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이름 짓기 (2)
“이세계에서 넘어온 리치를 잡는 걸그룹이요?”
“주인공인 걸그룹 멤버들이 이세계에서 지구로 귀환한 거야.”
“근데 리치를 왜 잡아요? 부자들하고 원수졌어요?”
하아···. 우리 고급물리학을 공부하시는 리더께서는 판타지를 읽어 본 적이 없으시구나.
“언니. 여기에서 리치란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사악한 마법사를 뜻해요. 대부분 몸이 언데드죠. 얼굴은 해골이고···.”
“어라? 담희야! 넌 알고 있구나?”
“히히···. 전 게임을 좋아해서···. 데뷔조 떨어지고 나서 온종일 게임만 했던 적도 있어요.”
아···. 소설은 아니구나. 그래도 이해하는 멤버가 있으니 다행이네.
“반지의 제왕 그런 거예요?”
“그건 완전히 정통 판타지고, 우리 드라마는 일종의 현대 판타지야.”
“현대 판타지요?”
“응. 현대가 배경이면 현대 판타지라고 불러.”
“그럼 우리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구요? 그럼 외계인이에요?”
“큭···. 외계인이 아니라, 지방에 행사하러 갔다가 일주일간 실종된 듣보잡 걸그룹이 리치를 잡기 위해 다시 지구로 귀환한 거지. 어딜 다녀왔냐면,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거야.”
“저승이라도 다녀온 건가···.”
“큭큭···.”
“리리 언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뜬금없이 저러더라.”
“저승이 아니라 어떤 다른 문명인데, 대부분 중세시대 같은 배경에 기사와 마법, 그리고 몬스터가 공존하는 세상이에요.”
“담희 말이 정확해. 그게 바로 판타지 월드야.”
“그래서요? 거기 다녀와서 어쨌는데요?”
“듣고 놀라지 마라. 지구 시간으로는 단 5일 동안 실종됐었지만, 그 걸그룹 멤버들은 자그마치 20년간을 다른 세상에서 살았어. 그래서 나이가 다들 30대지. 물론 지구로 오면서 다시 어려지긴 해.”
“악! 그럼 저는 40대잖아요.”
혼자 20대인 리리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언니. 포기해. 포기하면 편하다고. 40대 가즈아.”
“리리 언니, 괜찮아. 정신연령은 우리보다 훨씬 어리잖아. 안 그래?”
“김담희 엎드려. 빠따 한 번 맞자.”
“대표님! 리리 언니가 자꾸 야구 방망이로 때린대요.”
“리리야. 넌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어디서 그런 말 배웠어?”
“네? 아빠가 자주 농담처럼 쓰시는데요?”
“아버지가 뭐 하시는데?”
“프로야구 하나 파이어버드에서 코치로 일하세요.”
“응? 하나 파이어버드? 혹시 선출이시니?”
“네. 이재원이라고 아세요?”
“응? 혹시 빠던 이재원? 맞아?”
“맞아요. 그렇게 불리셨다고···.”
“와···. 이재원 선수가 아버지셨구나!”
그럼 리리는 야구를 잘 알겠는데? 잠깐···. 이거 미튜브에 써먹으면 되겠다. 야구 미소녀로···. 아···. 아닌가? 리리가 나이가 있는데 소녀는 아니지. 뭐 어쨌건 이건 좋은 소재다. 드라마 속 리리의 무기는 몽둥이로 해야겠다.
“언니, 나중에 우리 야구장 놀러 가자.”
“대전이라 좀 먼데···.”
“다들 조용! 나중에 야구장 놀러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금 우리 그룹명을 정하고 있거든? 옆길로 새지 말자!”
“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지?”
“5일 동안 실종됐는데 20년이 흘렀다?”
“오케이! 땡큐, 리더. 맞아. 너희들은 20년간 판타지 세계에서 마왕군과 개고생을 하면서 싸우다가 이세계로 도망친 사악한 리치를 쫓아 지구로 겨우 돌아온 거야. 블랙 드래곤의 10서클 마법으로 말이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이해는 돼요. 그래서요?”
“그래? 이해가 된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저희가 30대를 연기해야 한다구요?”
“음···. 설정상 그렇지 뭐. 듣보잡 걸그룹 활동을 할 때는 10대 연기를 해야 하고, 사람들 없는 숙소에서는 오징어를 씹으며 삼십 대 노처녀인 이모 같은 연기를 해야지. 남자 아이돌 이야기를 막 하고···.”
“대표님···. 그건 이미지에 안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예원아. 좀 이상하니?”
“이상한 게 아니라, 설정은 이해가 되는데요. 저희가 막 남자 아이돌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 게 그룹에 도움이 안 될 거 같아서요. 팬들의 환상을 깨잖아요.”
“흐음···. 그런가?”
역시 정상인 사람은 예원이뿐인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는데 다른 녀석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거 같다.
“어쨌거나 그런 스토리야. 사악한 리치가 인간 세상에 숨어들면서 세상에 서서히 변고가 일어나는데···. 너희들이 그걸 파헤치는 스토리랄까? 뭐 그런 거지.”
“대표님 저요! 저요! 질문이요.”
“그래. 담희야. 해 봐라. 그런데 제발 농담 좀 그만하고···.”
“농담은 아니구요. 아까 대표님께서 걸그룹 멤버들이 판타지 월드에서 마왕군하고 싸웠다고 했는데, 그 정도라면 스킬이 엄청 화려할 것 같은데요. 귀환한 후 스킬을 CG 영상으로 구현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누가 겜순이 아니랄까 봐···. 별걸 다 아네.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지구에 마나가 부족해서 고위 마법은 못 쓴다는 설정이니까. CG를 과도하게 넣으려면 돈이 많이 들어.”
“아아···. 그런 식이구나. 이해했어요.”
“재밌겠다. 그래서 나 이사님이 그렇게 연기 연습을 시키셨구나.”
“당연하지. 이 녀석들아. 나는 쓸데없는 일은 안 시킨다니까? 연습생을 너희 딱 5명만 뽑고 바로 데뷔시키는 거 보면 모르겠어?”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래! 알면 됐다.”
리더가 빠른 상황 판단으로 나를 흡족하게 했다.
“자! 이런 컨셉을 잘 생각하고 그룹명을 생각해 봐. 예원아, 혹시 생각나는 거 있니? 네가 아까 말하는 거 보면 왠지 좋은 이름이 나올 거 같은데?”
“음···. 처음에는 오리온이나 오로라 같은 걸 생각했어요.”
“장예원! 무슨 오로라 왕자, 오로나민D도 아니고 오로라가 뭐야!”
“예전에 오로라라는 트로트 그룹이 있었을걸?”
“그, 그럼 오리온은 좀 괜찮지 않아?”
“자! 조용히 좀 해 봐. 오리온이랑 오로라 나왔다. 둘 다 정상적이고 괜찮은 그룹명이야. 그런데 약간 임팩트가 부족하긴 하지. 장예원! 좋은 의견이었어.”
“잠시만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 보세요. 전 분명히 어제까지 그런 걸 생각했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이미지를 보고 다른 게 떠올랐어요.”
“뭔데?”
“리턴걸즈나 귀환걸즈 어때요?”
“음···.”
뭔가 직관적인 것 같은데, 걸그룹 이름으로는 너무 이질적인 느낌이다. 이걸 음악 방송 같은 데서 써먹자니 그룹명을 설명할 때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기 힘들 것 같았다. 대놓고 다른 세계에 갔다 왔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아니면 프롬걸즈···.”
“장예원! 그건 안 돼. 프롬 들어간 비슷한 걸그룹이 있잖아.”
“그, 그래. 일단 다 적어 놓고 다시 생각해 보자. 좋은 의견이야. 다른 의견은 없니? 리리야. 네가 마지막이다. 생각한 거 있어?”
리리는 조심히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미지를 보기 전엔 안드로메다 같은 걸 생각했었어요.”
‘아, 안드로메다?’
“언니. 그건 안 돼요.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관광 보냈니? 막 이러면서 놀리잖아요.”
“담희야. 농담으로 쓰여서 그렇지 솔직히 신비로운 느낌이긴 하잖아. 단어가 좀 길어서 문제긴 하지만···.”
“아니면 코로나라든가···.”
“코로나라면 태양에서 뻗어 나오는 상층부의 대기를 뜻해요.”
“그거 맥주 상표 같은데···.”
리리가 코로나라는 이름을 말하자 리더인 지령이와 담희가 자기 생각을 밝혔다.
“코로나라···.”
단어 자체는 괜찮은 것 같은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든달까?
“그럼 지옥소녀나 다크위치는 어때요?”
리리는 내가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자 다른 이름도 말했는데 차라리 코로나가 더 나은 거 같았다.
‘음···. 리리는 왜 하나같이 폭망할 거 같은 이름만 생각하는 거지? 약간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옥이나 위치 같은 부정적인 단어는 어감이 좀 그러네. 아무튼, 좋은 의견이었다.”
“와! 그룹명 짓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전 마음이 막 왔다 갔다 해요. 팔랑귀인가 봐.”
화이트보드에 언급된 그룹명을 적고 있으니 김담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표님. 다른 회사는 대표님들이 그냥 막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데요. 생각해 두신 이름 없으세요?”
“나? 생각해 놓은 게 있긴 한데···.”
“편안하게 말씀해 보세요. 대표님.”
“오컬트라고.”
“오컬트요?”
“응. 라틴어에서 유래한 신비학(神秘學)이라는 뜻인데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을 뜻해. 점성술이나 초능력, 강령술, 마법, 주술 등을 예로 들 수가 있지.”
“······.”
“이 세계에서 넘어온 소녀들이 마법이나 특수 능력을 사용하니 어떻게 보면 이 오컬트와 뜻이 연관되어 있지.”
“하.”
녀석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다, 다섯 가지 컬러의 보물이라는 뜻으로도 억지로 붙일 수 있어. 오는 ‘다섯’, 컬은 ‘컬러’, 트는 보물이라는 뜻의 ‘트레저’. 합쳐서 오컬트!”
내 말을 들은 멤버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왜···. 왜 그래?”
“대표님. 설마 그 이름으로 팀명을 지으실 건 아니시죠?”
“별로니? 나는 왠지 끌리는데···.”
“대표님! 유리 언니 울려고 해요. 언니, 울지마. 그냥 대표님 의견일 뿐이야. 저게 우리 팀 이름이 되는 건 아니야. 대표님, 맞죠?”
“어? 하하하···. 별론가? 난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생각해 보세요. 음악 방송 같은 데 나가서 ‘안녕하세요. 초능력과 점성술을 연구하는 오컬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소개해야 하잖아요. 이상하지 않을까요?”
리더 이 녀석···. 계속 물리학 용어만 말한 주제에 오컬트를 무시하다니···.
“그게 아니지. 안녕하세요. 다섯 가지 컬러의 보물, 오컬트입니다. 이렇게 소개를 해야지.”
“그래도 단어 자체가 뭔가 다크한 이미지 아닌가요? 리리 언니의 지옥소녀와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에이···. 지옥소녀는 아니지. 천당소녀는 몰라도···.”
“해골바가지를 잡으러 왔는데 천당소녀도 이상하지 않아요?”
하아···.
회의실이 시장 바닥처럼 시끌벅적하게 변해 버렸다.
“난 오로라가 좋은데···.”
“이 장예원! 그건 트로트 걸그룹이 있다니까 그러네. 자꾸 그럴 거야?”
“내가 찾아보니까 오로라가 아니라 오로라 공주야. 난 그냥 오로라라니까?”
하···. 오로라나 오로라 공주나···. 엎치나 메치나···.
“아까 대표님이 보여 주신 그림 보니까, 주인공 몸에서 막 빛이 났잖아. 그게 꼭 오로라 같던데?”
그건 오로라가 아니고 마나라고 한단다. 응? 잠깐? 오로라? 오러? 아우라?
생각해 보니 아우라라는 게 바로 오러다. 영어 발음으로 하면 오러고,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는 소드 마스터가 이 오러를 사용한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들의 아우라를 보니, 왠지 뜻이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얘들아. 혹시 아우라(Aura) 어떠니?”
“아우라요?”
“어. 일류 가수의 아우라! 천재 배우의 아우라! 이게 몸에서 피어나는 무형의 기운을 뜻하거든? 찾아보니까 예술 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라고 하는데···. 뭐랄까 일종의 천사가 내뿜는 후광이라고 할까?”
솔직히 어디에 내놔도 비주얼로 꿀릴 애들이 아니다. 지금은 옆에서만 지켜봐도 외모에서 그냥 후광이 덜덜덜···. 으음···.
“자꾸 오로라랑 겹쳐서 그렇긴 한데, 천사의 후광이라고 하니 왠지 괜찮은 것 같은데요? 발음하기도 쉽고···.”
“그리고 기억하기도 쉽지. 너희들 자만할까 봐 말은 하지 않았는데, 너희한테 아우라가 나오는 거 같아. 진짜로···.”
“에이···. 원래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예쁘다고 한대요.”
“너희들이 내 자식이니? 난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얘들아. 대표님이 우리한테 아우라가 나온다고 하시는데 일단 이걸로 할까? 나중에 좀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바꾸면 되잖아.”
“전 리더 언니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해 줄 말이 있어. 드라마를 찍으면 마법 효과로 이 아우라를 많이 표현할 거야. 그러니까 드라마를 생각해도 딱 맞는 거지.”
“오오!! 드라마!”
“가즈아!”