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1일 (2)
‘나만 아는 세계멸망’이 공개되고 하루가 지났다. 한국에서는 나유정의 SNS 게시물과 함께 폭풍 시너지를 일으키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세멸’은 이미 전 세계적인 팬덤을 거느린 시리즈로 변모했기 때문에 시즌 3을 전부 시청했다는 각국 팬들의 반응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즌 2 좀비 슬로터하우스의 충격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손에 땀을 쥐면서 봤다.
-주인공이 침투한 코퍼레이션의 실험체들이 너무 끔찍했음.
-이거 좀비물에서 라이징 이블 시리즈로 급선회하는 거 같은데 거부감이 적네. 작가가 시즌 1부터 차근차근 복선을 깔아서 그런가?
-정주빈 각성 모드 어쩔 거임. 물려도 좀비가 안 되는 걸 보고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어지네. 결국, 정주빈이 프로토타입이었던 거네. 범인은 제약사를 경영하는 작은아버지고···.
-야! 스포일러 좀 하지 마. 어쨌거나 작은아버지가 코퍼레이션의 중간 간부로 밝혀짐. 그래서 형을 청부 살해하고 조카의 지분을 꿀꺽한 거지.
-너나 스포일러 하지 마라.
-싸우지들 말고···. 솔직히 제일 뒤통수가 얼얼했던 건 마지막에 등장한 나유정 아니냐? 진짜 오지더라.
-나유정 얼굴이 무슨 안드로이드처럼 보이게 나왔더라. 창백한데 진짜 예뻐. 이준형 작가 나쁜 자식. 죽일까?
-이준형은 공공의 적이야. 나의 유정 씨를···. 흑흑···.
-그런데 다들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공식 발표만 없었을 뿐.
-그래도 이준형이 캐릭터 하나는 진짜 잘 만드는 것 같아. 매번 드라마에서 나유정 캐릭터는 엄청나게 공들이는 듯. 원래 나유정 빠였나? 첫 작품부터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 좀 무섭다. 성공한 오타쿠 뭐 그런 거 아냐?
-그렇지. 나는 왜 나유정이 안 나오나 했다.
-나유정 얼굴이 엄청 화려하고 예뻐서 저 배역에 은근히 잘 어울리네.
-근데 레이첼이라는 캐릭터는 뭐지? 레이첼 부장이라고 부르던데···. 코퍼레이션 측의 악역인가? 아무래도 실험체 중의 하나라는 느낌이고 라이징 이블 여주인공을 오마주한 것 같더라.
-등에 칼을 차고 있던데 특기는 또 칼춤인가? ‘나만의 세계’ 나지혜잖아.
시청자 대부분이 시즌 2보다는 충격이 덜하지만, 추리물처럼 흥미진진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시즌 3의 내용은 좀비를 유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정주빈(정중대 역)이 슈퍼 셸터로 돌아와 생존자들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셸터의 지하 벙커는 알 수 없는 미증유의 힘에 의해 파괴된 상태였다.
정중대는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다른 생존자 무리를 발견하게 되고 일행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은 후 코퍼레이션의 흔적을 발견하고 엄청난 규모의 제1 연구소에 몰래 잠입해 기지를 훑어보고 동료를 빼낼 기회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제1 연구소 지하 수용 시설에서 생체 병기 샘플로 태어난 실험체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문제는 바로 옆 수용소에 동료들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정중대는 수용 시설을 파괴하고 혼란해진 상황을 틈타 동료들을 데리고 연구소를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된다.
연구소에 큰 피해를 입은 코퍼레이션이 프로토타입을 척살하기 위해서 파견한 인원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게 나유정이 연기한 레이첼이라는 역할이었다.
나세멸 시즌 3을 본 시청자들이 나유정의 캐릭터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쏟아 내고 있었다.
[SNS로 교제 사실을 알린 나유정이 ‘나만 아는 세계멸망’ 시즌 3을 언급한 이유는?]
[배우 나유정, 처음 시도해 보는 악역에 설렌다···. 시즌 4에서 정주빈과 격돌할 듯···.]
[J&J의 모든 행보에는 항상 고도의 마케팅이 숨어 있다. SNS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어휴···. 이 데일리 연예서치 놈들. 하다 하다 음모이론까지 들먹이네. 무슨 고도의 마케팅이야. 내가 무슨 스티브 잡스도 아니고···.”
뭐 그래도 그만큼 마케팅을 잘했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나는 차를 주차하고 회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에서 같이 탄 직원들이 내 얼굴을 보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보기 좋았습니다.”
“프로그램 취지하곤 좀 안 맞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아···. 예. 쑥스러우니 그만 좀 합시다.”
“하하하···.”
직원들은 나유정과 공식적으로 연인 사이가 된 나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기분이 좋다가도 민망한 생각이 들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조 실장님. 잠시 봅시다.”
[네. 대표님.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나는 조아린 실장을 호출해 시즌 3 반응과 따로 지시했던 일을 체크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조 실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음···. 이런! 조 실장도···.
“뭘 그리 축하한다고 하는지 원···.”
“축하해 드려야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쁜 여자친구를 두셨는데요?”
“그건 모르겠고 공공의 적이 되긴 했더군요.”
“뭘 모른다고요?”
옆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나유정이었다.
“어···. 깜짝이야.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요?”
평상시라면 문을 막든지 해야 한다는 시니컬한 농담으로 시작했을 텐데, 이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어제 잠도 안 오고 해서 그냥 일찍 출근했어요. 오늘 오디션 촬영이 있기도 하고···.”
“아···. 오늘이 그날이었나?”
“네. 맞습니다. 대표님.”
오늘은 MBS에서 제의한 오디션을 찍기로 한 날이었다.
MBS에서는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의 비중 있는 조연을 뽑기 위한 오디션을 ‘왜 혼자 사니?’ 프로그램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다.
골든벨의 정수인이 한다고 했으면 주연급 배틀이 벌어졌을 텐데 결국 그녀의 소속사는 출연을 거절했다. 이것저것 재 보고 아니다 싶었는지 포기하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나와 유정 씨 앞에서 조연 여배우 오디션을 기획한 MBS였다.
“어휴···. 이걸 꼭 해야 하나? 우리 이번에 계약한 능력 있는 여배우들 많은데···.”
“뭐 어쩌겠어요. MBS에서 불안한지 홍보를 하겠다는데 도와달라잖아요.”
“아니···. 그래서 저번에 찍었잖아요. 왜 2차로 진행을 한다는 건지···.”
“그때 오디션을 너무 급하게 해서 뽑을 배우가 없다잖아요.”
“아···. 그렇긴 하네.”
이미 1차로 찍은 오디션은 대실패였다. 배우 오디션을 방송에서 한다고 꺼리는 사람도 많았고 일정도 너무 촉박해서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배우 지원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MBS에서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강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말았다.
방송국에서 했던 1차 오디션과는 달리 이번에는 우리 회사에서 면접을 보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 좋은 배우가 지원해서 한 번에 끝냈으면 좋겠는데···. 아! 우리 신인 배우들도 이번에 다 지원했죠?”
“네 대표님. 관심 있는 배우들에게 말해 줬더니 다들 참가한다고 전해 왔습니다. 어쨌건 신인들에게는 얼굴을 알릴 좋은 기회니까요.”
“좋군요. 꼭 우리 배우가 역할을 따내면 좋겠네요.”
“그렇게 돼야죠.”
“그건 그렇고 어제 나세멸 시즌 3 반응은 좀 살펴봤나요?”
“네. 대표님. 분위기가 상당히 좋습니다. 내부적으로 시즌 3은 살짝 쉬어가는 시기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그건 왜죠?”
조아린 팀장이 안경을 검지로 쓱 위로 치켜올리더니 말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팬분들이 살짝 지루하실까 봐 추리물 느낌이 나게 대본을 손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전 딱히 모르겠던데.”
“원래 쓴 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오히려 본인은 잘 모른다고 하잖아요. 대표님이 딱 그 케이스에 해당하시는 거 같은데요?”
“뭐 반응이 좋으니 다행이죠.”
“아···. 그리고 이번에 2차 오디션을 보는 거 말인데요.”
“네. 말씀하세요.”
“그냥 제 생각일 뿐입니다. 안 PD가 연기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대표님하고 이사님의 추가 인터뷰를 하려고 핑계를 대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건···. 저도 대충 인지하고 있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SNS로 사귄다는 발표를 했으니 ‘왜 혼자 사니?’ 측에서는 살짝 짜증이 났을 거다. 방송에서 고백했으면 시청률에 엄청난 도움이 됐을 텐데···.
조 실장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드라마에 임팩트 있는 배우가 부족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요.”
솔직히 나도 조연에 대해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이 비중 있는 조연의 역할은 윤하영의 라이벌로 나오는데, 걸그룹 출신으로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예쁘기까지 하지만 싹수없는 그런 캐릭터였다.
실제로 노래 부르고 춤도 춰야 해서 좋은 배우가 필요한데 막상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 힘들었다.
‘뭔가 신선하고 잘하는 사람이 없을까? 다솜이라도 오디션을 보게 해야 하나? 다솜이는 카오스 TV 오리지널 시리즈 ‘흑백 로맨스’를 찍어야 하는데···.’
식스엔젤 윤지는 이미지랑 안 어울리고 블랙소울 혜수는 월드 투어로 너무 바빴다.
‘허···. 참 이거야 원. 조연을 걱정하다니···. 시후 이 녀석, 조연을 너무 임팩트 있게 써 놨어.’
모르겠다. 솔직히 성공시켜야 하지만 그냥 망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는 그런 이중적인 마음이 들기도 하는 작품이다.
‘우리 신인 배우들도 다 지원했으니 그냥 믿고 가야지. 능력은 있는 배우들이니까···.’
잠시 후 회사로 ‘왜 혼자 사니?’ 제작진들이 도착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마지막인데 도와드려야죠.”
“일단 유정 씨하고 인터뷰 한번 하시고···.”
역시···. 이 시청률에 미친 방송국 놈들.
솔직히 이들을 욕할 수 있을까? 나야말로 온갖 마케팅을 하며 시청률을 확보했던 전력이 화려한 사람이다. 안 PD는 프로그램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욕을 먹으면서도 꿋꿋이 우리 둘의 데이트(?) 장면을 내보낸 사람이다.
SNS에서도 사진만 덜렁 한 장 올려놓고 끝내지 말고 AS를 해 달라는 청원이 잇따르고 있었다.
“그럼 짧게 하겠습니다. 다들 이제 지겹지 않습니까?”
“저는 두 분만 보면 항상 새롭습니다.”
“참···. 안 PD님도 힘들게 사시네요.”
“힘들게 산다고요? 대표님, 죄송한데요. 요즘 너무 재밌습니다.”
“왜요? 시청률 때문에요?”
“당연하죠.”
안 그래도 ‘왜 혼자 사니?’는 지지부진하던 시청률을 뚫고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하더니 다시 예능 1위에 등극하고 말았다.
나는 희희낙락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유정 씨와 나는 사무실 소파에 같이 앉아서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뭐 내용은 오글거리는 뻔한 이야기였다.
자꾸 손을 잡아 주면 안 되냐는 방송 작가의 말에 짜증을 내려고 했지만, 유정 씨가 내 손을 덥석 잡고 놔주질 않았다.
뭐···. 사실 나도 좋긴 하다.
그리고 그냥 형식적이라고 생각한 2차 오디션을 진행하기로 했다. 지원 인원은 총 7명이었다. J&J 신인 배우 4명과 타 회사 배우 2명, 그리고 소속사가 없는 1명이라고 전해 들었다.
조감독이 오디션을 시작하기 10분 전에 프로필을 가져다줬다.
‘참···. 성의 없네. 이제 드라마본부 일이라 이건가? 거의 그냥 형식적이잖아?’
누가 봐도 우리 인터뷰 따러 온 게 확실해 보였다.
솔직히 흥미가 떨어져 참가자 프로필을 받고도 보지도 않고 그냥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오디션이 시작되었고 나는 우리 회사 배우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우라를 보고 뽑은 터라 연기력은 다들 뛰어났다. 의외로 못하는 사람을 고르기 힘들 정도랄까?
그렇게 6명의 오디션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소속사가 없는 배우가 연습실로 걸어 들어왔다.
“응?”
나는 잘못 본 건가 싶어서 한 번도 보지 않고 있던 프로필을 급하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성명: 김소윤]
[나이: 23세]
“어?”
이름을 확인한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마지막 참가자를 쳐다보았다.
김소윤이라면 예전 공중파 오디션 프로그램 케이팝 지니어스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엄청난 재능으로 주목을 받았던 아이돌 지망생이었다.
내가 왜 그녀를 기억하냐면, 4년 전인가? 우연히 음악방송에서 춤을 추며 라이브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이런 사람이 천재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격렬한 춤을 추면서도 깨끗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그리고 머리를 부술 것 같은 청아한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물론 그녀의 보컬이 내가 굉장히 선호하는 스타일이긴 했다.
김소윤의 재능을 다이어그램으로 표시하자면 외모, 피지컬, 가창력, 댄스, 랩, 인성까지 정말 완벽한 정육각형의 인재였다.
하지만 소속사를 잘못 만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한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운도 지지리 없기도 했다.
‘그 김소윤이 소속사도 없다고? 말도 안 돼!’
나는 급히 아우라 스카우터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내 눈으로 눈부신 섬광이 쏟아졌다.
‘으헉···.’
갑자기 드라마의 마지막 퍼즐이 완성되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