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재능 (1)
“이 세련된 곡을 지령이가 만들었다고? 이게 말이 돼?”
케이는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보며 계속 웃고만 있었다.
“귀환소녀의 컨셉 말고 드라마에 나오는 흙수저 걸그룹이 하는 음악은 모든 권한을 멤버들한테 주기로 했다며?”
“아···. 그랬나? 그런 말을 한 거 같기도 하고···.”
“아이돌은 스스로 반짝여야 한다며? 형이 한 이야기잖아. 지령이가 이런 곡을 만든 건 형이 의도한 거 아니야?”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데뷔하기 전이었는데 컨셉뿐인 아이돌은 진정한 아이돌이 아니라며 투트랙 전략으로 가겠다고 한 게 기억났다.
“그렇군. 그런데 갑자기 지령이가 어떻게 이런 곡을 만들었어? 난 이해가 안 가는데?”
“갑자기라니···. 너무 무심한 거 아니야? 지금껏 얘가 작곡을 가르쳐 달라고 나를 얼마나 졸랐는데?”
케이는 아주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를 졸랐다고?”
“말도 마.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서 물어보는 바람에 얼마나 피곤했는데 그래.”
“···왜 보고 안 했어?”
“뭘? 작곡 가르친다고? 형 바쁜데 내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
그런 건가? 하긴 케이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퀄리티 뭔데?
“그런데 이 곡 수준 뭐야? 지극히 대중적인 감각에 맞춰진 나의 귀에는 너무 좋은 곡으로 들리는데?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넌 알고 있었어?”
“하아···.”
케이는 힘이 빠진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작년에 형이 그 권한 어쩌고 이야기를 했을 때 지령이가 리리랑 함께 녹음실로 찾아왔더라.”
“그래? 근데 리리는 왜? 지령이는 피아노,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까지 한 실력자라 원래 음악적 자질이 풍부한 건 알고 있었는데···.”
“몰라. 리리도 가이드 아르바이트 뛸 때 관심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좀 배웠나 보더라고···. 둘 다 나한테 작곡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간단한 것부터 알려 줬어. 그런데 둘이 따로 공부하는 거 같더라고. 내가 바쁘니까 인터넷 강의 같은 것도 듣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겨우 일 년 정도 배우고 이런 걸 만들어 온다고?”
“진정하고 들어봐. 한 6개월은 말 그대로 초보였지. 그런데 가르치다 보니까 지령이는 음악적 소양이 남다른 거야. 사고의 깊이가 달라. 피아노나 현악기를 잘 다루는 것도 있었고···. 뭐 결국엔 리리는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어. 작곡도 일종의 노가다거든···.”
“아···. 각설하고 결론이나 말해 봐. 지령이가 어떻게 이런 곡을 가져왔냐니까?”
“월드 투어를 다녀오고 나서,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는 자기가 무슨 수학적으로 곡을 분석했다나 뭐라나? 통계적 기법을 써서 분석했다면서 막 설명하는데 형이 알다시피 난 그런 거에 약하잖아요.”
“넌 예체능계잖아.”
“맞아. 난 수학 같은 거 모른다고···. 어쨌건 모차르트가 미뉴에트를 수학적 원리로 만들었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이것저것 막 물어보더라고···.”
“그랬더니 갑자기 이런 곡을 보내 왔다고?”
“응···.”
“미쳤네.”
“미쳤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실력이 점프할 수 있지? 내가 골방에서 몇 년간을 작업해서 체득한 건데···. 현타 온다.”
“말조심해라. 현타가 뭐냐 현타가···. 연예인은 방송에서 할 수 없는 말은 평소에도 쓰면 안 된다는 거 모르냐?”
“내가 무슨 연예인이야. 난 프로듀서라고···.”
“뭐···. 어쨌든···. 조심해 인마.”
“하···. 갑자기 이런 곡을 들고 오니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직 나 같은 전문가에 눈에는 좀 어설픈 곳이 보이긴 하는데···.”
“뭘 어떻게 해? 그냥 수제자로 키워.”
“수제자로 키우라고? 뭘 어쩌려고? 정말 자신들의 음악을 하게 할 거야? 너무 빠르지 않아?”
케이는 너무 이르지 않은 건지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 곡을 뽑아 왔는데 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어차피 그건 애들하고 약속한 거니까···. 그리고 어차피 네가 봐줄 거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너를 믿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케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를 믿는다고···.”
‘짜식···. 은근히 좋아하네. 그런데 어쨌든 정말 놀라운 수준이야.’
솔직히 프로 작곡가라고 해도 믿을 만한 퀄리티였다. 이지령의 짙은 갈색의 아우라는 모든 능력을 다 포함한 슈퍼 재능이었다.
그냥 노래도 괜찮고 춤도 좋은 밸런스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짙은 아우라의 실체가 사실은 강한 보라색이 뒤섞인 능력의 형태였을 줄이야.
팀의 중심을 잡고 단단히 팀워크를 잘 다지는 리더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포텐을 터트리기 위해서 1년간이나 노력을 하고 있었다니···.
‘짙은 똥색···. 아니 갈색의 아우라를 좀 더 자세히 파악해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케이 녀석에게 가르침을 받게 하는 건데···.’
“으음···. 내가 한 말도 있고, 이 정도 음악적 능력으로 봤을 땐 충분히 지령이의 곡으로 컴백을 시켜도 될 것 같은데?”
“정말 그러려고? 이제 컨셉돌로 어느 정도 이름도 알렸고 월드 투어를 돌면서 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잖아. 그런데 다시 이런 정상적인 컨셉으로 나온다고? 리스크가 좀 있지 않겠어?”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인마. 누가 다시 컨셉 바꿔서 한대? 아까도 말했지만, 드라마에서 쓴다니까 그러네. 흙수저 아이돌이니까 곡도 자체 수급해야지. 그걸 리더가 쓴다는 설정을 넣어서.”
“드라마에서 써먹는다고?”
“어···. 물론 드라마가 빵 뜨면 오프라인에서도 활동할 수 있고···. 요즘 아이돌들이 컨셉을 번갈아 가면서 컴백하기도 하고 그러잖아. 발랄한 댄스를 했다가 R&B도 했다가···.”
케이는 내 말을 듣고 고민에 빠진 느낌이었다. 어쨌건 전체적인 프로듀싱은 케이의 몫이었으니까.
“음···. 정말 투트랙 전략이네. 아우라는 걸그룹에서 흔치 않은 곡을 만드는 아이돌이 될 거고···.”
“희귀하지. 진짜 그런 걸그룹은 손에 꼽잖아. 그런 그룹들은 다들 골수팬들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
“흐음···. 나쁘지 않네.”
나와 케이는 잠시 침묵을 하면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톡톡톡···.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케이야···.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이러면 어떨까?”
“뭔데? 말해 봐.”
“귀환소녀와 프로듀서님 저 회귀했어요의 세계관을 합치는 게 어떨까?”
“응? 갑자기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잘 생각해 봐. 어차피 아우라가 드라마에서는 잠시 실종됐다가 돌아온 흙수저 걸그룹이잖아. 어쨌거나 걸그룹으로 활동을 하는 거고···. 그 배경이 러브원하고 네미시스가 자리를 잡고 활동을 하는 시기인 거지.”
“엥?”
케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원래 같은 경연 프로그램에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실종이 되면서 아우라만 못 나온 거야. 그 대신 러브원과 네미시스가 뜬 거고···. 그래서 아우라가 연말 가요대제전에 나온 경쟁 그룹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지. 눈물 젖은 빵 몰라?”
“서, 설득력 있는데?”
“생각해 보니 러브원과 네미시스는 카메오라 어차피 많이 안 나올 거고···. 문제는 블랙소울 혜수 씨랑 식스엔젤 윤지, C-Girls의 이선정, 전 프렐류드의 은하 정도인데···. 스케줄을 조정해 봐야지.”
“그럴싸한데? 하영 씨랑 다솜이는 이제 활동을 거의 마무리하는 단계잖아. 형 말처럼 잘만 하면 세계관을 연결할 수도 있겠는데?”
“사실 뭐 세계관이라고 할 수도 없지. 어차피 현대잖아. 그냥 출연시키면 되는 거야.”
“출연진들을 다시 모으는 게 문제긴 하겠지만, 나는 찬성이야. 형 말처럼 되면 내 음원 수익이 또 짭짤해지겠는데?”
케이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넌 돈도 많은 놈이 뭘 그렇게 저작권을 밝히냐?”
“저번에 영화 OST로 들어온 저작권료가 엄청나.”
“응? 그건 한참 전에 차트에서 벗어났잖아.”
“일단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영화 때문인가 봐. 갑자기 많이 들어오더라고. 여러 국가에서 리메이크한다고 해서 팔았잖아. 그거 때문 아닐까?”
“흠···.”
이건 이기훈 전무에게 한번 상황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여러 나라에서 리메이크한 내 영화가 줄줄이 개봉한 거로 알고 있는데, 음원 저작권료가 저 정도라면 내가 받을 돈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귀환소녀도 넷플릭에서 히트하면 사람들이 신곡을 많이 듣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그럼 기존 출연진들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네.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도 있겠는데?”
아무래도 회사가 다른 배우들이 많다 보니 일정 조율이 상당히 복잡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너 하영×다솜 듀오 데뷔곡도 썼다며. 그건 안 들려주냐?”
“아···. 맞다. 그거 들려줘야지. 잠시만···.”
케이는 다른 폴더를 열어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들려줬다. 역시나 일류 프로듀서다운 곡이었다. 대중성도 있고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빠른 비트의 댄스곡이었다.
“이것도 좋네. 듀오 곡을 만들라고 했더니 무슨 걸그룹 노래를 만들어 놨냐?”
“흐흐···. 내가 일부러 두 사람의 능력을 믿고 상당히 복잡하게 구성을 가져갔거든? 근데 형 말처럼 걸그룹이 불러도 전혀 문제가 없는 곡이야.”
나는 팔짱을 풀며 손뼉을 한번 크게 쳤다.
짝!
“오케이! 이건 러브원 차기 타이틀곡으로 쓰면 되겠네.”
“그럼 나도 좋고···. 러브원에 하영 씨와 다솜 씨가 다 있으니 결국 곡이 주인을 찾아갔네.”
케이는 왠지 모르게 상당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쯧쯧···.”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뭐지? 그 눈빛은? 뭔가 나를 한심한 듯 바라보고 있어!”
“···유구무언이다. 인마.”
“아무튼, 세계관을 합쳐서 기존 팀을 부활시키자는 아이디어 좋았어. 역시 작가라 그런가 생각하는 게 좋네.”
“후후···. 너한테 그런 소리 들어 봐야 기쁘지 않다. 그나저나 네미시스의 곡도 있어야 하겠는데···.”
“아하··· 그건 카이시브 녀석들한테 맡기면 돼. 요즘 EDM을 가르치고 있는데 물이 올랐거든. 형이 좋아하는 북유럽 EDM을 접목한 텐뮤지스 스타일로 만들어 보라고 할게.”
“······.”
어떻게 이렇게 내 취향을 잘 아는 걸까? 나는 갑자기 케이가 무서워졌다. 원래 네미시스의 타이틀곡은 정이든과 DJ. Nec이 만들었었는데 아무래도 케이가 자기 제자들을 키우기 위해 먼저 선수를 치는 것 같았다.
“흐음···. 그럴까? 그런데 카이시브 녀석들 요즘 안 보이더라?”
“요즘 웹소설 보느라 밤낮이 바뀌어서 저녁때나 출근할 거야. 녹음실을 낮에는 내가 쓰고 밤에는 걔들이 쓰거든. 저녁때 만나서 이야기 좀 하고.”
“그래. 알았어. 그런데 지극히 대중적인 내 귀를 통과해야 할 거야. 곡이 별로면 알지?”
“참나···. 본인이 데리고 온 애들인데 능력을 저렇게 몰라요. 나중에 듣고 놀라지나 마셔.”
“그럼 좋고···.”
하긴···. 누가 뽑았는데···.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아우라를 보고 뽑은 천재들이다. 지령이도 그렇고 이번에는 아무래도 카이스트 녀석들이 일을 낼 분위기다.
드라마가 개봉하면 예전처럼 2파전이 아니라 3파전이 되겠는데? 차트가 또 우리 OST 곡으로 채워지는 거 아냐?
“흠흠···. 형···. 그런데 말이야.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이 빠진 거 같다.”
“응? 누구?”
“누구긴 누구야. 네미시스의 막내 음치 정유나지.”
“앗!”
나유정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네미시스의 맏네이자 영화 ‘프로듀서님 저 회귀했어요’의 신스틸러였던 그녀였다.
영화 마지막 부근에서 설사약을 드링킹하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짤은 아직도 심심치 않게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돌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 막판 설사신 때문에 며칠간 기분 안 좋았잖아.”
“하···. 뭐 어쩔 수 있나? 설득을 해 봐야지. 절대 더러운 장면은 안 넣기로 약속을 하든가 해야겠지.”
“그래. 그건 알아서 잘 설득해 봐. 난 빠질 테니까. 하여간 형은 그런 거 좋아하더라.”
케이는 심각해진 내 얼굴을 보고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길···. 뭐로 설득하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끼익···. 갑자기 녹음실 문이 열리고 모자를 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안녕하세요. 대표님”
“응?”
녹음실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아우라의 리더 이지령이었다. 그녀는 잠을 잘 안 잔 듯 다크서클이 아래로 심하게 내려온 상태였다. 살짝 걱정됐지만 야단쳐 봐야 뭐 하겠는가! 원래 이런 천재들은 뭐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습성이 있다고 하던데···.
“지령아. 안 그래도 잘 왔다. 지금 네 곡을 들어 보고 있었거든.”
케이가 지령이와 많이 친해졌는지 손을 들어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정말요? 어떠셨어요? 대표님?”
그녀는 기대감에 차서 나를 바라보았다. 다크서클은 진했지만 참으로 똘망똘망한 눈이었다.
“음··· 네가 만든 곡을 아우라의 컴백 타이틀곡으로 쓰려고···.”
“네? 정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