쭌쩡의 비밀 (3)
“작가님과 정주빈 씨 이슈로 방송을 홍보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괜찮은 거겠죠?”
“주빈 씨와는 이야기가 된 거라 상관없습니다. 소속사에서도 워낙 방송 출연을 안 하려고 해서 고민이 많았다고 고마워하더군요.”
“솔직히 너무 가리긴 했죠.”
“주빈 씨의 유쾌한 면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좋은 분이에요.”
“기대하겠습니다. 작가님. 그리고 고맙습니다.”
“뭘요. 다 우리 애들 잘되라고 하는 건데요.”
나와 박 PD는 유쾌하게 통화를 하며 의견을 나눴다. 그는 상당히 나와 잘 맞으면서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12월 31일
아우라는 MBS 가요축제 초반에 1분가량의 공연을 마치고 곧바로 강원도로 출발했다. 신인이기도 하고 팀원 대다수가 미성년자라 방송국에 양해를 구하고 일찍 나올 수 있었다.
“얘들아 수고했다. 연말 시상식 정신없지?”
“그래도 너무 재미있어요. 좋아하던 선배님들도 계시고···. 와! 그나저나 차에 카메라가 진짜 많네요?”
그래도 예원이가 제일 막내라고 아직 체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멤버들은 연말 방송이다 공연이다 해서 잠을 못 자고 연일 강행군을 펼쳐서 그런지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지금부터 너희 이름을 걸고 하는 리얼리티 촬영이야. 그렇다고 긴장하지는 마라. 그냥 평소에 하는 것처럼 해.”
“네!”
강원도로 향하는 초반에는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텐션을 유지하는가 싶더니 이내 곧바로 곯아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녀석들. 피곤한 모양이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강원도 정선의 간이(?) 벙커
“얘들아 일어나. 다 왔다. 들어가서 자자.”
멤버들이 비몽사몽인 상태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보니 나유정과 정주빈이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서 오세요.”
“주빈 씨.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갑자기 손님들이 북적대니 기분이 좋네요. 그나저나 집이 좀 좁아서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집처럼 편하게 쉬려고 온 것도 아니고 엄연히 방송인데요.”
정주빈은 예전 모습처럼 등장하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은 너무나 말끔해진 모습이라 약간 아쉬웠다.
“유정 씨 언제 왔어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그녀는 편안한 옷에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한 상태였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것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유정 씨도 수고했어요. 이제 안으로 들어가시죠.”
정주빈의 집은 방송국 제작진이 촬영 준비를 해서 그런지 예전의 살풍경한 모습이 아니었다. 집 안에는 잘 곳도 마련해두고 인테리어도 약간씩 해 놓은 것 같았다.
“집이 좁아서 3명은 1층, 3명은 지하에서 자야 할 것 같습니다.”
정주빈이 머쓱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주빈 씨가 왜 나를 쳐다보지? 어? 서, 설마···.’
내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자 정주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집 안에 여섯 명의 자리가 있으니 저희는 마당에 설치된 텐트에서 자야 합니다.”
뜨악!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
잠시만? 내 리얼리티 쇼가 아니잖아!
“저기요. 주빈 씨 뭔가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이건 저를 위한 방송이 아닙니다. 우리 아우라가···.”
“준형 씨! 설마 지금 피곤한 애들을 바깥에서 자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우우~~ 대표님 너무하다!”
유정 씨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있었고 아우라 멤버들이 유정 씨 뒤에서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담희는 유정 씨 옆에 찰싹 달라붙어 엄지를 땅바닥으로 내리꽂는 게 아닌가!
‘저, 저게···.’
여자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쫓겨나 버렸다.
“텐트도 나름 괜찮습니다. 그라운드 매트도 잘 깔아놨고 난로에 전기매트도 있어서 집안이 부럽지 않아요.”
정주빈이 아주 즐겁다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미간이 팍 구겨지며 헤드록을 걸고 싶었지만 흔쾌히 촬영을 허락해준 게 고마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으시죠?”
“아···. 네. 뭐···.”
‘큰일이네.’
나는 잠자리가 바뀌면 쉽사리 잠을 자질 못하는 그런 타입이었다. 특히나 겨울에 텐트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분위기에서 집안을 고수하면 그야말로 쪼잔한 남자가 될 것 같았다.
“작가님. 인터뷰 좀 하실까요? 피곤하시겠지만 홍보 영상이 급해서요. 제가 이미 지하에 자리까지 마련해 놓았습니다. 분위기가 좋더군요.”
갑자기 박 PD가 앞으로 나오더니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아···. 그럴까요? 아무래도 이슈가 있을 때 홍보를 하는 게 맞겠죠.”
그렇게 나는 유정 씨와 함께 어색하게 카메라 앞에 섰다. 지하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포근한 분위기였다. 주빈 씨가 임세아 씨와의 사진들은 미리 정리해 놓은 것 같았다.
“PD님 저 녀석들 저렇게 앞에 관객처럼 있어도 됩니까?”
나는 앞에 앉아있는 아우라 멤버들을 가리켰다.
“대표님. 조용히 구경만 할게요. 저도 그거 읽고 있거든요. 천외딸요.”
“뭐? 담희 너도 보고 있다고?”
“그럼요. 기사가 그렇게 났는데 궁금하잖아요.”
난감했다. 이렇게 점점 보는 사람이 늘어나다니···. 뭔가 옷을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이랄까?
“준형 씨 괜찮아요?”
나는 옆에 있는 유정 씨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닌가?
제발 적당히 해주세요. 유정 님!
촬영이 시작되고 박 PD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최근 이슈가 된 웹소설을 두 분이 쓰신 게 맞습니까?]
내가 눈치를 살짝 살피자 유정 씨가 나 대신 입을 열었다.
“팩트만 말씀드리자면 글은 전부 준형 씨가 썼고 저는 여주인공 심리에 대해서 조언해줬을 뿐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여자라고 착각을 한 거군요?]
“네. 유정 씨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여자라고 착각하셨을 겁니다. 대배우시라 감정 표현이 너무 좋아서 그게 고스란히 글에 묻어난 거고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구요. 어쨌건 초반에는 고칠 게 많았는데 나중에는 알아서 잘 쓰시더라구요.”
그녀는 내 칭찬을 듣더니 내 팔을 가볍게 때렸다.
[그럼 필명은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말이 많던데요?]
“원래 연두폭참마라고···. 유정 씨의 연두색 추리닝과 제 필명을 합친···. 억···.”
갑자기 터진 크리트컬 엘보우 공격에 옆구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그게 아니라 여러 가지 필명 후보가 있었는데요. 그냥 단순하게 이준형의 ‘준’, 나유정의 ‘정’을 합쳐서 귀엽게 만든 게 어감이 좋아 선택된 거예요.”
[어쨌거나 합작해서 만든 거군요. 보기 좋습니다. 항간에는 두 분이 사귀신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음···. 워낙 기사로 언급이 많이 되다 보니 그렇게 알고 계시는 분도 많은데요. 사실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 사업 파트너입니다.”
우우우!!
갑자기 아우라 멤버들에게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사겨라! 사겨라!”
“결혼해! 결혼해!”
시끄럽다. 이 녀석들아. 난감하게 그럴 거냐?
내가 이거 괜찮냐고 손짓을 하니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박 PD였다. 오케이라는 뜻이었다.
“그건 준형 씨 말이 맞아요. 저희는 사업 파트너가 맞습니다. 아직까지는요.”
[뭔가 의미심장한 멘트군요.]
“서로의 존재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울메이트라는 말이 있는데 꼭 그런 느낌이랄까요?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소울메이트,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존재라···.
나는 유정 씨가 하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며 울컥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타이밍이 늦어버린 거 같은데···.
[그럼 지금 이런 관계가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글쎄요. 지금까지는 이게 전부고 그 이상은 시청자님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저 거짓말 못 하는 거 아시죠?”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싶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대표님! 유리 언니 울어요.”
“정유리! 너 왜 우는데?”
“저도 몰라요. 그냥 눈물이 나요.”
유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정유리···. 우리의 모습을 초반부터 지켜보던 녀석이다. 테리우스 일본 팬 미팅 중 무대에서 떨어지는 유정 씨를 구하며 등과 머리를 다쳤을 때도 걱정을 많이 해줬었지.
이 정도면 해명이 되었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더 이상 신경 쓸 일은 아닌 거 같았다. 어쨌거나 완결된 소설이었으니까.
* * *
“이렇게 누군가와 같이 자는 게 오랜만이군요.”
나는 정주빈과 함께 나란히 침낭에 누워 텐트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되게 이상한 말인 거 아십니까? 살짝 짜증 나려고 합니다.”
“후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편하게 생각하세요. 이런 맛에 캠핑하는 거죠.”
“음···. 저는 이만 자겠습니다. 내일 등산도 한다면서요. 그럼 얼른 자야죠.”
“내일 재미있겠네요.”
재미는 쩝···. 괜히 나온다고 한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난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잠이 들었나?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버, 벌써 아침인가···. 으으윽···. 어이구 삭신이야.’
역시 너무나 민감한 몸뚱이였다. 훈련소에 입대했을 때 정말 한숨도 못 잤었는데 딱 그 꼴이었다. 거대한 망치로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일어나보니 아침은 예원이가 일찍 일어나서 가볍게 토스트를 한 것 같았다.
“어? 이거 그 맛이네? 시중에서 파는 그거···. 아삭···.”
“맞아요. 저 거기서 일 도와드렸거든요.”
“와! 꿀맛이다. 이거 만드는 거 찍었어?”
“네. 제작팀에서 일찍 일어나셨더라고요.”
“고생이 많네. 예쁘게 찍어달라고 해.”
“알았어요. 그런데 대표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왜? 이상하니?”
“얼굴이 부으신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어. 잠을 잘 못 잤거든. 난 어차피 버린 몸이니 상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
내가 영상을 챙겼어야 하는데 잠을 못 자고 뒤척이는 바람에 망해 버린 것이다. 예원이가 요리하는 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이라 힐링 음식 영화 감성으로 찍어야 하는데···. 왠지 다큐멘터리처럼 찍었을 것 같았다.
‘괜찮아. 저녁도 있잖아. 그때 실력을 발휘하면 되지.’
일행은 아침을 간단히 먹고 마당에 집합했다. 마당에 나유정과 아우라가 모여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네미시스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유정 씨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요?”
“준형 씨. 왜 거기 서 계세요? 본인이 무슨 교관인 줄 아시는데 주빈 씨에게 자리를 양보하시고 얼른 우리 쪽으로 오셔야죠?”
정주빈은 좌중을 둘러보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일일 캠핑 도우미를 맡은 배우 정주빈입니다.”
“와! 멋지다.” “잘생기셨어요.”
그는 일행의 열광적인 반응에도 담담한 미소만 보내고 있었다.
‘역시 모태 미남은 행동에 여유가 넘치는군. 저건 배워야 해.’
“... 금일 뒷산인 백운산을 등반할 예정으로 총 산행 거리는 6km 정도 되고 소요 시간은 쉬는 시간 포함 약 4시간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꼴찌는 오늘 온종일 설거지 담당이 되니 이 점 명심해 주세요.”
‘절대 꼴찌를 하면 안되겠구만.’
정주빈의 브리핑으로 일과가 시작됐다. 아우라는 협찬받은 화려한 등산복을 입고 등반 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외출이라 그런지 리액션이 좋은 아우라 멤버들이었다. 카메라를 보고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신들!
‘하하···. 아주 잘하고 있다. 얘들아.’
그렇게 일행을 점검하면서 걷던 주빈 씨가 갑자기 스퍼트를 내기 시작하자 일행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20분 후
‘헉헉···. 아니! 왜 이렇게 초반부터 가파른 거야? 미치겠네.’
햇빛 때문에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체력을 많이 써야 하는 난코스라 그런지 힘이 쭉쭉 빠지고 있었다.
“어?”
“준형 씨. 저 먼저 갈게요. 열심히 따라오세요. 킥킥···.”
유정 씨가 손을 흔들며 내 앞을 쭉쭉 치고 나갔다.
“어윽···. 아, 안돼!”
일행들이 하나둘씩 나를 지나쳐가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내 체력이 이렇게 떨어져 있을 줄이야. 갑상선 항진증 환자였던 담희와 지옥의 배틀을 펼치고 있었다. 중간에 쉬지도 않고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거품을 물고 쫓고 쫓기는 진땀 나는 승부를 연출했다.
하지만 컨디션 난조 덕분에 결국 지고 말았다.
“대표님. 꼴찌 확정!”
“하하하···.”
결국, 설거지 담당은 내가 되고 말았다.
“허억허억···. 내가 이, 일부러 져 준 거야. 어제 텐트에서 자느라 컨디션이 최악이었고···.”
“네에···. 아무렴요. 그렇고 말고요.”
나유정은 불타는 고구마가 된 내 얼굴을 보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킥킥···.”
‘제길!!’
난 역시 방송에 나오면 안 되는 체질이었다. 방송 출연 = 흑역사라는 공식이 만들어질 지경이었다.
“준형 씨. 괜찮습니다. 일반인치고는 꽤 빨랐어요. 아마 아우라 맴버들은 오랫동안 춤을 춰서 심폐 지구력이 상당할 거예요.”
주빈 씨가 웃으며 나를 달래줬지만,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잠시 쉬었다가 주빈 씨 집 뒤편 사유지 캠프장에서 촬영이 재개되었다. 좌충우돌 텐트 치기를 시작으로 각자 요리를 해서 점심을 해 먹는 코너가 이어졌다.
나는 회심의 역작으로 가져온 부대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사전에 공지된 대로 만 원 이하의 메뉴를 가져오는 것이었는데 집 앞 반찬가게에서 사 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스팸마요 덮밥, 콘치즈, 어묵탕, 라면, 꿀호떡, 군만두 등 각자 간단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것을 가져와 각자 재미있게 요리를 했다.
요리가 종료되고 각자 음식을 먹으려는데 제작진의 청천벽력과 같은 지시가 떨어졌다. 알고보니 랜덤으로 번호를 뽑아 해당 요리를 바꿔 먹는 코너였던 것이다.
“앗싸! 부대찌개! 나이스!!”
담희가 내 부대찌개를 획득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차례가 되자 뽑은 번호를 보고 순간적으로 욕을 날릴뻔했다. 하필 뽑은 메뉴가 다 타버린 군만두였다.
“큭···. 이거 누구냐? 군만두를 만들어야지 누가 숯덩어리를 만들래?”
“죄, 죄송해요. 대표님. 화장실에 갔다가 그만···.”
리리 너였냐. 흑마법사라 다 시커멓게 태워버린 거야? 엉?
나는 어제부터 극한의 고통을 받는 중이었다. 한겨울에 외부취침, 지옥의 등반 레이스, 탄 음식 먹기, 마지막으로 설거지까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남자가 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나유정과 아우라가 누렁이와 노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누렁이 녀석도 좋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개 팔자가 상팔자네.’
30분 넘게 설거지를 하고 커피 믹스를 한 잔 타서 캠핑용 의자에 앉았다.
“하아···.”
그냥 한숨만 나오고 있었고 그 처량한 모습을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
“힘드시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태프가 내가 불쌍한지 짧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계시니 더 힘드실 텐데요.”
그는 내 말을 듣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도 한 가정의 가장이겠지 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캠프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
“여보세요? 조 대리님이 휴일에 어쩐 일이세요. 정초에는 집에서 그냥 푹 쉬신다면서요.”
[대표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뭐가 중요한데요?”
[혹시 헬게이트(Hellgate)라고 아세요?]
“헬게이트요?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여기가 헬게이트인데요?”
[네? 그게 무슨···.]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유명한 메탈밴드인 헬게이트 모르세요?]
“아···. 그 헬게이트요?”
헬게이트(Hellgate)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뉴메탈 밴드였다. 많은 뉴메탈 밴드가 빠르게 쇠퇴해버렸지만 아직까지 버티면서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인기 밴드였다.
마스크를 쓰고 나와서 괴기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헤비메탈 밴드였다. 예전에 가끔 들었었는데 지금은 아이돌 음악만 들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게 사실이다.
[아세요?]
“네. 압니다. 제가 소싯적에 록이나 메탈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왜요?”
[거기 리더인 보컬 존리가 미튜브에 나와서 우리 아우라를 극찬했어요. 컨셉이 미쳤고 노래도 미쳤고, 안무, 의상, 가창력 할 것 없이 모두 완벽하다고요.]
“험험···. 뭐 지극히 당연한 소리만 했네요.”
[대표님! 헬게이트라고요! 빌보드 1위 앨범을 몇 장이나 가지고 있는!]
“크흠···. 히트 작가인 저와 세계 정상급의 프로듀서인 케이가 만든 그룹입니다. 그 정도 칭찬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어쨌건 유명한 사람이 내가 만든 그룹을 좋아한다는 건 기쁜 일이니까.
“그게 보고할 사항이에요?”
[아! 마지막까지 들어보셔야죠. 헬게이트의 존리가 같이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직접 미튜브에서요!]
“네? 진짜요?”
[그리고 곧 내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어요.]
“오!! 거기 게스트로 나가면 되겠네요. 헬게이트라면 유럽과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 밴드잖아요. 그쪽에 홍보가 톡톡히 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