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 발표회 (1)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7월 31일.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J&J 스튜디오의 신작 ‘나만 아는 세계멸망’ 시즌1에 대한 제작 발표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김호진 감독(이제는 J&J 스튜디오 대표이사)과 나는 대기실에서 제작 발표회에서 이야기할 내용에 대해 서로 말을 맞춰 보고 있었다.
“이번 제작 발표회는 그냥 평범하게 갈 생각입니다.”
“대표님, 저도 그게 마음에 듭니다. 어차피 드라마의 내용 자체가 자극적이고 1시즌 전체가 전부 공개되는 터라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린 알잖아요. 작품이 정말 잘 나왔다는 걸요.”
“대표님.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제가 그런 확신을 가지고 얼마나 피를 본 줄 아십니까? 이건 무조건 된다고 찍었는데 시청률이 폭삭 망했을 때의 기분이란···. 망해 보신 적 없는 대표님은 절대 모르실 겁니다.”
“망해 본 적 없다니요. 저도 예전에는 힘들었어요.”
이건 정말 마음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사실이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작가 생활을 접고 매니저로 전직했겠는가? 그런데 김호진 감독의 과거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작품은 잘 만드는데 시청률은 항상 안 나오는 PD였달까? TVM에 와서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터트리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대표님도 망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항상 망해서 성공한 게 드물었죠.”
“그래도 작가로 성공하시고 이런 튼튼한 기업까지 창업하지 않으셨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운이 좋았죠.”
“후후후···. 겸손하시기는···.”
“이따가 제작 발표회가 시작하면 아시죠? 서로의 얼굴에 금칠해 주기입니다.”
“저야···. 있는 말만 해도 그냥 자연적으로 대표님 얼굴에 황금 칠이 되니까 걱정이 없지만, 제가 문제겠네요.”
“후후···. 그럴 리가요.”
[대표님, 나가실 시간입니다.]
문 앞에 있던 조아린 팀장이 밖의 상황을 전달받고 우리에게 정보를 전해 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호진 감독과 함께 제작 발표회가 열리고 있는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파파파박···.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팡팡 터졌다. 아···. 물론 나와 김호진 감독을 찍는다기보단 현재 최고의 이슈인 정주빈의 사진을 담느라 기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우리는 일렬로 서서 무대로 입장했다. 무대 위에는 의자가 일렬로 놓여 있었고 제일 끝부분에 김호진 감독부터 나, 정주빈, 이희진, 이수현, 정혜성, 이건호 7명이 차례로 입장했다.
‘윽···. 자리 배치 뭐야? 하필이면 정주빈 옆이라니···.’
정주빈이 누구던가. 얼굴 하면 정주빈! 아직도 꽃미남으로 불려도 무방한 사내였다. 그 옆에 내가 있으니 비교가 되는 게 자명한 사실···.
하지만 나는 내가 키가 더 크다는 생각으로 정신승리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사회는 MC로 유명한 개그우먼 박주선이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는 게 많은 고학력 개그우먼이었고, MC를 하면서 맥을 잘 잡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자···. 넷플릭 오리지널 시리즈 ‘나만 아는 세계멸망’을 만드시고 연기하신 분들입니다. 어서 오세요. 자리에 앉아 주셨습니다.”
“와우! 제가 정주빈 씨의 오랜 팬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너무 감격스럽네요.”
“하하하···.”
MC 박주선의 너스레에 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세요.”
정주빈이 마이크를 들어 달달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꺄아악···.”
“하하하···.”
어느새 공식 석상에서 농담까지 할 정도로 멘탈이 회복된 정주빈이었다. 그도 1시즌 편집본을 보고 흥행의 성공을 예상해서 그런지 상당히 편안한 얼굴이었다.
“제 사심은 이제 그만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제작 발표회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먼저 김호진 감독님부터 인사를 쭉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나만 아는 세계멸망의 연출을 맡은 김호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작품은···.”
김호진 감독부터 나와 주, 조연 배우들의 인사까지 쭉 이어졌다. 그 후 미리 이야기된 박주선의 질문이 이어졌다.
“김호진 감독님은 이런 종류의 대작 연출이 처음이신 걸로 아는데요. 그 소감과 작품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부탁드립니다.”
“네. 언급해 주신 대로 저는 주로 트랜디한 드라마나 연예계를 다룬 가벼운 뮤지컬 영화를 연출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블록버스터급 작품의 경험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안 해 봐서 그렇지, 시키면 또 곧잘 합니다. 그러니 우리 회사 대표님께서 저를 믿고 맡기신 거겠지요.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 회사의 대표님은 옆에 계신 이준형 작가님입니다.”
“작가님이 대표님이라 좀 힘드셨겠네요.”
“하하···. 그건 아닙니다. 배우 나유정 씨가 저희 대표님의 소울메이트라고 하던데요. 전 워킹메이트입니다. 힘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편하죠.”
김호진 감독의 뜬금없는 소리에 내 미간이 살짝 움찔했다.
‘이 양반이 아까 맞춘 대로 해야지. 개그 욕심을 부리네? 하···.’
“어쨌건 ‘나세멸’은 독특한 이준형식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저는 그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대본에 충실하게 연출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내용은 5일 후 공개되는 1시즌 전편을 보면 아시게 되겠지만, 세상의 멸망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한 사내의 외로운 분투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영상을 보시면 초반부터 상당히 독특한 소재들이 나오고 사건 전개가 빠르기 때문에 엄청난 몰입감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가끔 터지는 개그나 로맨스 요소도 있으니 일반적인 서양식 아포칼립스물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죠.”
김호진 감독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초반 개그만 빼고 마음에 드는 인터뷰였다.
“이준형 작가님. 김 감독님께서 대본에 대해 칭찬을 하셨는데요. 어떠십니까? 감독님 말씀처럼 특별한 게 있나요?”
나는 박주선의 질문에 마이크를 넘겨받고 기자들을 쳐다보았다.
“으음···. ‘나세멸’은 기본적으로 좀비 아포칼립스이지만, 약간의 로맨스와 개그 그리고 기업의 음모가 결합한 형태로 한국형 웹소설 베이스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감독님 말씀처럼 호흡이 상당히 빠르고 몰입감이 강합니다. 1시즌을 6편으로 압축해서 거의 영화와 같은 밀도로 제작했습니다. 아마도 보시는 데 지루함은 전혀 없으실 겁니다.”
“오호···. 한국형 스토리라는 게 끌리는군요. 그런데 이준형 작가님. 작가님 개인적으로 보면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흥행에 실패한 적이 없는 무패의 작가님이신데요. 이 작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박주선도 마찬가지로 사전 협의가 없었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무패라뇨. 저는 나이도 어리고 작가로서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래도 항상 ‘재미가 있으면 사람들은 본다.’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부터 재미있는 이야기, 그리고 남들이 봐도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미가 있으면 본다라···. 뭔가 단순하지만 그럴듯한 답변인 것 같습니다. 작품 제작을 기획하시면서 애초부터 김호진 감독님을 연출로 생각하고 진행하셨다고 하는데요. 이유가 있었습니까?”
“전 출신이 웹소설 작가라 그런지 상당히 단순합니다. 그냥 김 감독님은 실력이 좋으신 분입니다. 특히 제한된 시간, 비용에 최적화해서 영상을 뽑는 건 아마도 국내, 아니 세계 제일일 겁니다. 그렇다고 대충 찍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퀄리티도 훌륭합니다. 이는 제작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야 하지만 전체적인 통찰력도 중요하죠. 그런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현장 장악력도 대단하셔서 감독님을 믿고 따르는 스태프들이 많기도 하고요.”
나의 대답에 무대 위의 정주빈이나 배우들까지 전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김호진 감독은 내 칭찬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인터뷰 주자로 정주빈이 마이크를 들었다.
“주빈 씨. 다들 은퇴하실 거라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복귀를 결정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그만큼 작품이 좋았던 겁니까?”
“하하···. 너무 직설적으로 물어보시니 당황스럽네요. 사실 주선 씨 말씀대로 은퇴하려고 했던 건 맞습니다.”
파바바바박···.
정주빈의 솔직한 인터뷰에 기자들이 셔터를 마구 눌러 댔다.
“그런데 이준형 작가님의 전작 ‘나만의 세계’와 ‘나세멸’의 대본을 보고 그런 생각을 접었습니다. 이건 무조건 내가 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달까요.”
“와···. 대단하네요. 어떤 면이 그런 생각을 들게 했을까요?”
“나세멸의 주인공 정중대가 바로 접니다. 100%는 아니지만, 꽉 막힌 이 녀석을 연기할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중에 작품을 보시면 알겠지만, 캠핑이나 서바이벌을 좋아하는 저와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연기하는 것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어요. 이건 뭐 작가님이 저를 생각하고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작가님! 주인공을 정주빈 씨를 생각하고 쓴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해명 부탁드립니다.”
“쩝···. 이걸 말씀드려도 좋을지 모르겠는데요.”
“마구마구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실은 넷플릭에서 빅데이터로 뽑아낸 결과물입니다.”
“빅데이터요?”
“넷플릭에서 어떤 감독에 어떤 배우를 쓰면 흥행 가능성이 클지, 그런 것을 빅데이터로 분석해서 경우의 수를 만들고 있는데요. 실제로 미국에서도 그런 작품들이 만들어져서 큰 성공을 했던 적도 있고요. 그 일환으로 넷플릭 한국 지사의 이민영 총괄 디렉터께서 그러시더군요. 제가 글을 쓰고 정주빈 씨가 주연하는 작품은 성공 확률이 꽤 높을 거라고 말이죠.”
타다다닥···.
신기한 사실이 언급되자 기자들의 타이핑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넷플릭 AI가 작가님과 정주빈 씨를 매칭시켰다는 말입니까?”
“AI요? 음···. 정확하진 않지만, 뭐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거참 놀라운 이야기군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주빈 씨를 캐스팅하기 위해서 강원도를 방문한 후입니다.”
“그건 왜 그렇죠?”
“주빈 씨를 처음 봤을 때 제가 쓴 작품의 주인공과 싱크로율이 거의 100%로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와···. 정말 운명 같은 일이었겠군요.”
“네. 주선 씨 말씀대로 정말 어쩜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 결국 연기도 완벽하게 하셨지만요.”
“호···. 그 말씀을 들으니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얼마나 싱크로율이 대단한지 저도 공개가 되면 무조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질문이 계속 진행되면서 여주인공인 이희진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이야···. 언제봐도 요정 같은 외모의 희진 씨군요. 왕년 슈퍼걸즈의 센터답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진 씨는 신인상도 받으셨고, 살짝 논란이 됐던 이슈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을 어떻게 촬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각오가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 말이죠.”
“네···. 솔직히 말하면 전작에서 욕을 좀 많이 먹어서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구구절절 해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번 작품을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내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희진 씨는 드라마에서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하던 배우입니다. 그 잠재력을 이번 작품을 통해서 똑똑히 봤기 때문에 작품이 공개되면 연기력 논란은 싹 사라질 겁니다. 원래 희진 씨의 연기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타다다닥···.
역시나 내 말이 기삿거리가 되겠는지 기자들이 또 한 번 바빠지고 있었다. 넌지시 말했지만 사실상 전작이 문제였기 때문이지 이희진의 연기력은 정상이었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후후···. 희진 씨의 전작을 만들었던 애송이 감독아. 어디 한번 SNS로 기어 나와서 저격 한번 해 봐라. 아주 묵사발로 만들어 주마.’
이희진은 내 말이 상당히 고마운 모양인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감동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팩트니까···.’
그렇게 조연 배우들까지도 작품에 대한 인터뷰가 매끄럽게 진행됐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 시간이 이어졌다. 기자 대다수가 궁금한 사항이나 이슈가 됐던 질문들을 자세히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 자꾸 데일리 연예서치의 강기남 기자가 걸리적거리고 있었다.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었는데 끝까지 손을 들고 기회를 달라고 하고 있었다.
‘저 꼴통 시키···. 어휴···.’
박주선 MC가 자꾸 내 눈치를 보며 어떻게 하냐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초반에 데일리 연예서치 기자의 질문을 받으면 안 된다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속 기회를 주지 않자 급기야 소란을 일으킬 분위기였다.
‘저런···. 어쩔 수 없나? 질문 하나만 받아 줄까?’
내가 박주선에게 기회를 주자고 신호를 보내니 그녀도 찰떡같이 이해하고 강기남 기자를 지목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마지막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센스가 만점인 MC였다. 질문을 하나만 받겠다고 칼같이 끊은 것이다.
“데일리 연예서치의 강기남입니다. 물어볼 질문은 많은데 하나만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제일 중요한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저 인간···. 또 무슨 이상한 질문을 하려고···.’
무슨 말을 할지 살짝 걱정되고 있었다.
“저번 TVM에서 방영한 ‘어색한 캠핑’이라는 프로그램 있었죠? 거기 살짝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냉장고 신이었는데요. 여기서 이수현 씨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왜 2주마다 정주빈 씨의 집에 들러서 반찬을 주고 가시는 건가요? 혹시···.”
‘어라? 뭐지? 내 이야기가 아니네? 잘못 해명하면 완전 메가톤급 이슈가 될 게 분명한데···.’
아무래도 난 어쩔 수 없는 제작자인 것 같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드라마의 홍보에 도움이 될지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눈은 자동으로 이수현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