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중파 드라마 (3)>
마포의 한 고급 중식당에서 골든벨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정수인과 그의 매니저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기 전, 앞의 커피숍에서 김광석 부장과 만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부터 캐물었다.
“솔직히 누구 생각입니까?”
“······.”
“혹시 국장님??”
“쉬, 쉿!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아니! MBS가 어쩜 그럴 수가 있습니까? 최근에 그런 문제 때문에 본부장 자리 교체된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뭐? 이런 상황이 나아진 거라고?
MBS는 장기 집권을 하며 수많은 폐단을 낳았던 드라마본부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인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낫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아직도 이런 판국에···.”
정말 이해가 가질 않는지라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고 말았다.
“진정하시고요. 말 그대로죠. 예전에는 진짜 저예산, 고효율 드라마만 했었죠.”
“부장님. 그런 드라마가 쉬우면 아무나 제작사 하죠.”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망했지요.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로맨스 아니면 막장이니까요.”
“아···. 그래서 MBS가 허구한 날 막장만···.”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안 하려면 나가라고 했거든요. 진짜 그때 실력 있는 PD들 많이 이직했죠.”
“도끼로 제 발 찍는 건데 왜 그랬대요?”
“그게 제일 성과가 빨리 나오니까요. 저렴하고 높은 시청률···.”
“······.”
“아무튼, 그래서 조직도 무너지고 갈수록 막장이 됐는데 그나마 그걸 수습한 사람이 지금 본부장님입니다.”
“지금 제가 겪는 일을 보면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나는 창밖을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 다릅니다. 그래도 내부에서는 평가가 좋아요. 일단 막장만 찍는 분위기는 사라졌어요. 그것만 해도 다행이죠.”
“그런데 배우를 꽂아 넣으려는 건 뭡니까?”
“이 정도는 애교죠. 전 국장은 다른 방송국에서는 받아 주지도 않는 악질 제작사들에 일감을 몰아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죠.”
“허···. 점점···. 그래서 예전보단 나아졌으니 배우를 좀 바꾸고 하는 건 일도 아니다?”
“아닙니다. 제가 어제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맘에 안 드시면 적절한 방법으로 거절하시면 됩니다. 이런 면이 현재 국장님이 괜찮은 평가를 받는 이유거든요. 명분! 아니 안 되는 사유를 납득시키면 크게 뭐라고 안 합니다.”
‘후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겠습니다. 부장님. 제가 걱정 안 하시도록 국장님을 이해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솔직히 윤하영 씨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
볼록 나온 배를 쓱쓱 문지르며 나를 보고 웃는 김 부장이었다. 참 오프 더 레코드를 좋아하는 양반이다.
“골든벨 엔터테인먼트는 뭐죠?”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 업체가 국장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국장님이 PD 시절 서로 도와주던 관계였던 곳이었어요. 골든벨이 지금이야 살짝 이상해졌지만, 예전에는 꽤 괜찮은 곳이었거든요.”
글쎄? 내가 알기론 살짝이 아니다. 골든벨도 제작사였고 히트작도 만들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투자를 받았다며 상장을 하려다가 경영권 분쟁에 시달리고 크게 내홍을 겪었다. 알고 보니 국내의 먹튀 사기꾼들에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저도 대충 알고 있습니다.”
“네. 몇 년 전에 그런 게 유행이었죠. 이름은 들어서 아는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앞세워 상장하고 한탕 해 먹고 빠지는 기업사냥꾼들요. 엔터 업체들이 사이즈가 고만고만하고 인지도는 좋아서 딱이었거든요.”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보고 적당히 알아듣게 설명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아! 그런데 정수인 씨는···.”
내가 정수인을 언급하자마자 김 부장이 낮은 목소리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골든벨 주요 투자자 중 한 명의 자제분으로 집안에 돈이 어마어마한 대부업···.”
“그만, 됐습니다. 더는 안 들어도 되겠네요.”
나는 김 부장의 말을 자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이야기를 마치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예약된 방에는 골든벨의 최영기 실장과 정수인이 미리 도착한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어서 오세요. 대표님. 또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정수인과 매니저가 반갑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일찍 오셨네요.”
“우선 식사부터 하실까요?”
우리는 일단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정수인은 확실히 내 팬인 것 같았다. 내가 쓴 작품을 줄줄 꿰고 있달까? 그녀의 계속된 칭찬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지려다가도 그녀의 미약한 아우라를 떠올려 보고 고개를 휘저었다.
‘안 되지. 로맨스는 배우 중심으로 전개되는 드라마야. 이런 수준으로는 죽도 밥도 안돼.’
그들은 음식을 먹으며 계속 나에게 환심을 사려고 했으나 내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슬슬 분위기를 눈치채는 것 같았다.
“저희 수인이가 작가님 광팬이라서요. 원래 하려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만사 다 제쳐 두고···.”
“잠시만요.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직접 방송국으로 작품을 들고 왔다 뿐이지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소속 작가의 작품이에요.”
“네?”
최영기 실장은 놀란 표정이었고 정수인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대충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대본을 보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입봉 못 한 초보 작가의 글입니다. 물론 옆에서 최하나 작가님이 도와주시긴 했지만요.”
이 드라마 대본이 진즉 완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최하나 작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메인 플롯이 시후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건 몰랐네요. 하지만 어찌 됐든 제작은 J&J에서 하시는 거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메인 연출은 MBS의 뛰어나신 PD분께서 하실 예정이고요.”
아직까지 공중파 드라마는 외주 제작을 하더라도 메인 PD의 경우 스타 PD가 아닌 이상 방송국 PD가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J&J 스튜디오의 스타 PD는 몇 명 안 되는데, 다들 다른 작품을 제작하고 있기 때문에 내 스카우터로 능력이 뛰어난 MBS PD를 체크해 볼 예정이었다.
‘아니면 스카우트도 할 수 있지.’
인원을 많이 충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늘어나다 보니 제작팀 인원은 항상 부족했다.
“작가님. 그래도 저는 그 작품에 출연하고 싶습니다.”
정수인이 어색한 침묵을 못 참겠는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일단···. 어떤 작품인지 한번 보시고 말씀하시죠. 물론 대충 이야기는 들으셨겠지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김 부장이 가방에서 시놉시스를 꺼내 정수인과 매니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시놉시스를 천천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정수인은 시놉시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최영기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용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나와 나유정의 스토리를 오마주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껏 우리 회사에서 만든 작품이 실패한 게 하나도 없었고 그 모든 작품에서 스타가 탄생했다. 그러니 욕심이 나겠지.
“작가님. 너무 좋은데요? 더 출연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녀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출연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었다.
“사실 수인 씨가 뭘 떠올리고 계실지 대충 상상이 갑니다. 누가 보더라도 저와 유정 씨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가 아닌 허구의 스토리죠. 이 점은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 물론이죠.”
“문제는···. 시청자들도 그 누군가를 떠올릴 텐데 수인 씨와 그분은 괴리감이 상당합니다.”
“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유정은 좋은 피지컬에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원톱 배우였고, 정수인은 보통 키에 한국적인 수수함? 아니 단아함이 느껴지는 귀여운 스타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작품이라는 게 허구의 이야기를 쓴 거지 않습니까? 우리 수인이가 연기를 잘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옆에서 거드는 최영기 실장을 째려보았다.
야 이 사람아. 연기력이 별로니까 하는 말이지.
지이잉···.
갑자기 내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실례한다고 말하고 고개를 돌려 통화를 했다.
“아···. 네. 네네. 어디신데요? 식사는 하셨어요? 왜요? 전 지금 먹고 있습니다. 네. 음식 맛있어요. 여기가 어디냐고요? 여기 회사 근처 식당인데요. 같이요? 지금 먹고 있긴 한데···. 잠시만요.”
나는 휴대전화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일행이 좀 와도 되겠습니까?”
“누구신데요?”
“유정 씨가 점심을 먹는다는데 여기가 맛있다고 하니 같이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네요. 지금 회사에 있거든요.”
방송국과 우리 사무실이 가깝고 해서 일부로 골든벨 측에서 회사 근처로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 물론 가능하죠. 전 환영입니다.”
정수인은 나유정이 온다는 말에 차를 들이켜며 당황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정 씨에게 장소를 알려줬다.
“죄송합니다. 유정 씨가 출근하면 저랑 같이 밥을 먹는지라···.”
“아. 네.”
5분도 안 돼서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하지만 방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나유정 혼자가 아니었다.
“어? 유정 씨. 하영이도 데려온다는 소린 없었잖아요. 이분들한테 말씀을 못 드렸는데···.”
나는 꽤 매끄러운 연기를 펼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녕하세요. 나유정입니다. 혹시 저랑 식사하는 거 불편하신가요?”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로 정수인과 최영기 실장, 그리고 김광석 부장을 각각 훑어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배우 정수인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정수인이 당황한 표정을 애써 지우고 선배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아! 수인 씨, 안녕하세요. 저번 드라마 재미있게 잘 봤어요.”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정수인은 나유정을 보고 살짝 기가 죽은 느낌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오늘 유정 씨가 무슨 시상식에 나가는 것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운동으로 철저히 관리된 피지컬, 더 이상 광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는 물광 피부, 숍에 들러서 머리를 했는지 풍성한 머릿결,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몸매가 살짝 드러나는 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으니 일반인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정수인으로써는 주눅이 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인사하세요. 제 후배인 윤하영입니다. 다들 아시죠?”
“안녕하세요. 배우 윤하영입니다.”
크···. 이건 뭐 좌청룡 우백호도 아니고···. 나유정이 왕비라면 윤하영은 왕녀 같은 느낌이었다. 절대 유정 씨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은 아니다.
윤하영도 타고난 피지컬과 세심하고 꾸준한 관리를 통해 나유정과 유사한 화려한 이미지를 뽐냈다.
그녀 역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압도적인 포스를 발산하고 있었다.
비교적 연예인을 많이 보는 최 실장이나 김 부장도 기가 막히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정수인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나마 정수인이 정신을 차린 듯 일행을 자리로 안내했다.
“말씀하시는데 괜히 온 게 아닌가 싶네요.”
나유정이 자리에 떡하니 편하게 앉아서 태연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 선배님을 꼭 뵙고 싶었어요. 오늘 미팅이야 J&J 임원이시니 크게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정수인은 평소 유정 씨에게 호감이 있었는지 싹싹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하영에게는 곁눈질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서로 눈인사만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식사를 주문하고 나유정에게 왜 이 자리를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수인 씨가 저희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고 하신 거죠?”
“네. 선배님.”
그러자 나유정이 깍지를 끼고 팔을 천천히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확실히 꾸미고 나온 그녀는 톱배우다운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흐음···.”
그녀는 정수인의 얼굴과 전신을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을까? 정수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여성들의 워너비가 된 나유정의 포스가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왜, 왜 그러시죠?”
“저도 그 드라마 시놉시스와 대본을 봤는데 주인공 캐릭터하고는 이미지가 좀 다른데···.”
“잘할 수 있습니다.”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의지를 꺾지 않고 있는 정수인이었다.
“다들 말은 그렇게 하죠. 그런데 제가 알기론 준형 씨가 여기 있는 하영 씨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나유정은 그 말을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찡긋···.
그녀는 상대방이 안 보이는 쪽 눈으로 윙크를 했다.
큭큭···.
“네. 일단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자체 제작이다 보니···.”
“하지만 아직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동안 조용하던 김광석 부장이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정수인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애매한 분위기에 나는 젓가락을 들어 음식만 휘젓고 있었다.
짝!
갑자기 나유정이 손뼉을 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갑자기 저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들어 보실래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내가 짠 시나리오대로 찰떡같은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