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틴 드라마 캐스팅 (1)>
“···구매하게 할 자신이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거죠. 팬들에게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공하면 됩니다. 참 심플하죠.”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김진원 대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마치 그걸 누가 몰라서 못 하냐는 표정이었다.
“정말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자신이 없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야죠. 대표님이 저에게 바라는 모습이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최근 채용한 젊은 작가 라인업이 빵빵했기 때문이다. 재학 중인 대학생부터 갓 졸업한 작가들까지···. 그동안 놀고 있던 게 아니라 인재 충원에도 적극적이어서 그간 모인 작가가 거의 이십여 명에 육박했다.
‘드라마 작가의 경우 전부 내 아우라 스카우터에 의해 걸러진 인재들이다.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젊은 감각의 신선한 작품들을 마구마구 쏟아낼 거야.’
더군다나 얼마 전 사내 초보 작가들을 위한 강의에서 본인들의 망상 혹은 욕망을 마음껏 터트리라는 다소 과감한 주문까지 해 버렸다. 이 음습한 작가들의 깊은 곳에서 어떤 작품이 나올지 심히 기대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저희가 공급하는 콘텐츠는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만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마음이 좀 놓입니다.”
“대표님. 음···. 죄송한데 화장실이···.”
차를 마시고 하도 떠들었더니 화장실을 가야 할 것 같았다.
“아···. 나가셔서 들어오던 곳으로 걸어가시면 왼편에 보일 겁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나 이사님은 김 대표님께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물어보고 계시죠.”
나는 황급히 문을 열고 화장실을 찾았다.
“여기인가?”
안쪽으로 들어가 볼일을 본 후 손을 씻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즐거운 일을 찾은 거 같네.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이 됐어.’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이 이렇게 설렐 줄이야.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지 뭐. 인생 뭐 있나? 내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핸드타월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 화장실을 나섰다.
[아! 그렇게 못 하겠다고요!]
화장실을 빠져나오다가 맞은편 복도에 있는 회의실에서 누군가 격렬하게 회의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건너편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걸 보니 뭔가 협의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정훈아. 다시 한번 생각해 봐. 7년 동안 우리가 이뤄 놓은 게 얼마니! 진짜 아깝지 않아?]
[실장님. 이제 지긋지긋해요. 하기도 싫은 음악 억지로 하게 하고, 쉬지도 못하게 행사 돌리고! 이게 사는 겁니까?]
[아니···. 리더야. 네가 정훈이 좀 말려 봐. 우리 재계약해서 더 잘해 보자. 내가 위에 이야기해서 너희 요구 사항을 다 들어줄게.]
[아니요. 저도 정훈이랑 생각이 같아요. 전 전속 기간 끝나면 솔로로 나갈 겁니다. 물론 다른 회사에서요.]
[야! 너희 정말 이러기야? 그간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저희도 실장님께 실망했습니다. 왜 우리랑 대표님에게 이야기하는 게 달라요? 저희도 듣는 귀가 있다구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에이! 이제 됐어요. 정말 끝입니다. 2주간 뭐 시키실 일 있으면 다 시키세요. 그 이후로는 정말 다시 보지 않기로 하죠.]
우당탕···.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나더니 덩치가 큰 호남형 청년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오면서 씩씩거렸다.
“당신 뭔데?”
그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화장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응? 이 자식은···.’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쳇! 진짜 짜증 나서 원···.”
녀석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더니 옆에 있는 계단으로 휭하니 내려갔다. 첫 번째 멤버가 회의실을 박차고 나오니 나머지 멤버들도 연달아서 우르르 빠져나왔다.
얼굴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이들은 바로 카오스X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7년 차 남자 아이돌 엑스크루(X-Crew)였다.
‘재계약 기간인가? 뭔가 회사 뜻대로 잘 안 되나 본데···.’
마지막에 나온 리더 재현이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관심을 끄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가 너무 격식을 차리고 왔나. 못 알아보네.’
고급 양복을 빼입고 왔더니 살짝 늙어 보였나? 아무도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얘들아! 자, 잠시만···. 내 이야기 좀 들어 봐!”
회의실에서 30대 중반의 사내가 급하게 뛰쳐나오며 아래로 내려간 멤버들을 쫓았다.
“쯧쯧···. 개판이네. 왜 김진원 대표가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거는지 알겠어. 딱 보니 재계약 안 되겠네.”
나는 혀를 차며 문이 활짝 열린 회의실로 다가갔다.
“응?”
회의실 창가 앞 테이블에 한 명의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며 그의 투명한 피부를 비추고 있었다. 살짝 바람이 불어와 하얀 블라인드가 펄럭이는데 왠지 모르게 주변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 장소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청년은 다름 아닌 엑스크루의 센터 김형준이였다.
‘역시 내 지식은 아직 녹슬지 않았군. 3년이 지났는데도 남자 아이돌을 기억하는 걸 보면 말이지.’
나는 회의실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김형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쏟아지는 햇살을 한 번 보고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분위기 뭐야. 얘가 원래 이렇게 잘생겼었나?’
솔직히 노래는 많이 들었지만, 뮤직비디오나 생방송 무대는 그냥 별생각 없이 봐서 그런지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엑스크루에 눈에 띄는 미남 한 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예전 같은 조각 미남은 아니지만 젊은 여성층이 선호하는 꽃미남 계열에 은근히 끌리는 얼굴이 확실했다.
‘아···. 얘가 걔였나?’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한 번 만지더니 팔을 뻗어 바닥에 있는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지퍼를 열고 그 안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다들 나가 버린 회의실에서 뭘 하려는 걸까?
그는 태블릿에 붙어 있던 펜슬을 사용해서 뭔가를 쓱쓱 그리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는 김형준과 천외딸을 그리고 있는 최영규 작가가 오버랩됐다.
‘뭔데? 그림 그리는 건가? 같은 그림을 그리는데 영규하고 너무 비교되네.’
사람을 외모로 비교하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만큼 분위기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영규 이 자식! 넘볼 걸 넘봐야지! 감히 우리 담희를?’
“누구···.”
드디어 그는 회의실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태블릿을 들더니 커버를 황급히 닫았다. 그 바람에 나는 화면에 그린 그림을 언뜻 볼 수 있었다.
‘응? 뭐야? 자기 얼굴 그리는 거였어?’
나는 그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었다.
“아···. 그냥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어? 이준형 작가님?”
이런 이런···. 그냥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그가 내 얼굴을 알아봤다.
“음···. 저를 아십니까?”
“물론이죠! 저 작가님 팬입니다. 나이스 웹툰에서 천외딸을 매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잘생긴 청년이 내 작품을 좋아한다고 하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 그래요? 그거 볼 만하던가요?”
“물론이죠. 와! 그런데 저희 회사에는 어떤 일로 오셨어요?”
“아···. 그냥 대표님 좀 볼 일이 있어서요. 업무 협의차···.”
갑자기 이 청년의 능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느낌이 좋은 사람이 왜 이렇게 인지도가 바닥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스카우터로 본 김형준의 능력치는 놀라웠다. 옅은 황록색(?)의 아우라가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알파고를 가동시켰다. 이런 색이라면 연기를 뜻하는 노란색과 창의력을 뜻하는 보라색이 섞인 능력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연기력이 강하다는 거겠지. 그런데 뭔가 창의력도 강한 모양인데···.’
“괜찮으세요. 갑자기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아···. 괜찮습니다.”
“혹시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참···. 가 봐야겠네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하고 상당히 좋은 느낌을 받았다. 무표정할 때는 차가워 보이지만 웃으면 천상 러블리한 페이스가 되는 희한한 녀석이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작가님. 혹시 명함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명함이요? 음···. 어디 보자. 아···. 여기요.”
“지금 바쁘신 거 같으니까 나중에 제가 연락드려도 될까요?”
“아···. 뭐 언제든지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는 엄청 기뻐하며 내 명함을 손에 쥐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김 대표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는 김진원 대표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고, 유정 씨는 카오스X 아이돌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그들이 수상한 트로피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지금 직원분이 회사 구경시켜 준다고 아래에서 대기 중이에요.”
유정 씨가 내 곁으로 이동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오해하지 마세요. 큰 거 아닙니다. 그냥 누구를 만나서요.”
“거짓말···.”
“그거 거짓말해서 뭐 합니까. 전 유정 씨의 더 심한 것도 봤···. 으윽···.”
유정 씨의 매운 손이 내 옆구리 살을 꼬집고 있었다.
“좀 조용히 해요. 왜 늦었냐니까 딴소리하기는···.”
“지, 진짜예요. 요 화장실 건너편 회의실에서 엑스크루를 봤습니다.”
“네? 진짜요? 아···. 아깝다. 내가 봤어야 했는데···. 요즘 활동을 안 해서 보기 힘들어요.”
“혹시 걔들 잘 알아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요? 아무래도 재계약 쫑날 듯···.”
“지, 진짜요? 그럼 안 되는데···.”
“크흠···. 죄송합니다. 이 대표님, 나 이사님. 급한 전화를 받느라 제가 두 분을 기다리게 했네요. 아래에 직원이 대기 중이니 저희 회사 구경 한번 하고 가시죠?”
그렇게 대강 큰 틀에서 협의를 마치고 카오스X의 사옥을 둘러보았다.
사실 뭘 본 건지 아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김형준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 * *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강남에서 차가 막히는지라 차 안에서 유정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가 많이 막히네요. 아! 아까 김 대표 앞에서는 왜 그렇게 큰소리를 빵빵 쳤어요?”
“제가 무슨 뻥 치는 사람입니까? 팩틉니다. 팩트.”
“전 그 뒤편을 구매하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와!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니 오글거리다니요!”
“그런데 신작은 또 언제 썼대? 하여간 쓰는 건 되게 빠르다니깐···.”
“공동 집필이에요. 그때 모교에 갔다가 채용한 김문희 작가라고···. 자질이 보여서 최하나 작가님 보조 작가로 붙여 놨는데 한 달도 못 참고 뛰쳐 나와서···.”
“아···. 저도 최 작가님한테 들었어요. 이상한 보조 작가가 들어와서 스트레스 받았다고···.”
“흐흐···. 제가 보기엔 둘 다 이상합니다.”
“하긴 최 작가님도 기가 세고 특이하시긴 하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었다. 김문희 작가는 24살로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최하나 작가의 고리타분한 감성을 도저히 못 참겠다며 스스로 짐을 싸서 J&J 스토리 사무실로 이사했다. 나는 그때 상황이 생생히 기억났다.
[대표님. 저는 대표님 밑에서 배우겠습니다. 전 대표님 작품을 좋아해서 J&J에 들어온 거지 옛날 미니 시리즈 쓰는 분 수발들러 온 거 아닙니다.]
그녀의 당당한 주장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쓰는 작품을 손봐 주며 결국 공동 집필까지 하게 된 것이다.
“김문희 작가도 보통이 아니에요. 둘 다 천재 과죠. 재능이 비범합니다.”
“그런데 그 흑백 로맨스라는 작품이요. 꽤 흥미가 가던데 그 소재는 누구 아이디어에요?”
“크흠···. 누구겠습니까? 소재와 플롯은 당연히···.”
“네네···. 알겠고요.”
갑자기 유정 씨가 내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거참···.”
“헤헤···. 바로 잘라 버리기!”
차는 신호등에 걸렸고 나는 해맑게 웃고 있는 유정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지만, 유정 씨의 얼굴에 엑스크루의 센터 김형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평소에는 차가워 보이지만 한없이 따뜻한 사람···.
“아···. 아까 엑스크루 재계약 이야기했잖아요. 정말 재계약 못 하고 해체할 것 같아요.”
“아···. 안 되는데···. 아까운 그룹인데···.”
엑스크루는 아무래도 유정 씨에게 상위 픽인 듯했다.
“형준이라고 센터 있잖아요. 걔는 연기시키면 딱일 것 같던데···.”
“에? 혹시 형준이를 그 바둑 드라마의 남주로??”
“에헤이···.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조건은 충분한 것 같다는 거죠. 외모도 좋고···.”
“그런데 아마 연기는 안 할걸요?”
응? 그게 무슨 소리지? 아우라가 상당하던데 연기를 안 한다고?
“···왜 연기를 안 한다는 거죠?”
“글쎄요.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요. 센터라 회사에서도 연기 수업을 제일 많이 시켰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정작 연기는 안 하겠다고 버티면서 취미로 그림이나 그리고 있다고···.”
‘아···. 그래서 이런 인재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거군.’
역시 유정 씨는 아이돌 마니아였다. 잡덕이라고 하면 혼나려나? 아무튼, 시시콜콜한 내용도 물어보면 척척 나왔다.
‘아무래도 연락 오면 한번 만나 보는 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