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249화 (249/263)

< 공중파 드라마 (2)>

“이 대표님. 제가 그럼 국장님과 협상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하하하···.”

나유정을 ‘왜 혼자 사니?’에 출연시켜 준다는 내 말을 듣고 김광석 부장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는 드라마 계약과 나유정의 예능 출연 쪽이 중소 기획사 아이돌의 앞길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주 음악 방송 출연이 가능하도록 힘 좀 써 주십시오.”

나는 일부러 ‘이번 주’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김 부장은 살짝 시선을 피하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말하는 거지만 저로서는 사실 나유정 씨 카드가 없었더라도 말은 한번 해 봤을 겁니다.”

김 부장은 남아 있던 음료수를 원샷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안전하게 히든카드를 한 장 품에 안고 있으면 좋은 거죠. 부장님도 맨입으로 부탁하시려면 그게 다 나중에 부채가 되는 거 아닙니까?”

“캬···. 정말 우리 이 대표님. 센스 있으셔. 이러니 젊으신 나이에 기획사를 떡하니 차리셨겠죠.”

그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을 가져와서 그런지 나를 과도하게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사회생활 몇 년 차인데 이런 게 다 가식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일단 음악 방송은 한군데만 뚫리면 카르텔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거야.’

생각해 보니 CA 미디어가 살짝 걸린다. 이기훈 전무가 분명히 미리 상의하자고 했는데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여차하면 뮤직넷 핑계 대지 뭐.’

내가 이제 어디 한쪽에 목을 매는 그런 처지는 아니니까.

“대표님. 그렇다면 출연 기간은 얼마 정도로 생각하시죠?”

“유정 씨가 곧 차기 드라마 촬영을 시작해야 해서요. 딱 2주밖에 없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열심히 찍으면 4주~6주 분량도 뽑는데요 뭘···.”

“하긴 그렇겠죠.”

“그런데 나유정 씨는 어떤 드라마를 하시는 겁니까? 기사에는 전혀 나온 게 없던데요.”

“아···. 있습니다. 조만간 아시게 될 겁니다. MBS랑 경쟁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하···. 알겠습니다.”

김 부장은 대충 공중파나 케이블은 아닌 것 같다고 이해하는 듯했다. 물론 정확히는 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그런데 말이죠. 대표님.”

“네. 말씀하시죠.”

“방송 출연하실 때요. 죄송하지만 대표님도 좀 나와 주시면 안 될까요?”

계속된 요구에 자신도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는 김 부장이었다.

“뭐 그러시죠. 까짓거···.”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요즘 근래에 했던 미팅 중에서 이렇게 기분 좋게 진행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유정 씨는 내가 안 나오면 별다른 장면을 찍을 게 없는 사람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이미 유정 씨와 다 이야기를 끝낸 사항이었다.

며칠 전 일이었다.

나유정은 화가 많이 난 듯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 애들 음원이 1, 2위를 하고 있는데 음악 방송을 못 나가는 게 말이 되나요?”

“아무래도 기존 미디어에서 이런 케이스에 대해 살짝 제동을 거는 속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 아이돌 메이커 나올 때도 이랬었거든요. 기득권을 지키는 방편···. 아니 몸부림이죠.”

“막상 당하는 처지에서는 몸부림이라고 보기 힘든데요? 그냥 이건 갑질이잖아요?”

“뭐···. 방법이 딱히 없는 건 아닙니다만···.”

“네? 뭐예요? 해결책이 있는 거예요?”

유정 씨가 얼른 이야기하라며 내 옆에 붙어서 자꾸 재촉해 댔다.

“저, 저리 가요. 왜 이렇게 가까이 붙어요.”

“뭐래? 남의 몸을 막 떡 주무르듯 만진 사람이 할 소리예요? 얼른 이야기해 보시라니까요?”

“허! 큰일 날 소리! 잠을 안 자서 쓰러진 사람을 침대에 눕혀 줬다고 무슨 치한 취급을 하네.”

“막 물렁물렁하다고 했잖아요.”

“그땐 진짜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고···.”

나는 시선 처리가 곤란해서 유정 씨를 힐끔 보다가 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머! 관찰하고 있었어요?”

나유정은 팔을 엑스자로 교차시키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아···. 알았으니까 장난은 이제 그만하시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어떻게요?”

나는 유정 씨에게 MBS와 드라마 협상을 할 때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미끼로 쓰자는 말을 했다.

“음···. 부득이하게 제가 나설 수밖에 없겠군요. 이렇게 힘들게 노력하는데 애들은 알까요?”

“알아서 뭐 하게요. 안 그래도 바쁜 애들인데···.”

“됐어요. 제가 희생해서 출연해야 할 프로그램이 뭔가요?”

“음···. 설문 조사에서 유정 씨가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연예인 1위로 뽑혔습니다.”

“아아···. ‘왜 혼자 사니?’군요?”

아무래도 유정 씨도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

“요즘 거기 시청률이 시원치 않다던데 제가 나가서 시청률 좀 살려 줘야겠네요.”

“보여 줄 콘텐츠는 있어요?”

“그, 그게 문제긴 한데···.”

그 프로그램은 대부분 집에 있거나 지인들과 만나는 장면을 찍는 경우가 많은데 알다시피 그녀는 진성 건어물녀다. 집에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노 메이크업으로 드라마 보기, 아이돌 덕질이 취미이신 분이다.

그나마 요즘엔 회사 출근을 가끔 하고 있어서 외부 활동이 늘어난 편이었다.

“그 프로그램 안 봤어요? 그냥 집에서 유정 씨 하는 거 그대로 보여 줘도 돼요.”

“에? 그, 그건 곤란하죠. 이미지가 있는데요.”

“거기 나오는 유명 연예인들도 다 그런 모습이었어요. 일부러 꾸미는 게 더 이상하다고요. 그리고 요즘은 정식으로 남자 아이돌을 육성하고 있으니까 집에 굿즈가 있다 한들 말만 잘해서 포장 좀 하면 되는 거고···. 아! 물론 그 커다란 쿠션은 꼭 치우십시오. 콜라주하고···.”

“흐음···. 맞다! 진아돌에서도 첫 장면이 제가 아이돌을 열심히 연구하는 거였죠. 그렇다면 이미지 세탁이 가능하겠군요.”

“이미지 세탁?”

“말이 그렇다고요. 무슨 말을 못 해.”

“아니면 요즘 친해진 사람도 있잖아요. 불러서 놀면 되죠.”

그녀는 멍하니 화분을 보며 누가 있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막 휘젓는 게 아닌가?

“왜 그래요? 없어요? 블랙소울 있잖아요.”

“지, 지금 유럽으로 콘서트 하러 나갔어요.”

“쩝···. 가는 날이 장날이네. 그럼 네미시스나 아우라는 어때요?”

“네미시스나 아우라는 따로 볼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엄청 친한 정도는 아니라···. 무, 물론 친하긴 한데 나이 차이도 있고···. 아우라는 좀 저를 어려워하는 것도 있고요.”

“허···. 이거야 원···. 그럼 이수현 씨는 어때요?”

“수현이 언니랑 개인적으로 안 만나는데요?”

“그럼 최하나 작가는요?”

“······.”

유구무언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기 시작했다.

“어휴! 어휴! 이 등신, 인생 헛살았어!”

“아니! 그게 맞을 일입니까? 그냥 단순히 친구가 없는 거잖아요.”

아차···. 말을 잘못했나?

그녀가 눈을 아래로 깔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봐요. 정 나올 사람이 없으면 내가 그때 매니저 역할이라도 해 줄게요. 방송 핑계 대면서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그러죠. 뭐.”

내가 마지못한 척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보며 씩 웃고 있었다.

“뭐야. 이거였어요? 이 사람 속셈이 있었네. 어우. 이 능구렁이!”

“어허···. 능구렁이라뇨. 음악 방송이고 예능이고 다 때려치울까요?”

턱···.

유정 씨의 전매특허인 어깨 짚기가 나왔다.

“에이. 우리 유능하신 대표님이 왜 그러실까? 판은 엎지 맙시다?”

나는 그녀의 손을 ‘탁’ 쳐내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 어깨는 뭐 부탁할 때마다 쓰라고 있는 거 아닙니다.”

“알아요. 알아. 아무튼, 그렇게 해요. 생각해 보니까 시청자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그림이긴 하겠네.”

유정 씨도 내가 나오는 게 제일 낫겠다 싶은지 얼굴에서 근심 걱정이 싹 사라진 것 같았다.

“아! 주리랑 같이 보면 되겠네요. 아니다. 그냥 준형 씨 집에 놀러 갈까요?”

“예?”

나는 갑자기 급발진하는 유정 씨를 보고 뭐라고 한소리를 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이럴 때인가?’

솔직히 고백할 타이밍을 놓쳐서 상당히 애매했는데 이번 기회에 마음껏 해 보고 싶은 걸 하고 분위기를 잡는 게 어떤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우리가 사귄다고 해도 대부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테니까.’

거기에다 우리 회사 연예인들도 꼽사리를 껴서 홍보하면 좋을 듯싶었다.

‘하···. 이놈의 일 생각···. 그저 어떻게든 잔머리만 굴리고 있다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떨쳐 냈다.

“유정 씨. 그럼 대강 할 것들을 짜 봅시다.”

“물론 회사 홍보도 들어갈 거죠?”

흐미···. 이제 척하면 척이네.

그녀가 손가락 깍지를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끄덕끄덕···.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케이! 그럼 지금부터 일정을 짜 봅시다!”

아무튼, 이렇게 된 일이다. 그냥 뜬금없이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그렇게 김광석 부장과 협상을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커피를 한 잔 내린 후 자리에 앉아 다이어리에 방송에서 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 나유정 집 공개, 실제 이미지 연출 (긍정적으로)

- 덕질(X), 아이돌 육성(O), 이미지 세탁?

2) 회사 업무 - 우리엘, JJ 보이즈 깨알 홍보

3) 저녁에 손님 초대 - 장예원을 초대해서 요리 시켜 먹기

4) 컴백 준비 중인 아우라 연습실 방문

5) 좋아하는 한정식집에서 맛있는 거 먹기

6) 한강 데이트? 놀이 공원?

7)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 소개, 시후, 최하나 작가 만남

8) J&J 스토리 소개 - 특히 전 엑스크루 센터 김형준 홍보

- 차기작 ‘흑백 로맨스’ 홍보

9) 좀비 테마파크 데이트 및 나세멸 시즌3 홍보

10) 나유정 야구 체험 with 야구 소녀 리리

11) 여동생 주리하고 게임 방송?

11) 우리 집 놀러 가기?(X) 등등···.

결론···. 모든 것을 나와 같이?

막상 개인적인 것과 회사 홍보를 같이 하려니 할 게 끝도 없이 나왔다. 나는 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와! 이거 2주일로 모자란 거 아냐?’

그래도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몰아서 빨리 찍는 수밖에···.

스케줄을 쭉 정리해서 유정 씨에게 보여 줬더니 의외로 재미있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거 다 할 수 있는 거 맞아요?”

“하루하루 빡세게 찍으면 될 것 같은데요?”

“제가 예능을 해 봐서 알잖아요. 이 정도면 제작진들이 준비를 진짜 많이 해야 해요. 미리 회의도 하고 해서 스케줄을 조정해야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예능 고수님.”

“역시 이 매니저 실력 안 죽었네요. 글만 쓰는 줄 알았는데 아주 디테일하게 잘했어요.”

“쳇···. 무슨 어린아이 달랩니까?”

“헤헤···. 되게 뿌듯해하는 거 같은데?”

“이제 장난 그만하고···. 일단 김 부장이 오늘까지 연락해 준다고 했으니 그거 듣고 진행합시다.”

“알았어요.”

지이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김광석 부장 전화네요. 여보세요?”

[이 대표님. 접니다. 별일 없으시죠?]

“네. 부장님. 어떻게 협상은 잘 됐습니까?”

[네. 대표님. 방송 출연해 주신다고 해서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의외로 음방 PD들이 고집이 세서요.]

“네. 뭐 그러시겠죠.”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문제는 아니고요. 그냥 사소한 일이랄까?]

“뭡니까?”

[여배우 말인데요. 혹시 다른 배우를 써도 될는지 해서요.]

“네? 여배우보다는 남자 배우가 좀 걸리신다면서요?”

[아, 아닙니다. 남자 배우는 괜찮은 거 같습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차기 스타라고 생각하면 되니까요.]

“그럼 생각하시는 배우가 누구인데요?”

[정수인이라고···.]

“아!!”

갑자기 뭔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건가···. 그때 엘리베이터···. 혹시 내 뒤를 캔 거야?’

갑자기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대표님도 아시죠? 정수인 씨라면 윤하영 씨 못지않게 인지도도 있고···. 무, 물론 J&J 배우는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정수인 씨는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너무 다릅니다.”

[네? 그러지 마시고 한번 만나라도 보시는 게···. 거기서 거절을 하셔도 됩니다. 물론 이건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만···.]

응? 거절? 아무래도 김광석 부장도 누군가에게 압력을 받고 있는 걸까? 짜증 나는데 만나서 망신이라도 한번 줄까?

“부장님. 들어 보니 난처하신 거 같은데 한번 만나 볼까요?”

[아이고···.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럼 제가 약속 시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김광석 부장과 통화를 종료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빌딩 밖 대로에는 차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는 김 부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냥 직장인일 뿐···. 언제 잘릴지 걱정하는 건 다 똑같았다. 문제는 내 밥그릇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 보자고···.”

나는 창밖을 보며 어떻게 엿을 먹일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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