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협상 (1)
“마블링 스튜디오라···. 그렇군요.”
이때쯤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조아린 실장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제가 놀라야 합니까? 저번에 그 누구더라? 캐스팅 디렉터라는 사람하고 통화도 했었는데요. 존 킴인가 뭔가···. 살짝 짜증 나던데···.”
“아! 그렇네요. 그때 그 사람이 나 이사님께 배역을 제안했었죠. 오디션 보러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했던가요?”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월드 스타를 뭘로 보고 그딴 조연 자리나 제안하면서 어딜 오라 가라 하는지···.”
퍽! 주먹으로 테이블을 살짝 내리쳤다.
“그, 그런데 할리우드는 원래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나요?”
조아린 실장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뭐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고 이제 유정 씨는 굳이 그런 역할을 안 해도 됩니다.”
“그럼 마블링 스튜디오 담당자에게 바빠서 못 만난다고 할까요?”
조 실장은 손에 들고 있던 플래너를 열고 일정을 체크하는 것 같았다.
“그건 아닙니다. 한번 만나 보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제가 일정을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여기인가? 시티 호텔은 처음이네.”
나는 오늘 회사 근처의 시티 호텔 미팅룸에서 회의를 가질 예정이었다. 외국에서 온 손님을 만나는지라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나온 상태였다.
“음···. 역시 나는 정장이 잘 어울려.”
엘리베이터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는 날 보고 조폭 영화에 나오는 보스같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누군가가 나를 보며 눈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이 대표님. 저는 마블링 스튜디오의 ‘스티브 한’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사내가 나를 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J&J의 이준형입니다.”
“자···. 미팅룸으로 들어가시죠.”
스티브는 단정한 올백 헤어 스타일에 전형적인 상류층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말하는 게 나름 준수한 한국어였는데, 토종 발음은 아니었지만 아마 미국 교포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미팅룸으로 들어가니 한 명의 백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해 왔다.
그는 자신을 디플러스의 케빈 포즈너 이사라고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에 언제 들어오셨는지요?”
“들어온 지는 이틀 정도 됐습니다. 지사 설립 때문에 바빴습니다.”
“오···. 드디어 지사가 들어오나요?”
“하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모기업에 공간을 좀 얻어서 거기서 일을 처리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내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나저나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나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스티브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희가 J&J 같은 전문 콘텐츠 업체를 찾은 건 뻔한 일이겠지요.”
“오리지널 드라마 공급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른 것이라···.”
“먼저 드라마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음···. 그런데 옆에 계신 분께는 통역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아! 중요한 내용만 해 드리면 됩니다. 기본적인 것들은 제가 권한이 있습니다.”
이 깔끔하게 생긴 스티브라는 사내가 의외로 디플러스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인 듯싶었다. 분명 마블링 스튜디오 사람이라고 했는데···. 뭐 상관없으려나? 둘 다 모기업이 같으니까.
“아!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전에 마블링에서 저와 접촉했던 분이 계신데요. 성함이 존 킴이라고 캐스팅 디렉터였는데···.”
“아···.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 사람은 이미 해고되었습니다. 배우를 캐스팅하라는 업무를 맡았는데 일을 아예 그르쳤더군요.”
“그렇군요. 그래도 해고라니···.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
“미국은 한국하고 달리 비교적 고용과 해고가 쉬우니까요.”
“그럼 드라마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어떤 제안을 하실지 궁금하네요.”
나는 상의를 벗고 회의실 테이블에 놓인 별다방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스티브는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했다.
“키가 크시네요. 덩치도 좋으시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스티브 이사님도 무슨 배우처럼 생기셨습니다.”
“아! 제가 사실 미국에서 배우 활동을 조금 했었습니다. 뭐 잘 안 돼서 진로를 바로 바꾸긴 했지만요.”
잘한 것 같았다. 스카우터로 잠시 확인을 해 보니 아우라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쨌건 지금은 성공하셨군요.”
“네.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제 저희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일단 그렇다고 하는 것을 봐선 아무래도 이번 한국 진출의 성공이 이 사람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봉투에서 뭔가 인쇄된 파일을 꺼내더니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파일을 받아서 잠시 읽어 본 나는 자료를 덮고 스티브와 케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귀환소녀 시리즈를 확보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니 이 귀환소녀 시리즈는 아직 넷플릭과 계약을 안 하셨더군요?”
“흠···. 그것까지 알아보셨습니까?”
“아무래도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이다 보니 이것저것 조사를 좀 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계약을 안 하신 것은 디플러스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스티브는 냉정한 눈빛을 빛내며 내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 알아보고 왔다는 그런 표정이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어제 넷플릭에서 계약하자고 전화가 왔더군요. 이민영 씨라고 넷플릭 코리아 총괄 디렉터시죠. ”
“아···.”
그는 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돌려 케빈에게 영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케빈의 미간이 살짝 꿈틀대는 것 같더니 스티브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디플러스는 도대체 언제 서비스를 시작하는 겁니까? 기사를 보니 국내 통신사들하고 협의하시는 거 같던데요.”
“무조건 올해 서비스를 할 예정입니다. 기사와 다르게 몇 가지를 빼면 거의 합의점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어디 가셔서 이야기하시면 곤란합니다.”
“네, 당연하죠.”
“하하···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그런데 디플러스가 한국에서 성공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거 같던데요?”
“그게 무슨?”
나는 협상에서 유리한 포지션을 선점하기 위해 일부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디플러스는 한국의 오리지널 시리즈라든지···. 콘텐츠가 너무 부족한 것 같던데요.”
“그렇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본사의 콘텐츠와 마블링 유니버스의 작품들은 엄청난 인지도를 자랑합니다. 저희는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경쟁사 사례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는 들쑥날쑥한 넷플릭의 콘텐츠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글쎄요. 그렇긴 해도 전 넷플릭의 다양성이 좋던데···. 디플러스에 한국 콘텐츠가 없다면 초반에 돌풍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 성장세가 바로 꺾일 겁니다.”
“하하···. 대표님이 뭔가 착각하시는가 본데요. 넷플릭보다 저렴한 가격과 고른 수준의 콘텐츠로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흥행하고 있습니다.”
스티브는 자사의 콘텐츠에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넷플릭 코리아 역대 TOP 10에 드는 조회수를 기록한 작품들이 모두 다 한국 콘텐츠라는 거 아시죠?”
“······.”
명백한 팩트라 그런지 스티브 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중의 두 개가 제 작품입니다.”
‘나만의 세계’ 그리고 킬러 콘텐츠가 된 ‘나만 아는 세계멸망’ 말이다.
어디서 어설프게 우위를 점하려고 하시나?
“···그래서 저희가 대표님을 뵙자고 한 거지요.”
“그럼 조건을 들어 볼까요?”
스티브 한은 자료를 짚어 가며 세부적인 조건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자면···.
첫 번째, J&J는 전략적 파트너로서 제작하는 콘텐츠를 디플러스에 공급한다. 디플러스에서 제작비를 전액 지원하며 마진은 파격적인 수준인 30%를 제시했다. 이는 최근에 와서 드래곤 플라이 스튜디오가 넷플릭에 받는 마진이었다.
“후하시네요.”
“그럼요. J&J의 콘텐츠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요. 듣자 하니 작가와 제작팀도 계속해서 증원하고 기업 사이즈를 계속 불려 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희는 대표님의 비전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다른 기업들처럼 이것저것 하지 않으시고 콘텐츠만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제가 잘하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말이죠.”
“그래서 올해부터 드라마 공급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현 J&J의 제작 캐파를 고려해서 단계별로 숫자를 늘려 나가려고 합니다.”
“······.”
스티브는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눈을 굴리며 옆에 앉은 케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곧 평정심을 되찾으며 헛기침을 한 후 추가로 더 큰 조건을 내걸었다.
“···거기에 더해 귀환소녀 IP를 마블링 유니버스에 포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솔직히 이건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정 씨를 영화에 캐스팅해 주겠다는 그런 제안인 줄 알았는데 귀환소녀를 유니버스에 넣는다고?
“귀환소녀 IP를 바탕으로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려고 하시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시즌별로 제작할 예정이고 블록버스터 영화도 계획 중입니다.”
“그럼 최적의 플랫폼은 넷플릭이 아니라 디플러스겠네요. 바로 마블링 유니버스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내가 알기론 마블링은 국내 SG 엔터테인먼트와도 이런 협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케이팝에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으니 자신들의 세계관에 끌어들이고 싶은 거겠지.
“왜 이런 제안을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저흰 그 시리즈에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귀환소녀는 추리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히어로물입니다. 미국인들은 히어로를 사랑하죠. 더군다나 귀환소녀는 서사가 있습니다. 특수 능력도 있고요. S맨하고 비슷합니다.”
“가능성이라···.”
“귀환소녀 시즌1 마지막을 보니 5인의 히어로들이 다른 사람도 각성을 시키던데, 5명만 능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 다른 영웅들도 나오더군요. 그 점이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스티브가 지적한 대로 귀환소녀 시즌1의 중간 보스를 잡을 땐 나유정과 김지섭의 각성이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개그맨 김지섭은 몰매를 맞는 역할을 하는 탱커였고 나유정은 검을 사용하는 근접 딜러 역할이었다.
나유정은 개인적으로 검도에 각별한 애착을 두고 있어 이번에도 칼을 이용해 각성하는 캐릭터로 등장시켰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녀의 무기는 검이 아니라 주방용 나이프였다. 네미시스의 막내 정유나의 남모르는 취미가 바로 요리였으니까.
“나유정 씨가 숏 소드를 들고 괴물을 도륙하는 장면은 봐도 봐도 웃기더군요.”
“숏 소드···.”
스티브 한도 살짝 민망한지 ‘주방용 칼’ 혹은 ‘식칼’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고상한 단어인 ‘숏 소드’를 언급하고 있었다.
“웹소설도 보시나 봐요?”
“예. 가끔 봅니다. 아이디어도 얻을 겸요.”
“그렇군요.”
“이 정도면 저희가 J&J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나는 스티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추가로 저번에 캐스팅하지 못한 검후라는 캐릭터에 나유정 씨를 캐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거까지요?”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귀환소녀 세계관이 마블링과 합병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