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공개 (2)
“안녕하십니까? 총괄 디렉터님. 어쩐 일이십니까? 요즘 바쁘시던데요.”
[예. 제가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무슨 일이신데 이렇게 급하세요? 혹시 드라마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저희 넷플릭 대표님께서 직접 넌지시 물어보신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하게 됐습니다. 원래 이런 건 전화로 하면 안 되는데···.]
“하하···. 뜸은 그만 들이시고 말씀하시죠?”
[네. 각설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넷플릭이 J&J 스튜디오의 지분을 확보하고 싶습니다.]
“······.”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지분이라니···. 대표 이름이 라드 헨드릭스였나? 이 양반도 이기훈 전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흥미는 없지만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물어는 봐야겠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대표님께서 이번 1시즌을 보시고 작가님의 전작들도 다 찾아보셨다고 합니다.]
‘응? 라드 헨드릭스가?’
“그래서요?”
[‘나만 아는 세계멸망’ 시리즈가 이미 넷플릭의 킬러 콘텐츠가 될 확률이 높은 상황에서 전작들을 살펴보니 확신이 딱 드신 거죠. 아예 같이 동반자처럼 함께 가는 게 어떤지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넷플릭 CEO 라드 헨드릭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확실히 안목은 뛰어난 사람이야.’
자뻑이냐고? 아니다. 넷플릭에서 최고로 높으신 분 생각이다.
[작가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CA 미디어 산하 D-Studio의 지분 5%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주주죠.]
“아···. 그건 기사로 봤습니다. 확실히 넷플릭은 D-Studio를 전략적 동반자로 생각하시는 거 같더군요.”
[네. 그렇다면 작가님께서도 생각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죄송합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왜, 왜 그렇죠?]
“저희는 돈이 필요 없기 때문에 투자도 안 받고 있습니다.”
[아···. 그래도 전략적인 제휴 관계로 생각해 보심이···. 아무래도 지분으로 엮이는 관계가 나중에 일하기는 편할 테니까요.]
“글쎄요. 좋은 작품을 드리면 되지 굳이 지분까지 교환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좀 더 밀접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총괄 디렉터님. 그게 아니더라도 저희는 아주 긴밀한 관계입니다. 이제 1시즌밖에 안 끝났습니다. 앞으로 6개의 시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넷플릭의 킬러 콘텐츠가 되지 않겠습니까? 후발 주자들과 경쟁에서 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IP도 보유하고 계시니 다른 나라에서 리메이크하셔도 되고···.”
[후···.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합니다. 애초에 작가님께 제안할 때부터 이런 걸 노린 겁니다. 물론 이렇게까지 잘될 줄 몰랐지만요.]
“저도 이렇게 반응이 빨리 올지 몰랐습니다.”
[작가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지분 건에 대해서는 제가 대표님께 잘 설명드리겠습니다.]
“네···. 말씀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예. 무슨 또 할 말이라도···.”
[제가 정신이 없어서 챙기질 못한 건데요. 기사를 보니 J&J 엔터에서 키우는 걸그룹으로 드라마도 찍을 계획이시더군요. 귀환소녀던가요?]
“네. 맞습니다.”
[그것도 저희가 오리지널 시리즈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민영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그건 이미 계획이 잡혀있습니다. TVM하고 먼저 하기로 했습니다.”
[쿨럭···. 하아···.]
전화기 너머로 이민영 디렉터의 한숨이 리얼하게 들려왔다.
“총괄 디렉터님? 왜 그러세요.”
[···J&J의 지분이 안된다면 차기작이라도 잡으라고 하셨는데···.]
“아아···. 그런 이야기군요.”
아무래도 민영 씨가 본사에서 밀명을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귀환소녀는 오프라인 모델인 걸그룹 ‘아우라’ 때문에 기존처럼 IP를 넘기거나 하는 계약을 맺기 힘듭니다. 이해 바랍니다.”
[음···. 그렇긴 하겠네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TVM에서 먼저 공개를 하고 곧바로 넷플릭에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거라도 꼭 저희 쪽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혹시 승진 소식은 없으십니까? 한국에서 연달아 빵빵 터트리셨는데요?”
[아···. 아직 비밀이긴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오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계속 좋은 관계를 이어 갔으면 좋겠네요.]
“물론이죠.”
나는 그렇게 그녀와 통화를 종료했다.
지이잉···. 지이잉···.
이번엔 투데이연예의 김 기자의 전화였다.
‘하···. 바쁘다. 바빠. 그래도 꼬박꼬박 좋은 기사 써 주는 사람인데 받아 줘야지.’
“여보세요.”
나는 이런 식으로 전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망하는 것보다는 바쁜 게 낫지 않겠는가? 다소 귀찮더라도 꼬박꼬박 응대를 잘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길 몇 시간째···.
지이잉···.
[발신자: 나유정]
“여보세요? 유정 씨? 무슨 일이에요?”
[준형 씨. 혹시 저 출연하는 방송 출연 좀···.]
뚜루룽···.
그녀의 말을 상세히 듣지도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나는 방송과 악연이 있는 것 같다. 나갔다 하면 흑역사를 써 대니···. 아무리 유정 씨가 부탁하더라도 거르는 게 상책이었다.
지이잉···.
다시금 유정 씨의 전화가 걸려 왔다.
“미안하지만 안 합니다.”
[아니! 왜요?]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그냥 방송과 맞질 않는 체질입니다. 파도흑이라고 불러 주세요.”
[파도흑이요?]
“파도 파도 흑역사만···. 자, 잠시만요. 혹시 이거 촬영 중?”
[···네. 맞아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살포시 눌렀다.
뚜루룽···.
역시 나는 방송과 맞지 않는 체질이다. 이로써 또 한 번의 흑역사가 쓰였군.
“후우···. 미리 말 좀 해 주지.”
지이잉···.
으아아! 오늘 도대체 왜 이래! 벌써 몇 통째야? 혹시 또 유정 씨인가?
나는 다시 한번 발신자를 확인했다.
“응? 누구지?”
이름이 안 뜨는 거로 봐선 내 주소록에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만 특별히 받기로 하고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어? 전화 받으시네. 안녕하세요. 준형 씨. 저 최하나예요.]
“네? 누구시라고요? 최하나···. 최하나 작가님이요?”
[하하···. 다행히 알아들으시네요. 전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있나요. 작가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예전에 유정 씨와 같이 뵙고 처음 통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그때 유정이 매니저라고 해서 한식당에서 뵀었죠.]
“그땐 제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대화에 막 끼어들었는데 예쁘게 봐 주셔서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날은 너무 충격적인 날이라 모든 사건을 너무나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말이 없는 담당 배우를 데리고 식당에 가서 우리나라의 톱 작가 중 한 명이라는 최하나 작가를 만났다. 그때는 데일리노블에서 1위를 찍고 있어서 알량한 자신감이 생겼을 때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멋대로 지껄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유정 씨 집에 들러 안방을 들여다보고 진성 아이돌 덕후의 실체를 알면서 엄청 놀랐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추억이기도 하고 아찔한 상황이긴 했는데, 최하나 작가는 그런 나를 보고 그럭저럭 괜찮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때 이 작가의 눈빛을 보면서 뭔가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는지요?”
[아···. 전화번호는 유정이한테 물어봐서 알았고···. 상의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두 가지인데···.]
최하나 작가가 뭔가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이었다.
“전화로 하시기엔 좀 그런 이야기인가요?”
[뭐···.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점심 드셨어요? 지금 11시네요. 1시 반쯤 처음에 우리가 봤던 한식당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아···. 최하나 작가님이 손수 먼저 전화를 주셨는데 제가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찾아봬야죠.”
[호호···. 너스레는 여전하시네.]
“제가 이래 봬도 매니저 출신 아닙니까?”
[그래요. 그러면 거기서 봅시다.]
그렇게 통화를 종료하고 그 한식당의 위치를 떠올려 봤다. 서울 외곽이라 얼른 나가야 최하나 작가보다 먼저 도착할 것 같았다. 유정 씨와 그 식당에 다녀온 후 음식이 계속 생각나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은 적도 있었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곳.
‘오랜만에 한정식을 좀 먹어 볼까?’
그리고 최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 * *
나는 약속 시간보다 약 20분 먼저 도착했다. 내가 알기론 최하나 작가는 항상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약간 서둘러서 온 것이다.
최하나 작가의 단골집답게 이름을 대니 예약된 장소로 나를 안내해 줬다. 여긴 언제 봐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였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최하나 작가가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손을 번쩍 들었다.
“오! 이 작가님. 벌써 와 계셨네.”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무리 내가 성공했다지만 대학교 직속 선배에 10년간 드라마계에서 톱을 찍은 레전드를 편하게 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에이···. 무슨 내가 노친네도 아니고 그렇게 예의를 차려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 정도 대접은 받으셔야죠. 그리고 제가 원래 예의가 좀 바른 편입니다. 하하···.”
알이 없는 안경테를 쓰고 머리를 뒤로 묶은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보니 직설적이고 진솔, 담백한 그녀의 성정이 느껴졌다. 최 작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작가 넉살은 참 여전하네. 매니저로 처음 봤을 때도 뭔가 자신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지. 지금이야 뭐 우리나라 대표 작가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컸지만···.”
“헉···. 선배님. 남들이 들으면 웃습니다. 제가 무슨 대표 작가입니까? 그런 말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겸손이 지나치면 가식이나 기만이 되는 법이야. 후배님.”
“진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우리는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조금 있으니 한정식이 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이 집 음식이 생각나더군요. 작가님이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오늘은 벨트를 풀어야겠네요.”
“이 작가는 역시 맛을 아는 사람이야. 그건 그렇고 유정이는 방송 때문에 바쁘다며?”
“네. 요즘은 CF 찍고 예능 방송 출연하는 낙으로 살고 있습니다.”
“에이···. 같이 야구장 가서 뽀뽀도 하고 그러던데 뭐···.”
“···그건 일 때문에 간 거고요.”
“아니야. 명분만 그렇고 놀러 간 거겠지.”
“하하···. 그렇다고 해 두죠. 선배님.”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그게 아니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멋있어진 거 같아서···.”
“네? 하하하···. 당황스럽습니다.”
“그때 유정이랑 같이 들어올 때 왠지 이렇게 될 거 같았어. 느낌이 좋았거든. 자신감 있는 눈빛도 맘에 들었고···.”
“설마요. 그때 저는 하룻강아지 로드 매니저였는데요?”
“요새는 하룻강아지가 세계적으로 드라마도 히트시키나? 그것도 그렇게 엄청난 기세로? 나 이 작가 작품 다 본 사람이야. 취미로 썼다는 웹소설도 다 봤어.”
“헉···.”
“내 느낌이 맞았어. 그 자신감 있는 눈빛은 그냥 허풍이 아니었던 거야. 솔직히 슬기로운 덕질생활인가? 그거는 그냥 트렌디하게 잘 썼네 하는 느낌이었어. 그런데 그 후에 쓴 나만의 세계는 충격적이었어. 그때 깨달았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 눈빛의 정체는 자신감이었던 거야.”
“으음···.”
나는 최하나 작가의 칭찬에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 일단 드시고 시작하시죠.”
“그럴까?”
나는 맛깔나게 차려진 상에 음식을 집으며 허겁지겁 삼키고 있었다. 그러길 잠시···.
“이 작가. 내가 갑자기 보자고 해서 놀랐지?”
“아, 아닙니다. 놀라긴요. 언젠가 이런 자리에서 조용히 뵙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거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선배님. 후배 대하듯 대하시면 됩니다.”
“그럴까? 그럼 편하게 말할게. 우리 후배님한테 말이야.”
“네네···.”
“내가 보자고 한 이유는 두 가지야.”
꿀꺽···.
나는 최하나 작가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내일 모교에서 강의가 있는데 김명환 감독이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시간이 비게 생겼거든? 거기에서 아무거나 주제를 잡아서 1시간 정도 강의를 해 줬으면 좋겠고···.”
“아···.”
“그리고 두 번째는 내 거취에 관한 문제야. 나도 이제 다른 작가들처럼 에이전시에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혹시···.”
나는 최하나 작가의 말을 듣고 두 눈이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