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세계멸망 (2)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날씨가 풀리자 촬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시즌 분량은 촬영과 편집을 마친 후 여름 무렵 공개를 할 생각이었다.
상당히 무리한 일정이었으나 김호진 PD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좀비물은 여름이 제격이지.’
공포물은 여름에 봐야 재미가 있는 법이다. 애인이나 친구와 함께 감상하는 것도 영상을 더욱 재미있게 보는 방법이었다. 물론 애인이나 친구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드라마를 촬영팀에게 그냥 맡겨놓고 놀기가 뭐해서 종종 촬영장까지 내려와 작가로서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현재 이곳은 정주빈과 이희진의 어색한 만남에 대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장소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대전지부 법의학부!
CSI의 광팬인 초보 법의조사관 한수지는 과도한 의욕으로 다른 부서들과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 선생님. 부검 하나만 더 하고 퇴근하시면 안 될까요?”
여주인공인 이희진이 맡은 역할이 바로 이 한수지라는 초보 법의 조사관이었다. 그녀는 오후에 들어온 20대 여대생의 시신을 두고 법의관에게 부검을 같이하자고 채근하고 있었다.
“한 선생···. 왜 그래. 그냥 내일 하자고! 피곤해 죽겠어. 오늘 3건이나 했잖아.”
“안 돼요. 오늘까지 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겠다고 해요.”
“그래? 그럼 그러라고 하던지···.”
“아니 선생님. 이거 그냥 질병사나 사고사가 아닐 수 있어요. 가족들이 저러는 것도 수상하고요.”
“뭐 근거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병력이 있으니까 그러겠지. 그리고 한 선생이 무슨 형사라도 돼? 어이가 없어서 원···.”
“그래도 20살짜리 여대생이 갑자기 친구들하고 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사망하는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아···. 몰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야.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
“선생님! 제발요.”
“이 사람아. 죽은 사람 뒤치다꺼리하다가 산 사람이 죽게 생겼어. 이거 하나 더한다고 내 삶이 뭐가 달라져? 그리고 다른 법의조사관들도 다 퇴근했는데 뭐 어쩌려고?”
수사연구원 규칙상 4인 1조로 부검을 실시해야 하지만 살인사건이 너무 많아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져서 이런 룰을 지키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변사자(사망의 원인이 불분명)의 경우 법적으로 부검을 피해갈 수가 없으나 이마저도 예산이나 인력 문제로 흐지부지 넘어가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었다.
“한 건만 더 하시고 가세요. 네?”
“진짜 무슨 미드 주인공 흉내 내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한 선생!”
단역 역할을 하는 법의관의 표정에 짜증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클로즈업 되고 있는 이희진의 표정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 연기 좋아. 역시 보라색 아우라의 연기 천재 이희진답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암 걸리겠어. 왜 퇴근을 못 하게 하는 거야. 그것도 하급자가 말이지···.’
하지만 이희진과 같은 출중한 외모에 불같이 화를 낼 수 없는지 한숨을 푹 내쉬는 법의관이었다.
“하아···. 씨···. 정 그러면 사무실에 가서 정 선생에게 부탁해봐.”
“네? 정 선생님이라면···.”
“그래. 정중대 선생 말이야.”
“..........”
“왜 그래? 열정이 넘치는 것 같은데 얼른 정 선생 퇴근하기 전에 부탁하던지.”
정중대 법의관은 대전지부 내에서도 괴짜로 유명했다.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쌀쌀맞고 괴팍했다. 사내 정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오로지 부검만 진행했다.
상사나 동료들도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만, 실력과 부검 속도 하나 만큼은 뛰어나 그가 빠지면 겨우겨우 운영되던 법의학부 법의검사과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거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한 선생이 당직 한번 대신 서준다고 하면 아마 해줄걸? 정 선생이 제일 싫어하는 게 주말 당직이잖아. 그거 바꾸려고 매일 피똥 싸는 거 알잖아?”
“자, 잘 몰라요.”
“모르긴? 정 선생 퇴근하기 전에 한번 가보라고···. 형사님도 얼른 퇴근해야 할 거 아닌가? 부검을 하든 돌려보내든···.”
그는 한수지를 남겨두고 매정하게 사무실을 떠났다.
“아악! 사람들이 다들 왜 이러는지 몰라! 자기만 안다니까!”
초보 법의조사관 역을 연기하고 있는 이희진은 싱크로율 100%의 매소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부검실을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컷! 굿굿! 아주 잘했습니다.”
김호진 PD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김 PD의 칭찬에 이희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엄지척을 날렸다.
‘흐흐···. 연기 잘하죠? 보라색 아우라가 유정 씨하고 비슷한 수준이라고요. 전작은 잊으시길···.’
그는 다른 장면을 찍기 위해 장소를 이동하면서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희진 씨 연기 엄청 잘하는데요? 영화에서는 왜 그런 거래요? 아무리 봐도 그럴 리가 없어 보이는데···. 하여간 대표님은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배우들을 데려오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하···. 영업 비밀입니다.”
희진 씨는 그야말로 암을 유발하는 초반 캐릭터답게 연기를 잘하고 있었다. 가볍게 칭찬을 해 줬더니 상당히 감격해 하는 눈치였다.
‘희진 씨 같은 타입은 칭찬만 좀 해주면 알아서 잘하는 타입이지.’
장소를 옮겨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법의조사관 한수지가 상기된 얼굴로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저···. 정 선생님···.”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왠지 목소리에 힘이 빠진 모습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의 악명을 들어본 모양···.
정중대 법의관 역할을 하고 있는 정주빈이 스포츠 백을 메고 퇴근을 하려다가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크···. 싱크로 미쳤다.’
소름 끼치도록 잘생겼지만 뭔가 텅 빈 눈동자를 가진 외로운 남자.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지만, 동료들과 교류가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한수지의 눈에 두꺼운 롱코트를 입고 군용 워커를 신고 있는 정중대 법의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이곳 대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워낙 소문이 이상해서 처음에 외모를 보고 혹했다가 관심을 완전히 끊은 인물.
“뭡니까? 볼일 있어요?”
“저···. 부검 하나만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 시간에?”
정중대는 슬쩍 시계를 쳐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급한 건이 있어서요.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동요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이 정 선생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곤 했다.
하지만 정중대는 한수지의 부탁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무 말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문 앞에 한수지가 버티고 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는 정중대였다.
“어. 어···. 저, 저기요.”
무슨 어린아이를 밀치듯 묵직한 팔이 그녀를 밀어냈다.
“지나갑시다.”
“이이익···.”
그녀가 아무리 힘을 줘도 정중대의 팔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그냥 속절없이 문 옆으로 밀려버리는 한수지였다.
“나갈 때 불 꺼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말투.
“자, 잠시만요. 제, 제가 주말 당직 서 드릴게요.”
주말 당직이라는 말을 들은 정중대가 복도로 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거 정말입니까?”
“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갑시다. 얼른 해치우죠.”
두 사람은 부검을 하기 위해 풀 세팅을 마쳤다. 수술복, 부검복, 앞치마, 장갑, 장화, 고글을 착용하고 부검실의 조명을 켰다. 부검실은 마치 한낮처럼 훤히 밝아졌다.
“얼른 해치웁시다.”
정중대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딱 한 마디만 하고 도구를 들어 20대 여대생의 부검을 빠르게 진행했다.
슥슥슥···.
그야말로 번개 같은 장인의 손놀림이었다. 법의조사관으로 보조를 맞추고 있는 한수지는 그의 솜씨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길 15분째···. 갑자기 정중대가 부검 도구를 해부용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합시다.”
“네?”
“고콜레스테롤 혈증입니다. 자연사에요. 뭐가 의심스럽다고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네. 뒷수습은 알아서 하세요.”
정중대는 몸을 돌려 나가려다 한수지를 보고 검지를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주말 당직···. 잊으면 안 됩니다.”
“아, 아니 자세히 설명해주고 가셔야···. 경찰에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의뢰한 건데···.”
“귀찮게스리···. 시신의 병력을 한번 찾아보세요. 온몸의 혈관이 망가졌잖아요. 아마도 이 희귀병을 오랫동안 앓아온 것 같은데 분명히 내가 말한 증상이 거기 적혀 있을 거예요. 괜히 고인의 몸을 망가트리지 맙시다. 보니까 대학생인 것 같은데···.”
“자, 잠시만요. 제가 좀 찾아보고···.”
그녀가 서류를 찾아보려는데 정중대 법의관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한수지가 툴툴거리면서 정리를 하고 나가려는데 한 구의 시체가 안치실로 입고되고 있었다.
“내일 부검할 시신인가요?”
“네.”
내부 직원이 시체를 안치실로 옮기는 장면이 나왔다. 카메라에 비친 그 모습이 상당히 그로테스크했다. 시신을 담는 백의 지퍼가 살짝 열려 손이 나온 상태였는데 뭔가에 물어뜯긴 흔적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스크와 장갑을 벗고 복도의 창문가로 다가갔다. 일거리가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음이 답답한 한수지였다.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니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있는 정중대 법의관이 보였다.
“무슨 차도 자기 같은 걸 타고 다니네.”
한수지는 커다란 백 팩을 조수석에 던져놓고 운전석에 탑승하는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정중대가 타고 다니는 차는 뭔가 많이 개조된 군용차 같았다. 왜 저런 차를 타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그녀는 차를 몰고 사라지는 그를 끝까지 지켜봤다. 뭔가 신경 쓰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컷! 희진 씨. 표정 아주 좋았어요. 굿!”
“희진 씨 연기 진짜 좋았습니다. 연구 많이 하셨나 봐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작가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그녀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나는 촬영이 시작되기 전 김 PD에게 이희진에 대해서는 칭찬을 많이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원래 김호진 PD도 사람을 다그치는 성격이 아니긴 했지만, 평소보다 칭찬을 더 자주하고 있었다.
‘음···. 정주빈과 이희진이 같이 서 있는 게 그림이 아주 좋네. 둘 다 연기력도 출중하고 케미도 좋고···.’
아무래도 성격이나 인성에 문제가 없는 배우들이다 보니 촬영이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또다시 신이 바뀌어 다른 장소에서 촬영이 재개되었다. 연구원 식당, 사무실, 주차장 등 계속해서 두 사람이 마주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사실 우연히 만나는 것 같았지만 정중대에 대한 한수지의 스토킹(?)이었다. 회사에서 그가 보이면 항상 멀찍이 떨어져 그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간의 관찰을 통해 정중대에 대한 정보를 노트북에 정리하고 있는 한수지였다.
카메라가 노트북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1) 나이는 34세, 미혼, 사는 곳 계룡시
2) 친한 동료가 전혀 없음.
3) 회의 시 논리로 그를 이길 수 없음.
4) 부당한 지시를 받으면 칼같이 거부함.
5) 대체로 칼퇴근, 모든 회식이나 야유회 미참석
6)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음.
한수지는 마지막으로 정리한 문장을 보고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는 왜 한 번도 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관심은 결국 회사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영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퇴근 후 정중대를 미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촬영팀은 한수지가 정중대를 미행하는 장면과 그의 슈퍼쉘터를 발견하는 장면을 찍는 중이었다.
근처에 도착한 그녀는 몰래 숨어서 거대한 성벽과 개인 주택이라고 보기엔 황당하게 큰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컷!”
“희진 씨. 잘하셨는데요. 좀 더 놀란 표정으로 부탁드립니다.”
“넵! 알겠습니다. 감독님.”
나는 김호진 PD 옆에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촬영이 이렇게 매끄럽고 빨리 진행되는 것을 보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에라이···. 기분이다!’
“스태프 여러분! 오늘 촬영 끝나면 제가 소고기 쏩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은 참석해주세요. 강제는 아닙니다.”
“우와!”
“하하···. 대표님. 소고기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인마! 우리 대표님 재벌이신 거 모르냐? 요즘 소설하고 웹툰으로 엄청나게 버신다는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거 초반 부분이 되게 흥미로운데요.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근력 운동을 끝내고 슈퍼쉘터 주위를 조깅하면서 산을 내려가지 않습니까? 자신의 농경지를 대신 소작해주는 할아버지랑 인사하면서 말이죠. 이게 뭐랄까···. 되게 색달라요. 처음부터 몰입이 확 된달까···.”
촬영감독이 작품이 잘 나올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아···. 이게 바로 웹소설식 초반 전개입니다. 웹소설은 편당 연재기 때문에 초반이 재미없으면 뒤는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일반소설과 다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충격을 줘야죠.”
“오호···. 그렇군요. 그래서 살짝 쌀쌀한데도 주빈 씨의 웃통을 벗기고 조깅을 시키시는 겁니까?”
“하하···. 뭐. 아니라고 할 순 없습니다. 의도가 있긴 있습니다.”
“대표님. 의도가 불순하시네요. 오늘 회식 때 저와 스태프들이 대표님의 지갑을 대신 벗기겠습니다. 아무래도 소 한 마리로는 안 될 거 같은데요?”
정주빈이 대화에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더 화기애애해졌다.
이런 모습을 보니 하루빨리 드라마가 공개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