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1일 (1)
첫 방송은 촬영한 대로 편집이 잘 된 것 같았다.
게스트로 스튜디오에 나간 나유정이 환대를 받으며 기존 멤버들과 인사까지 잘 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나오면서 멤버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썩어 갔다.
“어? 이 작가님이 도어록 비밀번호도 아세요?”
“그거야 제 매니저였으니까요.”
“매니저는 몇 년 전에···. 흠···. 어쨌거나 좀 더 지켜보시죠.”
휑한 거실과 커다란 TV 한 대, 그리고 벽 쪽에 붙어 있는 아이돌 그룹의 앨범, 굿즈를 전시해 놓은 진열대가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설마 슬기로운 덕질생활 여주인공 코스프레 하는 거 아니시죠?”
“호호···. 오해하지 마세요. 회사에서 아이돌에 대한 전반적인 기획, 관리를 맡고 있다 보니 이렇게 늘 연구해야 합니다.”
“···그, 그럴 수 있죠. 요즘 아이돌들이 참 경쟁이 치열하지 않습니까? 하하···.”
하지만 내가 유정 씨 턱에 묻은 떡볶이 국물을 닦아 주고 집을 치우며 빨래까지 돌리자 멤버 모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다.
“뭔가 보모 같은 느낌인데···.”
“보모라기보단 가정부가 아닌가 싶은···.”
“그냥 퇴근한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느낌?”
“그래도 뭔가 되게 자연스럽지 않아요?”
“왜요? 이상해요? 다들 이러지 않나?”
“그, 그럴 리가···. 유정 씨 여긴 ‘왜 혼자 사니?’라는 프로그램입니다.”
개그우먼 박나미가 나유정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고 있었다.
“저 진짜 혼자 살아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정도면 혼자 사는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어우···. 진짜 오해예요. 저 때만 매니저 역할을 잠깐 한 거고 평소엔 저러지 않아요. 회사에서 얼마나 저를 갈구는데요.”
그녀는 스튜디오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화제를 돌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의 뚫린 문이 영상으로 나오자 유정 씨의 말이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그 문을 보고 남성 패널들이 경악했다.
웹툰 작가 귀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고 연기자 김수환은 머리를 끄덩이를 잡아 뜯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저건 프라이버시고 뭐고 없잖아요. 이 작가님 불쌍하네. 저 같으면 바로 공구리 쳐서 문을 막았을 겁니다.”
남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세요?”
“허···.”
강하게 말하고 싶지만, 나유정 앞이라 많이 참는 듯한 인상이었다.
“저는 영상을 보면서 궁금한 게, 이 작가님 차가 되게 좋은 모델이거든요. 그런데 왜 짠돌이라고 하세요? 아니 도대체 돈을 얼마나 많이 버셨길래 그러지?”
“잘 모르지만 엄청날걸요.”
“유정 씨가 어떻게 아세요?”
“제가 자산관리사를 소개해 줬거든요.”
“아아···.”
“재테크를 공동으로 안 하시고 따로 하시네요.”
“당연하지! 인마. 공동은 무슨···. 너 지금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김수환이 깜짝 놀랐는지 귀안을 보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준형 씨가 뭐 하나 허투루 사는 법이 없어요. 아! 딱 하나 있네요. 옷만 가끔 사더라고요.”
“나 오늘은 왠지 ‘왜 혼자 사니?’가 아니라 ‘아침 마당’에 나온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음···. ‘아침 마당’은 아니고 ‘왜 따로 사니?’ 같은데···.”
남자 패널들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지금은 진짜 아이돌 출신 우리엘과 JJ 보이즈가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와! 진짜 아이돌이다! 저 진짜 팬이에요. 다 챙겨 봤거든요.”
여성 멤버들이 진아돌 멤버들을 보고 쌍수를 들어 환호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진짜 다 좋더라.”
“도대체 누가 기획한 건가요?”
박나리가 급격히 환해진 얼굴로 나유정을 쳐다보았다.
“비밀이긴 한데, 영상에서는 제가 기획한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준형 씨 아이디어예요. 또 워낙 사람 보는 눈이 좋아서 믿을 만하거든요.”
“우리도 나중에 이 작가님 모셔서 패널들도 오디션으로 좀 뽑을까요?”
“하하하···. 다 떨어지겠는데?”
“안 그래도 마지막에 오디션 같은 거 찍긴 했어요.”
“오디션요?”
“아! 이건 비밀입니다.”
이 장면을 끝으로 첫 방송이 끝이 났다.
다른 멤버들의 영상도 나왔지만, 방송이 끝난 후 SNS나 커뮤니티에서 언급이 되는 건 나유정 이야기밖에 없었다.
-나유정은 생얼인데도 진짜 예쁘게 생겼더라.
-혼자 사는 거 보려고 했더니 우결을 찍고 있네? 원래 이런 방송이었어?
-솔직히 제일 궁금한 내용이긴 하잖아. 나름 재미있던데?
-솔로들은 불편하겠더라. 달달한 분위기에 밥상 엎었을 듯.
-얘들은 아직도 안 사귀는 거냐? 소울메이트 뭐 그런 거라며?
-야구장에서 키스도 했는데 뭘···.
-하는 시늉만 했지.
-그런데 가만 보면 둘이 살다가 방송 때문에 이준형 작가가 쫓겨난 거 같더라. 집을 치우는 게 너무 자연스럽던데?
-집에서의 평소 모습이 조금밖에 안 나왔지만, 내 생각에는 슬기로운 덕질생활에 나오는 나혜리의 실제 모델이 나유정인 것 같아.
-에이···. 그건 너무 나갔지.
-그래서 도대체 사귄다는 거야, 안 사귄다는 거야?
-사귀는 건데 자기들만 모르는 거 같다.
여러 의견과 움짤들이 올라오고 커뮤니티가 떠들썩해졌다.
커플다운 모습을 자주 보여 줘서 안 좋은 반응이 나올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나름 무난하게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방송에서 아우라에 대한 소개 및 회사 소개를 제외하고 계속해서 둘이 데이트 비슷한 걸 하는 게 나오자 그 의혹은 증폭되다 못해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나유정. 이준형 작가와 행복한 데이트?]
‘왜 혼자 사니?’에 출연한 나유정이 그녀의 전 매니저인 이준형 작가와 달달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한강 데이트, 맛집 방문, 좀비 테마파크 나들이, 야구장 체험을 즐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중략>
[시댁에 간 나유정? 이미 이준형 작가의 부모와 벌써 구면?]
톱배우 나유정이 이준형 작가의 집을 방문했다. 이준형 작가의 동생인 이주리(스트리머, 미튜버)와 절친으로 알려졌지만, 부모님과 구면이라는 것은 방송으로 처음 알려진 셈이다.
그녀는 시댁(?)에 가서도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이었으며 집밥을 폭풍 흡입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이준형 작가의 부모님 또한 나유정을 마치 딸처럼 대하고 있어 사실상 며느리로 인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중략>
[나유정,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형편없는 게임 실력 선보여.]
배우 나유정이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스트리머 이주리와 함께 게임 콘텐츠를 진행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 게임을 많이 했다며 자신만만하게 도전했으나 끔찍한 게임 실력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반면에 게스트로 참가한 아우라의 정유리는 발군의 감각으로 스트리머 이주리를 압도하는 게임 실력을 선보였다.
정유리는 비교적 단순한 게임(리듬, 운전, 테트리스, 뿌요뿌요 등)에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중략>
[야구장에 나타난 나유정, 방송은 뒷전이고 사실은 데이트(?)]
배우 나유정이 대전 하나 파이어버드 구장에 이준형 대표와 함께 등장했다. 게스트는 야구 소녀로 알려진 아우라의 리리로···. <중략>
방송이 엄청난 화제를 모으자 대중들은 이쯤 해서 둘이 언제 사귀는 것을 발표할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유정 & 이준형! 자신들만 부정하는 애매한 사이, 대중들 피로감 호소.]
급기야 데일리 연예서치에서는 이런 기사까지 썼다.
[사이 좋은 커플 나유정&이준형! 이제 대중들과 밀당을 그만두길···.]
나를 괴롭히던 데일리 연예서치조차 이제는 질려 버렸는지 얼른 사실을 발표하라며 체념하는 투로 기사를 쓰고 있었다.
* * *
노을이 지는 저녁 한강 주변이었다.
나는 나유정을 차에 태우고 한강이 보이는 한적한 곳에 주차한 상태였다.
해 질 녘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꽤 괜찮은 거 같은데···.
“난리네요.”
“그러게요.”
짧은 대화가 오갔지만 어색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방송에서 보여 준 모습으로 워낙 많은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주변에서도 서로에 대한 관계를 확실히 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것이다.
친한 친구 중에는 정말 ‘등신 같은 놈’ 소리를 해 가며 나를 타박하는 녀석까지 있었다.
물론 유정 씨도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유정 씨.”
그동안 고백을 미룬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아, 아니에요.”
“거기 수납함 좀 열어 보실래요?”
나는 손으로 유정 씨 앞에 있는 수납함을 가리켰다.
“여기요?”
덜컹···.
조수석 수납함이 열리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선물 상자가 나타났다.
“뭐에요?”
“한번 열어 보세요. 시간 나서 하나 샀습니다.”
어우···. 쑥스러워 죽겠다. 이런 고백은 너무 오랜만이라 너무 생소한 감정이었다.
“어머? 시계네요? 너무 예쁘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벤트였지만 나름 비싼 커플 시계를 사서 포장을 해 두었는데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괘, 괜찮아요? 유정 씨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샀는데···.”
“완전 마음에 들어요. 이거 커플 시계구나? 티 내고 싶었나 보죠?”
“······.”
멋없게 선물을 준 것 같았지만 꽤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주간 방송을 촬영하며 거의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고, 마지막에 과감히 부모님까지 등장시키며 그야말로 전국에 다 소문을 내 버린 터라 유정 씨도 마음의 준비를 한 게 큰 것 같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유정 씨를 본 후로는 어떤 다른 여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제가 집에서 화장도 안 하고 대충 입고 있어도요?”
“사실 유정 씨는 화장을 안 하는 게 더 예쁩니다.”
“피···. 거짓말···.”
“정말이에요. 전 유정 씨의 화려한 외모보다는 소울메이트란 말에 더 공감되었습니다.”
“소울메이트라···.”
그녀는 말없이 자신이 한 말을 되뇌고 있었다.
“제가 만약 유정 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아마 테리우스 매니저나 하며 웹소설을 쓰고 있었을 겁니다.”
“설마요. 분명 준형 씨는 뭐라도 됐을 거예요.”
“정말 그랬을까요?”
“당연하죠. 물론 저랑 만나서 훨씬 빠르게 성공한 건 사실이죠. 헤헤···.”
“그래요. 그건 정말 맞는 말이에요.”
“인연이라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무섭기도 하고···. 지금에서 와서 느끼는 거지만 저도 준형 씨를 만난 게 진짜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 너무 띄우지 마세요.”
“띄우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아시잖아요. 예전에 제가 어땠는지···.”
“그때 기억나네요.”
“준형 씨를 만나고 제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유정 씨도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잖아요. 부모님 일도 그렇고···. 아역 시절 일도 그렇고요.”
“만약 준형 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전 어떻게 됐을까요?”
“잘 지냈을 겁니다. 유정 씨는 천성이 밝고 강한 사람이니까요.”
“······.”
“오늘부터 1일입니다.”
“아···. 마지막 멘트 뭐예요. 무슨 노래 제목도 아니고···. 일단 우리 같이 시계 차고 사진 한번 찍어요. 팬들이 성화인데 인증 사진 올려야죠.”
“사, 사실 여기 반지도 있는데···.”
나는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와···. 언제 이런 것까지 준비했어요?”
“사진 찍으려면 반지도 끼고 찍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하얀 손을 잡고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예쁘네요.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그녀는 손가락을 펴고 나에게 자랑하듯 반지를 보여 주었다.
“반지는 안 보이고 유정 씨 손만 보입니다.”
“손 한번 만져 보고 싶어서 그런 거죠?”
유정 씨는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손가락을 벌려 깍지를 꼈다. 그녀의 고운 손은 참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찰칵···.
우리는 맞잡은 손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고급스러운 커플 시계와 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오늘부터 1일···. 오글오글···. 다들 오늘 저녁 넷플릭으로 고고! 잊지 않으셨죠?] #나만 아는 세계멸망 시즌3
유정 씨가 자신의 SNS에 사진을 올리자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댓글을 확인하지 않고 마포 유정 씨 집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나만 아는 세계멸망’ 시즌3 전편이 넷플릭에 공개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유정 씨와 함께 새벽까지 달릴 예정이었다.
‘오늘 공개될 시즌3을 끝까지 본 사람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생체병기 나유정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까?’
나는 갑자기 시청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