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케이스 (1)
웅성웅성···.
[팍스 코리아나 악수홀]
주로 아이돌 행사가 열리는 이곳에서 ‘아우라’의 쇼케이스와 ‘나만 아는 세계멸망’의 대본 리딩이 연달아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안녕하세요. 김 기자님. 어서 오세요.”
나는 홀 앞에서 자주 보던 ‘투데이연예’의 김 기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이 작가님, 아니 이 대표님께서 직접 이렇게 나와 계시다니요?”
“하하···. 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도리죠. 저희를 그렇게 도와주셨는데요.”
‘투데이연예’의 김 기자는 항상 좋은 기사를 써 주는 편이라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뭘요. 제가 작가님 팬인 거 아시죠? 이번 작품 기대가 아주 큽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저희 아우라가 정말 대박입니다. 여기 오신 걸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나중에 무대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오호···. 오늘 뭔가 있군요? 그런데 어쩌죠? 전 사실 정주빈 씨 취재하러 온 건데요?”
“정주빈 씨도 취재하고 아우라의 공연도 보고 좋지 않습니까? 이런 게 뭡니까? 꿩 먹고 알 먹는 거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하하···. 역시 우리 이 작가님은 위트가 넘치셔.”
“아까 주빈 씨 홀로 들어가는 거 찍으셨어요?”
“당연히 찍었죠. 그거 놓치면 저 잘립니다.”
“하하···. 그럼 일단 음료수 드시면서 준비하고 계세요. 30분 후면 쇼케이스가 시작할 테니까요.”
그렇게 김 기자가 홀로 들어가고···.
“아이고···. 이 기자님.”
그렇게 홀 앞에 서서 한참을 기자들과 수다를 떨면서 홀 안쪽을 바라보았다.
‘후···. 다행이다. 완전 만석이네. 역시 주빈 씨의 힘이 대단하네. 아마 우리 쪽으로 온 기자가 SG보다는 두 배는 많을걸?’
쇼케이스와 대본 리딩을 같이하는 전략이 주요한 것 같았다.
‘아 참. 우리 애들도 체크해야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대 뒤 아우라가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들어가 보니 무선 마이크를 차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대표님이다. 안녕하세요.”
“그래. 준비 잘하고 있니?”
“아니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최연장자인 리리가 춤을 추기 편하게 제작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얼굴이 허옇게 떠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하아···. 누가 맏네 아니랄까 봐. 명색이 시체와 혼령을 다루는 네크로맨서인데 저리 소심해서야 원···.
뭐···. 상관없으려나? 드라마에서는 귀신과 시체를 무서워하는 네크로맨서라는 설정이었으니까.
“조 대리님. 청심환 어디에다 뒀어요? 리리는 약 좀 먹어야겠는데?”
대기실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어수선했다.
“대표님. 저 이거 머리 괜찮은 거예요?”
양 갈래머리를 한 예원이가 거울을 보면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무대 의상을 입은 예원이는 그야말로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예전으로 따진다면 고전 격투 게임의 ‘춘리’ 머리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아···. 아니다. 최근 게임인 던전앤파이어의 염제라는 캐릭터에 가까웠다. 의상도 딱 그런 느낌이었다. 게임의 캐릭터와 달리 노출이 최소화된 타이트한 의상이었다.
강체술을 읽힌 권사(拳士) 장예원으로 드라마에 등장할 예정으로 주 스킬은 마나를 이용한 격투술이었다. 가장 묵직하고 다이내믹했으며 화려한 액션을 선보여야 했다.
태권도 블랙 벨트인 예원이에게 맞춘 캐릭터라고 할까?
‘의상 디자인이 정말 예술이네. 너무 멋지다.’
의상 전담 요원으로 뽑은 김규빈 씨는 정말 미친 듯 작업을 해서 최고의 무대 의상을 만들어 냈다. 판타지와 현대의 느낌을 동시에 주는 복장으로 그것을 입고 댄스를 추더라도 위화감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
갑자기 정열적인 붉은색 계열의 위저드 의상을 입은 정유리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리야. 너 어디 아프니? 표정이 왜 그래?”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물 좀 그만 마셔.”
“목이 타는 걸 어떡해요.”
“잠깐만 참으시죠. 불 마법사님. 너무 타올라도 안 좋습니다.”
정유리는 드라마 설정상 화염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는 귀여운 스타일의 캐릭터였다. 정유리의 깜찍함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귀여운 액세서리를 가장 많이 달고 있었다. 하지만 멤버 중 가장 강력한 딜을 보유하고 있으며, 평소에는 귀엽다가도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광폭화를 하는 이중적인 캐릭터였다.
“다들 나만 쳐다보고 하면 될 거야. 내가 무대 경험이 엄청 많잖아.”
혼자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기만 따라오라는 담희가 보였다. 그녀는 전체적으로 회색이지만 하늘색이 포인트로 들어가 있는 의상을 입고 있었다.
담희의 캐릭터는 바람의 마법사로 주로 힐링 마법을 쓰며, 보조 공격 기술로 에어 버스터와 윈드 커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멤버 중 유일하게 플라이 마법과 바람을 이용해 제한적으로나마 하늘을 날 수 있는 캐릭터였다.
“담희야. 너만 잘하면 된다니까?”
“킥킥···.”
그리고 수다쟁이에 콧대가 높은 참견쟁이로 감초 같은 역할의 개그 캐릭터였다. 치료해 주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게 특기였다.
“야. 장예원. 방송의 방 자도 모르면서 웃지 마.”
“이거 방송 아니거든요? 쇼케이스거든요?”
“쇼케이스나 방송이나 그게 그거지. 너 아까부터 앉았다 일어났다 너무 부산하게 움직인다고!”
“사람이 큰일을 앞두고 긴장하는 게 당연하지.”
짝짝!
“자자···. 조용! 이제 무대가 얼마 안 남았으니 내가 한마디만 할게.”
나는 중앙에 서서 아이들을 쳐다보며 손뼉을 쳤다. 그러자 아우라 멤버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권사 장예원 (탱커)
불 마법사 정유리 (딜러)
얼음 마법사 이지령 (딜러)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리리 (서포터)
바람 마법사 담희 (힐러)
정말 캐릭터와 의상이 찰떡궁합이었다. 무슨 게임 캐릭터들이 눈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스타일리스트 김규빈.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해 주고 다시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잘해 줬다. 이제 세상에 선보이는 것만 남았네. 떨리니?”
“네!”
“너무 잘하겠다는 생각은 버려. 그냥 너희가 지금까지 연습한 것만 보여 준다고 생각해. 나는 그거면 된다.”
“실수해도 괜찮은 건가요?”
리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럼, 실수해도 괜찮아. 대신에 드라마 찍을 때 실수한 사람에게 흑역사 에피소드를 좀 많이 넣어 줄 거야. 너희들이 잘 모르지만 내가 더티 개그를 엄청 좋아하거든.”
“으윽···. 시, 실수하지 말라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요.”
“리리야. 농담이야. Easy···.”
“아···.”
“리리 언니는 너무 잘 속아서 문제야. 언니는 나중에 정산받으면 나한테 돈을 맡겨야 해. 사기당해서 돈을 홀랑 날릴 확률이 높다니까?”
“담희야. 진짜 너만 잘하면 돼.”
킥킥킥···.
“아! 왜요!”
“리더? 한마디 해 봐. 나는 이제 다 했어.”
나는 이지령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녀는 블랙 앤 화이트 로브 드레스를 입은 얼음 마법사로, 항상 딱딱한 유머 감각으로 주위를 얼리고 다니는 캐릭터였다.
나를 보고 있던 이지령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했다.
“얘들아.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실력을 보여 주자.”
그녀는 팔을 벌려 예원이부터 리리까지 차례로 안아 주었다. 모든 걸 포용하겠다는, 짧고 임팩트 있는 리더다운 행동이었다.
흐뭇해진 나는 긴장을 풀고 열의를 다지고 있는 아우라 멤버들을 뒤로한 채 무대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관객석에는 많은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눈빛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다.
“이 대표님. 이리 오세요. 여기요!”
앞에 마련된 좌석에서 김형탁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형. 오셨어요? 일찍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에 앉아 있는 배우들이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기타 조연 배우들과 이수현, 정혜성, 이건호, 이희진, 그리고 화제의 주인공 정주빈까지···.
“이런 건 일찍 와서 봐야지. 드라마를 많이 했는데 축하 공연을 보고 대본 리딩을 하는 건 처음이야.”
“축하 공연이라···. 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다. 공연도 보고 좋지. 뭐.”
김형탁은 어리숙해 보이면서도 속마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내가 이런 일을 벌여 부담을 느낄까 봐 미리 선수를 쳐 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언론에 나오는 공식 석상이 걸그룹 쇼케이스네요. 대표님이 책임지세요. 하하···.”
정주빈까지 나서서 농담을 하고 있었다.
“주빈 씨. 저번에 말씀드린 캠핑이요. 촬영할 수 있으신 거 맞죠?”
“아···. 그거요? 당연히 가능하죠. 스케줄이 되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역시 자연인! 캠핑 마니아다웠다. 이렇게 흔쾌히 수락해 주다니···.
쇼케이스 시간이 되자 무대에 불이 꺼졌다. 그리고 홀에 배경 음악이 깔리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시작이다. 재밌겠다.”
나는 김형탁의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캄캄한 무대에서 핀포인트 조명이 비추고 한 인영이 무대 뒤에서 정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조명이 밝아지자 배우들과 기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마이크와 큐 시트를 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들 알아본 것이다.
무대 뒤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바로 나유정!
“안녕하세요? 이번 쇼케이스 진행자를 맡게 된 배우 나유정입니다. 반갑습니다.”
“와아···.”
짝짝짝···.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마치 전문직 여성처럼 단정한 차림을 하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등장한 나유정으로 인해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그녀가 J&J의 이사라는 것을 깨닫고 이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유정 씨가 예전 테리우스 곡 선정 블라인드 테스트를 할 때 사회를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거의 아이돌 메이커 국민 MC 같은 모습이었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다행히 그녀는 한 번에 오케이했고 지금 이 자리에 진행자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신 기자님들,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른 곳으로 안 가시고 저희를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유정 씨의 인사에 기자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희가 살짝 머리를 썼는데 다 알고도 찾아오신 거죠? 너무 속 보였나요?”
하하···.
“오늘 제가 이 무대에 선 것은 저희 회사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아이돌을 선보이기 위함입니다.”
갑자기 무대가 어두워지며 벽에 붙은 거대한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J&J의 신인! 아우라(Aura)입니다. 영상을 함께 보시죠.”
진행이 살짝 어색하긴 했지만 처음 하는 것 치곤 괜찮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센터인 장예원의 화보가 떠올랐다.
“지금 보시는 멤버가 바로 장예원 양입니다. 현재 18세,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며 아우라에서 센터를 맡고 있습니다. 다음은···.”
나유정은 시간이 지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매끄러운 진행 솜씨를 선보이며 멤버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리리를 마지막으로 모든 멤버가 짧고 굵게 소개되었다.
“어떻습니까? 느껴지시나요? 멤버들이 참 예쁘죠? 미모는 뭐 거의 저랑 비슷하네요.”
하하하···.
“보여 드릴 게 많으니 시간 끌지 않겠습니다. 곧바로 데뷔곡 ‘Return’을 공개하도록 하죠.”
팟! 팟!
무대의 조명뿐만 아니라 관객석의 조명도 어두워졌고, 곧바로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좁은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안무를 맞추는 아우라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연습을 마치고 길거리로 나온 멤버들은 게릴라 콘서트를 해 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냉대와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힘들게 이어지는 싸구려 지방 행사···.
아우라는 그렇게 고물 승합차에 타고 피곤함에 지쳐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간은 새벽 1시.
끼이이익···.
고물 승합차가 갑자기 앞에 나타난 시커먼 소용돌이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웅성웅성···.
뜬금없는 영화와 같은 영상에 기자들과 배우들조차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이게 뭐지? 하는 표정.
[5일 후]
5일 후라는 자막이 뜨더니 갑자기 화면에 시커먼 소용돌이가 다시 나타났다. 장소는 도시의 외딴 골목길.
그 게이트 너머로 한 명의 회색 로브를 입은 인영이 느릿느릿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이었다. 로브 아래로 살짝 드러난 얼굴은 흡사 좀비를 보는 듯한 해골의 입 모양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도시의 불빛을 향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화려한 의상을 입은 다섯 명의 소녀가 게이트를 넘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원, 유리, 담희, 지령, 리리.
쇼케이스 참석자들은 악수홀에 나지막이 깔리는 음산한 일렉 기타의 백킹 사운드를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냥 뭐에 홀린 듯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웅우웅···.
묵직한 베이스음이 깔리며 다섯 명의 소녀가 골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 고시원이 빽빽이 밀집해 있는 곳.
아우라의 멤버들은 가로등 아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왔어.”
예원이가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했다.
카메라가 페이드 아웃이 되면서 다섯 명을 비추고, 멤버들의 몸에서 아지랑이와 같은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홀연히 하나의 글자가 나타났다.
[귀환소녀(歸還少女) coming soon!]
화면이 사라지며 장내에 강력한 기타 사운드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