용할 테니 아예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는 판단이겠지.

“흐음···. 뭐 후하시네요. 좋습니다. 그 정도로 성의를 보이시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만간 서비스가 한국에 출시될 예정이니 시즌 2 제작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환소녀는 언제든 새로운 히어로가 탄생하기 때문에 단발성 드라마가 아닙니다. 원래부터 그런 식으로 만들려고 했고요.”

“블록버스터 영화로 만들 때는 저희도 제작 회의부터 참가시켜 주십시오.”

“네. 뭐 그 문제는 그때 가서 논의하도록 하시죠.”

“감사합니다. 대표님. 여기 MOU 계약서입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앗!”

“왜, 왜 그러시죠?”

“아···. 이거 참···. 넷플릭한테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신경도 쓰고 있지 않지만, 일부러 이런 난감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문제가 남아 있군요.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계약 파기가 아니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대표님께서 잘···.”

스티브 한도 뾰족한 수가 없는 감정적인 영역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MOU 서류에 사인하려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나유정 씨가 마블링 시리즈에 캐스팅되면 출연료는 할리우드 일류 배우급으로 책정이 되겠죠?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였고 최근 여러 드라마에서 아시아의 넘버 원 배우로 우뚝 섰지요. 거기다 영어까지 훌륭하니···.”

“그거야 당연하죠. 그 문제는 제가 제 이름을 걸고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마블링 시리즈는 한국과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그런데 아시아가 사랑하는 배우인 나유정이 거기에 캐스팅된다면?

모르긴 몰라도 관객 수가 엄청나게 증가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협상이 깔끔하게 종료됐다. 귀환소녀 시즌1은 엄청난 수익률을 거뒀고 차후 마블링 유니버스에 차근차근 통합하기로 했다.

거기다 유정 씨까지 할리우드 일류 배우급으로 출연료가 책정되니 여기서 또 어마어마한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이거야 원. 풀려도 너무 잘 풀리네.”

나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헤어지고 차를 몰고 회사로 직행했다.

곧바로 5층에서 모든 부서를 소집하고 오늘 있었던 회의 결과를 공유했다.

“와! 50억이요? 수익률 미쳤네요. IP를 넘긴 것도 아니고 방영권 판매 수익만으로 그렇게 돈을 준다고요?”

‘나세멸’ 시즌 3이 끝난 후 오랜만에 쉬고 있던 김호진 감독이 깜짝 놀라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세계적으로 히트한 ‘나세멸’의 수익보다 더 많이 벌 것 같지 않은가? 이래서 IP를 넘겨 버리면 아쉬움이 크게 남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디플러스가 급한 모양입니다. 요즘 이런 경쟁 상황이 아니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넷플릭과 디플러스 사이에서 외교를 적당히 하며 실리를 챙기면 됩니다. 어차피 OTT 글로벌 플랫폼은 하나가 독점을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한쪽에 올인을 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할 수 있죠.”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조아린 실장이 손을 들었다.

“대표님. 최고의 시나리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특히 귀환소녀 IP가 마블링 유니버스의 세계관과 통합된다는 게 아주 매력적인데요. 귀환소녀 한 작품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작품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그냥 MOU까지 맺고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대표님. 혹시 그런데 이런 시나리오를 예측하시고 넷플릭과 계약을 미루신 건가요?”

“완전히 노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흘러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와 잘 통하는 그쪽의 유능한 직원이 있어서 일이 쉽게 풀렸네요.”

“스티브 한이라고 하셨죠? 내일 연락이 오면 정식으로 계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들 나가서 일 보세요. 오늘 회의에서 있었던 일은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만 아셔야 합니다. 비밀 엄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나는 회의를 마치고 퇴근을 서둘렀다. 아직은 차가 덜 막히는 시간이라 그런지 집까지 상당히 일찍 도착했다.

‘휴···. 처음에는 이 거리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좀 무리가 있네. 독립이라도 해야 하나?’

나는 집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하고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이사 온 지 15년도 넘었지 아마?’

하지만 이 낡은 아파트는 아직까지 쓸 만했고 가격도 많이 올라서 부모님의 든든한 노후 자산이 됐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돈은 내가 충분히 벌어 둔 터···.

부모님이 편하면 된 거지, 오래됐다고 굳이 억지로 이사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예전 같으면 부동산 투자를 하신다고 시끄럽게 구셨을 텐데 아들이 돈을 잘 버니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나이도 드셨고 친구들도 근처에 사시니···.

띵···.

나는 엘리베이터에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참나···. 수백억 자산가의 집이 분당의 20년 된 집이라니···.’

쓴웃음을 지으며 거실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셨다.

“아들 왔니? 피곤하지?”

“엄마. 유정 씨는요?”

“주리 방에 한번 가 봐. 곧 방송한다고 하던데?”

“뭔 방송을 한다고···. 쩝.”

“내버려 둬. 둘이 사이가 좋잖아.”

문에 노크하고 열어 보니 유정 씨와 주리가 머리에 헤드셋을 쓰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두 명 모두 손을 흔들었다.

“오빠 왔어?”

“왔어요?”

“몇 시에 방송 시작해?”

“5분 있으면 시작해. 한두 시간 정도 할 거니까 그 후에 데이트하시든지.”

“그래. 알았다. 유정 씨! 좀 이따가 이야기 좀 해요.”

“알았어요.”

나는 문을 닫고 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뒤 씻고 어머니가 차려 주신 밥을 맛있게 먹었다.

“엄마. 꼬막 비빔밥 맛있었다. 베리 굿!”

“우리 아들. 빈말이라도 고맙네?”

“유정 씨도 먹었어요?”

“그럼.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더라.”

“곧 있으면 드라마 촬영해서 요즘 운동을 엄청 열심히 하거든요.”

“그래. 보면 볼수록 예뻐 죽겠더라. 어쩜 그렇게 생겼는지···.”

“아들이 며느리 하나는 끝내주게 데려왔죠?”

“그러게. 난 네가 미적거리다가 놓치는 줄 알았어.”

“엄마. 아들이 어디 그럴 사람이유?”

짝!

“윽···.”

우리 엄마의 전매특허인 등짝 스매싱이 작렬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쉬어. 아 참···.”

“또 왜요?”

“너 슬슬 집 구해야지.”

“무슨 집이요?”

“뭐긴 뭐야. 신혼집이지! 되도록 회사하고 가까운 곳으로 구해라. 귀찮으면 유정이네 집으로 들어가든지···.”

“또 오버하시네. 이제 사귄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웃기지 마. 만난 것만 따져봐도 4년이 넘었다. 아니, 5년 다 됐을걸?”

“벌써 그렇게 됐나? 아무튼, 정식으로 사귄 지는 얼마 안 됐어요.”

“곰곰이 잘 생각해 봐.”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어머니에게 엄지 척을 날린 후 방으로 들어갔다.

“와! 내 방 실화냐?”

갑자기 신혼집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방이 참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침대 하나에 책상, 컴퓨터, 옷장이 끝이었다. 고개를 한 번 흔들고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요즘은 신작을 쓰고 있었다. 현대 판타지물로 나중에 장편 영화를 만들 예정이었다. 영화 ‘매트릭스’ 같은 느낌으로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드는 액션 스릴러 판타지물이었다.

‘음···. 이거 재미는 있는 건가?’

요즘 너무 돈 버는 것만 하다 보니 글 쓰는 게 영 시원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돼서 말이야. 큰일이네. 큰일.’

한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기계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타닥타다다닥···.

오랜만에 몰입해서 글이 잘 써졌다. 집에 유정 씨까지 있어서 그런가? 안정감이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나는 집중 상태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정 씨가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다.

“방송 끝났어요?”

“네. 뭐 해요? 글 썼어요?”

“오랜만에 집중했네요. 휴···. 많이도 썼네.”

“아까 할 말 있다면서요?”

“잠깐 요 앞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갈까요?”

“좋아요!”

밤 9시라 한산했지만, 초여름이라 그런지 공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차피 사귀는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기 때문에 이제는 신경 쓸 게 없었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공원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방송 재밌었어요? 게임 진짜 못하던데···.”

“제가 게임까지 잘하면 어떡해요. 그럼 정말 사기 캐죠.”

“정당화하는 게 프로페셔널한 사기꾼 수준이네요?”

“사실인데 뭘···.”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댔다. 내 따뜻한 옆구리처럼 마음도 이내 훈훈해졌다.

“오늘 마블링 스튜디오하고 디플러스 임원을 만났어요. 거기서···.”

나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유정 씨에게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귀환소녀 방영권을 50억에 팔고 IP도 마블링 세계관에 통합시키기로 했다고요? 거기다 연도별로 드라마를 계속 공급하기로 MOU도 맺고요?”

“맞아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이건 유정 씨 일이에요.”

“뭔데요? 말해 보세요.”

그녀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왜 그렇게 예쁜지···.

“마블링 스튜디오에서 유정 씨를 캐스팅하겠답니다. 그것도 오디션 없이 할리우드 일류 배우 수준의 개런티로요. 대박이죠?”

“······.”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무표정했다. 아니 살짝 미간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왜, 왜요? 엄청 좋은 조건인 거 같은데···.”

“지금 저보고 드라마를 찍는 것도 모자라 미국까지 건너가서 영화를 찍으라는 거예요?”

“에? 무슨 문제가···.”

그녀의 뜻밖의 반응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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