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시작 (2)
“왜 그래?”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시후 녀석의 멱살을 잡을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솔직히 김시후가 쓴 작품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게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갔다. 나는 시놉시스도 보지 않은 채 대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당장 관둬라. 이건 안 돼.”
김시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읽어 보지도 않고?”
“안 봐도 알 수 있어.”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관심법이라도 쓰는 거야?”
“크흠···. 그게 아니라 일단 제목부터 마음에 안 들어.”
시후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그래도 시놉시스라도 좀 읽어 보지?”
“흐음···.”
나는 어쩔 수 없이 시놉시스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
[#장르: 신춘문예 등단 작가 출신 매니저와 연기를 꿈꾸는 신인 걸그룹 멤버의 리얼 멜로 드라마]
신춘문예 등단 작가 이시하!
글만 써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주변 등단 작가들을 둘러봐도 전부 겸업이고 전업 작가는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암울한 상황!
그는 하는 수 없이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로드 매니저로 취직을 한다. 그는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바로 핑크로즈의 혜주!
“매니저 오빠. 우리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럼···. 물론이지.”
“모든 사람이 오빠처럼 생각해 주면 좋겠다.”
“곧 그렇게 될 거야.”
“고마워. 오빠는 끝까지 우리 곁에 있을 거지?”
“······.”
“나도 저렇게 연기를 하고 싶어. 내가 어떻게든 팀을 살리고 싶어.”
혜주는 TV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줄게.’
이시하는 그렇게 잠을 줄여 가며 드라마 공모전을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기획 의도: 두 젊은이의 풋풋한 사랑과 엇갈린 인연 그리고 성공]
······ <중략>
[#드라마의 포인트]
어려운 문학계의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열혈 청년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노력과 무시무시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겨우겨우 데뷔에 성공한, 마음이 닫힌 소녀 혜주.
그녀를 위해 내 모든 능력을 바치겠어. 널 꼭 스타로 만들어 줄게! <중략>
* * *
나는 시놉시스를 쭉 훑어보고 인상을 한번 구긴 후 1화를 대충 쓱쓱 넘겨 보았다.
“후우···.”
내가 한숨을 내쉬자 시후가 내 눈치를 살살 보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내 이야기는 아니구만. 그래도 약간 차용한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신춘문예 출신이라 그런지 역시 문장 하나는 끝내주네.’
“왜 그래. 별로야? 너무 올드한 스타일로 썼나?”
나는 1화 대본을 덮고 김시후를 노려보았다.
“이거 큰일 낼 놈이네. 네 녀석 망상을 이렇게 프리하게 써도 되냐?”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망상이라니?”
“네가 로드 매니저고 여주인공이 블랙소울의 혜수 아니냐고?”
“······.”
“너무 사적인 욕망을 싸질러 놨어. 캐스팅 1순위가 혜수 씨지?”
“마, 맞아.”
“얼씨구? 아예 로드 매니저 역할까지 하지 그러셔?”
“그건 약간 무리가 있지. 내가 연기를 배우는 것도 시간이 좀 걸릴 거고···.”
이 미친···. 진짜로 생각해 본 거 같은데?
“혜수 씨가 그렇게 좋냐?”
“그걸 너한테 꼭 말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 하지 마라. 짜증 나니까.”
“그건 됐고···. 대본은 어땠어? 솔직하게 말해 봐.”
“충격받지 말고 잘 들어. 글은 잘 썼는데 너무 애매해. 소재가 한물갔어. 언제 적 매니저와 배우의 사랑놀음이냐? 이건 80~90년대나 통했지. 요즘은 현실적인 소재가 먹혀.”
“······.”
“그리고 이런 걸 만약 웹소설로 쓰잖아? 그냥 폭망이야. 연중 각이라고!”
“폭망까지야···.”
솔직히 말하면 꽤 괜찮은 작품이었다. 확실히 대사도 통통 튀고 호흡도 적절했다. 하지만 이 이것은 세상에 나오면 절대 안 되는 비운의 작품이었다. 누가 봐도 나와 나유정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거 아닌가!
‘안 돼! 안 된다고!’
“그리고 이 작품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어.”
“치명적인 문제점?”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엄숙하게 말을 했다.
“그래. 솔직히 사람들이 이걸 보고 뭘 떠올릴까? 너 이거 내 이야기를 좀 차용한 거 아냐?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그, 그 정도가 무슨 차용이야. 그냥 매니저가 작가라는 것만 가져온 건데?”
“노노···.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더 심각한 문제는 여주인공한테 매력이 안 느껴져. 너무 틀에 박히고 고전적인 여인상이라고! 요즘 누가 이런 수동적인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겠냐? 적극적인 역할 몰라? 그래야 그걸 연기한 혜수 씨도 덕을 볼 거 아냐?”
“···그, 그렇구나. 네 작품도 항상 여주인공이 적극적이었는데···. 내가 혜수 씨를 생각 못 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줘야 하는데 깜빡했어.”
역시 사람은 약점을 송곳으로 푹푹 찔러 줘야 의견을 바꾸는 법이었다.
“당연하지 인마···. 너만 좋자고 그러면 연애도 잘 안 되는 거야. 무슨 소린 줄 알지?”
“흠···. 그럼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스토리를 좀 바꾸면 되지.”
“어떻게?”
“뭐 예를 들면 말이지. 최근에 크게 히트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륙 같은 거 보면 북한군 장교와 남한의 재벌집 딸이 사랑하잖아?”
난 일부러 시후에게 히트한 드라마의 공식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럼 북한에서 내려온 남파 간첩이 매니저를 한다는 설정 어때?”
한참 유도 신문을 한 끝에 내가 원하는 스토리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 하지만 뭔가 살짝 부족한데···. 아직 혜수 씨가 빛나지 않는다고!”
“제길···.”
“더 생각해 봐···. 넌 할 수 있어! 혜수 씨를 더 매력적으로!”
“성별을 바꿔 볼까?”
“오!! 시후야. 아주 좋은 생각이야.”
“남파 여간첩인데 수뇌부가 모종의 일로 붕괴하고 붕 떠 버리는 거지. 그래서 지원이 끊긴 주인공이 위장된 신분으로 남한에서 어렵게 살아가다가 우연히 그녀의 뛰어난 무술 실력을 알아본 기획사 실장에게 뽑혀서 젊은 톱스타의 매니저로 들어가는 거야! 그러다가 뭔가 중요한 국가 간의 음모에 휘말리면서 피어나는 로맨스, 액션, 스릴러, 코믹···.”
“그, 그만! 이제 됐어. 더 하면 스포일러야. 그걸 쓰면 될 거 같다. 혜수 씨의 캐릭터가 아주 잘 빠졌어.”
‘젠장···. 장단 맞춰 주기도 힘드네. 그래도 이렇게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인가 뭔가를 없애 버려서 기분은 좋군. 어우. 속 시원하다!’
그야말로 잔머리의 승리였다. 만약 시후가 처음에 써 왔던 걸 고집했다면 정말 곤란했을 것이다.
그는 스토리를 생각하는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시후야. 그만 고민해라.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오후에 J&J 스토리 작가들 모인다고 하니까 보고 가라. 저녁에 시간 되면 회식도 좀 참석하든가.”
* * *
시후와 식사를 한 뒤 작가 모임을 하러 회의실로 들어왔다.
나와 케이 그리고 김시후가 회의실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 신인 작가 두 명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요즘 분위기 좋으시다면서요? 탠디짱 님은 달동네 전환 5천 나오셨고. 레니하르 님도 유료전환에 성공해서 꽤 좋은 성적으로 안정적으로 쓰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운도 좋았고 감평을 잘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 괴작판독기의 감평이 정확하긴 하지만 작가님이 잘 쓰시는 거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케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역시 S급 감평사였다. 아무리 싹수가 보였다지만 몇 번의 지적질로 바로 준수하게 유료화를 성공시키다니···.
그렇게 우리가 잡담하는 사이 누군가 소리 없이 회의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블랙진에 블랙 후드티를 입고 후드를 머리에 쓴 청년이었다.
“문 선생 님! 이리 오세요. 인사하세요. 카오스에서 현판 육아물을 쓰고 계신 문 선생 작가님입니다.”
나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준형입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문 선생이라고 합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별말은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뭔가 귀여운 인상이랄까?
‘애인도 없는 것 같은데 육아물이라니···. 있던 애도 부모한테 대신 맡길 거 같은데···. 역시 웹소설은 알 수가 없군.’
그리고 그 후로 몇 명이 함께 우르르 들어왔다. 아무래도 점심에 같이 만나서 식사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모임을 시작해도 될 듯싶었다. 내가 신호를 주자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좌중을 집중시켰다.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작곡가이자 감평러인 괴작판독기 케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와! 잘생겼다. 연예인이다!”
케이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이 자리를 빌어 평소에 까칠하게 감평을 했던 점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피드백 때문에 여기 들어온 건데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계속해서 작가님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분이 바로 회사 대표이신 이준형 작가님입니다. 필명은 연쇄폭참마, 쭌쩡 두 개고 앞으로 복지와 회식을 담당하실 분이시죠. 최근작은 우리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천마의 외동딸이 되었습니다’가 있습니다.”
“우와···. 갓작가!”
“사기꾼!”
케이가 내 소개를 하자 작가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분이 J&J 스토리의 초대 작가이신 김시후 님입니다. 참고로 김시후 님은 신춘문예 등단 작가로 현재 드라마를 집필하고 계십니다.”
“오오···. 신춘문예!”
시후는 보통 때와 같은 얼굴로 좌중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시후입니다. 반갑습니다. 신춘문예 출신이긴 한데 오늘 이준형 대표에게 드라마 대본을 보여 줬다가 아주 대차게 까였습니다.”
“하하하···.”
그 후로 아까 인사를 나누었던 문 선생과 카오스에서 오랫동안 무협을 쓰고 있는 이신 작가, 그리고 달동네와 나이스에서 현판을 쓰고 있는 백정민 작가의 소개가 이어졌다.
“혹시 카오스에서 환생검왕을 쓰고 계신···.”
“아···. 맞습니다. 그게 제 작품이죠.”
키가 큰 청년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작품에서 하도 등장인물들을 죽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킬신이었지만 무척이나 온화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백정민 작가는 노래 부르는 발골전문가라는 섬뜩하고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고기, 음식 전문가물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이 나와 괴작판독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라니···. 살짝 감개무량했다. 매일 혼자 글을 쓰고 즐거워했다가 자괴감에 빠지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든든한 아군들이 생긴 셈이었다.
끼익···.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한 인물이 문을 열고 껄렁껄렁한 걸음걸이로 회의실로 들어왔다. 비싸 보이는 파카에 신창원 티셔츠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상의를 입고 있는 아재였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더니 갑자기 휴대전화 두 대와 차 키를 떡하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거 죄송합니다. 갑자기 쟁(爭)이 벌어져서 좀 늦었습니다. 아···. 마···. 전화가 또···.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그는 화려하게 번뜩이는 금반지를 잔뜩 낀 손으로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고 있는 휴대전화를 받아들었다.
“뭐라카노? 쟁이 났는데 쳐자빠지 잤다는기 말이 되는 소리가? 뭐라 쳐씨부리 쌌노?”
갑자기 터져 나오는 강력한 부산 사투리 샤우팅에 회의실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
“하이고···. 마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좀 험했죠? 제가 흥분을 하면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와서···.”
“아하하···. 이분은 달동네에서 느와르 재벌물을 쓰고 계신 허귀랑 작가님입니다.”
케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끼어들었다.
“다들 혈통 모바일 아시죠? 허귀랑 작가님은 거기 성주님이십니다.”
“오! 대박!”
그는 평소에는 유순한 남자인 것 같았는데 게임을 할 때는 상남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웹툰을 맡아 줄 최영규 작가도 회의실에 도착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자 깜짝 놀란 듯하더니 구석으로 가 조용하게 의자에 앉았다.
“방금 들어오신 분은 제 천외딸을 웹툰화해 주실 실력 있는 작가님이십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최영규라고 합니다.”
이제야 J&J 스토리의 멤버들이 거의 모인 것 같았다. 드라마 작가부터 웹소설, 웹툰 작가들까지···. 이렇게 보니 꽤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내가 부른 한 명이 안 보이지?
상념에 빠져 있는데 케이가 나름 상황을 정리하려는지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다들 모이신 것 같은데 제가 한 말씀 드리겠···.”
똑똑···.
또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화려하기 그지없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 사람을 보자 다들 일순간 얼음이 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사뿐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와 작가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촬영 때문에 좀 늦었습니다. 배우이자 웹소설 작가인 윤하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는 바로 천만 영화 이후 일약 스타덤에 오른 대세 배우 윤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